<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그러자 오콩코의 눈이 열리더니, 그는 세상사를 선명히 알게 되었다. 불은 타오른 후 식어, 무기력한 재를 낳는 것이다.
p.181
책의 특징
- 전통적 가치관의 해체와 그로 인한 공동체의 붕괴를 생생한 일화로 담은 작품
- 전혀 다른 문화와 대륙의 배경 속에서도 비슷한 두려움을 안고 살아가는 인류의 공통점을 느낄 수 있다.
- 강함(强)에 대한 집착과 약자에 대한 배척이 어떤 결말을 초래하는지를 문학적으로 풀어낸다.
책을 만나기까지
개인적인 관심사로 노예제에 대한 책들을 읽고 있다. 노예의 역사와 배경에 대해 찾다 보면 필연적으로 아프리카 대륙을 거칠 수밖에 없다. 흑인들의 문화에 대해 역사나 사회적 관점의 책은 읽어봤지만 막상 그들의 문학적 감성을 접해본 적은 없었다. 아프리카의 감성을 모르면서 그들의 역사에 대해 이해한다는 것은 사건을 절반만 이해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학생 시절부터 다양한 경로를 통해 예술과 문화를 접하지만 대개 지리적으로 또는 생활양식의 유사성으로 인해 그 경험이 한정되어 있다. 동아시아나 서구권의 역사와 문학은 대략적으로라도 접하지만 우리는 제3세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한 번쯤 교실이나 공공기관에 걸린 지도를 통해 아프리카 대륙을 보지만 메르카토르 도법은 실제 아프리카 크기를 매우 축소시켜 놓았다고 하지 않는가. 러시아보다도 광활하며, 아시아에 이어 2번째로 거대한 대륙인 이곳에 대해 우리는 텔레비전이나 영상물로 접하는 정도 외에는 아는 것이 없다.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한 시작점으로 치누아 아체베의 작품들을 연이어 탐독해 보기로 한다.
힘에 대한 집착
소설의 주인공 '오콩코'는 경제적으로 무능력한 아버지 '우노카'를 혐오하며 자랐다. 남들은 생계를 위해 강과 들을 몇 번을 넘어 경작지에 다녀올 동안 우노카는 집 근처의 편한 땅만을 골라 씨를 뿌렸다. 남들이 그 땅을 택하지 않은 데는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쉽게 얻은 땅에서는 씨앗이 뿌리를 내리지 못했다.
우노카는 스스로 자급자족을 하지 못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빚을 빌려 살아간다. 조금이라도 여윳돈이나 작물이 생기면 야자술을 사 다른 사람들과 진탕 술을 마시고 노래를 부르는 삶을 즐겼다. 오콩코에게 그런 아버지는 무책임한 사람일 뿐이다.
오콩코는 아버지가 추구하고 표방하는 가치로부터 정반대의 방향으로 움직인다. 친절함, 여유로움, 낙천성, 유약함, 무능력은 그에게 모두 같은 단어다. 모질고 똑 부러지지 못하기에 손해를 보며, 다른 사람은커녕 자기 자신조차 챙기지 못하는 인간은 전부 한심한 존재일 뿐이다.
그래서 오콩코는 아버지 우노카가 사랑했던 모든 것을 증오하는 감정에 지배받게 되었다. 그 하나가 친절함이었고, 또 다른 하나가 게으름이었다.
p.23
오콩코는 모든 종류의 힘을 추구한다. 10대 때부터 마을의 씨름 대회에 나가 우승하여 자신의 혈기를 사람들에게 증명했다. 주변 친지와 유력자들을 찾아가 씨앗을 빌려 밭일에 매달린 끝에 그의 곳간은 나날이 차오르고, 아들이 오히려 아버지를 먹여 살리기에 이른다. 억척스러운 태도와 그로 인해 조금씩 모이는 그의 재산은 곧 유능함의 증거였다. 이제 그는 3명의 부인과 여러 명의 자식이 머무를 수 있는 집이 있으며 그들 모두가 배불리 먹고도 남을 작물과 가축이 가득하다. 오콩코는 그의 아버지가 준 유일한 유산인 실패로부터 성공을 일궈낸다.
육체적인 강인함과 재산을 바탕으로 사람들의 인정을 통해 오콩코는 권력이라는 중심부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었다. 강함, 유능함, 부유함, 남자다움을 추구할수록 오콩코의 영향력과 존재감은 나날이 커졌다. 힘은 그가 옳게 살고 있음을 증명하는 유일한 도덕적 기준이자, 그의 과거를 떨쳐낼 수 있는 면죄부이고, 남에게 무시당하거나 짓밟히지 않을 무기였다.
힘에 대한 집착은 곧 힘의 부재에 대한 멸시로 이어진다. 오콩코는 자신보다 어떤 식으로든 힘이 부족한 사람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경멸하며 그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낸다. 마을 구성원들이 공동으로 모이는 회의에서 자신보다 칭호가 낮은 사람의 말을 무시하고 업신여긴다. 집안에서는 아내와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게으름을 피우거나, 실수를 보이면 말과 행동으로 상대를 구타한다. 그는 자신에게 맞서지 못하고 움츠러드는 이들의 연약함과 두려움을 보일수록 더 경멸함과 동시에 자신의 힘을 더 과시한다. 마치 힘의 발산 그 자체만이 그의 유일한 즐거움인 것처럼.
그러나 묘하게도 오콩코의 이런 폭력성과 과격함은 독자에게 낯설게 다가오지 않는다. 19세기의 중부 아프리카의 인물이 가진 고민과 욕망이 현대사회의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무능력한 존재로 기억되고 싶지 않은 불안감, 자신과 가족이 살기에 충분한 재산을 가지고 있음에도 더 준비해야 할 것만 같은 두려움, 현재의 상태에 머무르면 뒤처질 것이라는 오콩코의 긴장감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하지만 그는 평생 어떤 두려움 속에 살았는데, 그것은 실패와 유약함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그것은 악과 변덕스러운 신 그리고 주술에 대한 두려움, 숲에 대한 두려움, 잔혹함으로 눈이 벌건 자연의 힘에 대한 두려움보다도 한층 더 컸고 뿌리가 깊었다. 그 두려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것이었다. 그것은 스스로에 대한 두려움, 즉 그가 아버지를 닮은 것같이 보이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었다.
p.22
생존과 자기 증명의 공포
오콩코에게는 '이케메푸나'라는 식솔이 있다. 우무오피아의 여성이 이웃 마을에서 살해당하는 사건이 일어났을 때 사죄와 배상의 의미로 옆마을에서 인질로 건넨 남자아이다. 딱히 갈 곳도, 의지할 곳도 없는 아이였기에 원로들은 아이를 오콩코의 집에 맡기기로 결정한다.
오콩코는 많은 자식 중 유일한 아들 '은워예'를 두었는데 자신과 달리 할아버지 우노카의 성격을 빼닮아가는 아들의 게으름과 나태함을 걱정해 왔다. 아들의 유약함을 교정이라는 명분으로 폭언과 폭력을 휘두를수록 그와 아들의 관계는 소원해지기만 했다.
반면, 외지인인 이케메푸나는 시간이 흐르면서 총명함과 당당함이 모든 행동과 말투에서 드러나 오콩코의 마음에 쏙 들었다. 감정을 절대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며 오직 엄한 모습만 보여주는 오콩코였지만 그는 이케메푸나를 자신의 원로 회의 참석에 대동할 정도로 아낀다. 이케메푸나도 오콩코의 가족을 자신의 새로운 고향으로 받아들이며 적응해 간다.
하지만 몇 년 뒤, 익숙한 나날은 오래가지 못한다. 마을의 주술사가 신에게 이케메푸나의 운명을 물었고, 그를 마을에 계속 둘 수 없다는 계시를 받는다. 타고난 출신이 다르며, 돌려보내기에는 마을의 속사정에 훤한 아이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일까. 원로들은 신의 말을 전하는 주술사의 결정에 따라 이케메푸나를 처리하기로 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어른들의 지시로 인질로 끌려왔다가 이제는 희생양이 되어야 하는 삶에 우무오피아의 주민들마저 그의 운명이 가련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누구도 주술사와 원로들의 결정에 감히 의문을 제기하지는 못한 채 침묵으로 일관한다. 우무오피아에서 전통의 권위는 절대적이며, 그 권위에 대한 의심과 도전은 곧 마을의 가치관을 부인하는 것이다. 오콩코의 처지와 심정을 알기에 마을 남자들이 자처하여 아이를 데려가기로 하지만 오콩코는 자신도 동행하겠다고 자원한다.
그는 자신이 나약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두려웠다.
p.76
이케메푸나와 함께 대동하던 무리가 마을 밖의 어두운 숲 한복판에서 걸음을 멈춘다. 높게 선 나무들은 얼굴만이 아니라 그들의 마음마저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케메푸나는 어른들의 수다가 끊기고 침묵이 흐르자 알 수 없는 전율을 느낀다. 사람은 공포에 빠지는 순간, 생존을 위해 본능적으로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뛰어간다. 오콩코는 그때 처음으로 두려움을 느꼈다.
오콩코의 거처에는 분명 산 자들이 가득하건만 방 곳곳에 침묵과 죽음의 기운이 가득하다. 그는 자신의 방에서 야자술을 연거푸 들이킨다. 아내들은 입을 다문채 아이들을 더 자주 쓰다듬을 뿐이다. 저녁이 되어 아버지는 돌아왔지만 집 어디에도 이케메푸나가 없다는 걸 안 은워예는 기억에서 잊혔던 과거를 떠올린다.
은워예가 가슴속에서 뭔가 탁 끊어지는 느낌을 처음으로 느낀 것은 이 시기, 하루 밭일을 마친 후였다. 사람들과 함께 냇가 건너 먼 밭에서 얌 바구니를 들고 돌아올 때 그는 울창한 숲 속에서 울고 있는 갓난아이의 소리를 들었다. 말을 하던 여인네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은워예는 쌍둥이를 항아리에 넣어 숲에 버린다는 얘기를 들었지만 이제까지 직접 마주친 적은 없었다.
p.76~77
이케메푸나의 죽음은 그저 외지인 한 명의 기구한 운명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건 아무것도 갖지 못한 '약자'가 전통과 권위라는 비인격적인 수단에 의해 희생당할 수 있다는 경고다. 이케메푸나의 최후는 오콩코 자신이 지금처럼 강하지 않았다면 언젠가 겪었을지 모르는 또 다른 자신의 운명이다. 그가 아버지처럼 무른 인간이었다면, 전쟁에서 사람의 머리를 제일 먼저 베어내는 용맹함을 갖추지 못했다면, 자신의 두 손만으로 가정을 일구어내는 정신력이 없었다면, 지금의 그를 지탱해 주는 권위가 없었다면 언제든 마을에서 신의 변덕에 따라 내동댕이쳐질 수 있으니까.
우무오피아에서 힘은 자기만족의 수단이 아니다. 힘은 살아남을 권리에 대한 자기 증명의 표시고, 생존의 문제다. 우무오피아는 언제나 남자와 전사戰士들의 마을이었고 그 불같은 용기와 맹렬함 덕에 주변 모든 부족들을 제치고 우뚝 서 있을 수 있었다. 그러니 우무오피아에서 태어난다면, 그는 자신의 존재를 매 순간 증명해야 한다. 단 한순간도 방심할 수 없는 이 영원한 전쟁은 평생 오콩코를 따라다닐 망령이며, 그는 그 망령을 상대로 매 순간 승리해야만 한다.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야 하는 경쟁사회의 무언의 압박은 끝없이 개인에게 아드레날린과 긴장을 부여한다. 그 결과,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면 다음 목표가 자동으로 설정된다. 자신은 원하지 않아도 사회적 시선과 위치가 그에게 어떤 막연한 기대를 갖는다. 목표를 위한 삶은 어느 순간부터 달성이 아닌, 목표 그 자체의 끝없는 추구로 변질된다. 고장 난 러닝머신처럼 점점 더 빨리, 쉴 새 없이 달리다 쓰러져야만 멈출 수 있는 이 순환은 두려움이 두려움을 연료로 삼는다.
전통이라는 이름의 가혹함
이 작품에서 오콩코는 우무오피아의 성역화된 전통과 권위적 지배의 화신과도 같다. 그는 신과 원로들의 결정에 어떤 저항이나 의문을 품지 않고 그들의 뜻을 집행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위치와 권위를 지키려고 애쓴다. 그 과정에서 우무오피아의 약자들은 형태는 다양하지만, 억압과 희생이라는 일관된 결과를 맞이한다.
시간은 흘러 머나먼 대륙에서 바다를 타고 넘어온 백인들이 그들의 신과 함께 우무오피아에 당도한다. 선교사 무리는 침략적인 행보를 보이기는커녕 오히려 공동체의 문화와 관습을 존중하며 서로 침범하지 않는 공존의 방식을 이어간다. 선교사들은 우무오피아 원로들과 종교에 관해 토론을 하고 서로의 차이를 발견하지만 굳이 자신의 신앙을 강요하지는 않는다. 대신 마을로부터 버려지고 천대받는 하층민들과 고립된 사람들을 하나씩 품어가며 세력을 확장한다.
'오수'는 마을의 소속이긴 하지만 일반 주민들과 교류할 수 없으며, 동네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자신들끼리 모여 살아야 하는 일종의 불가촉천민 집단이다. 그들에게는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와 자유가 보장되지 않는다. 그들은 차별당하기에 빈곤과 불결함에 노출되고, 그런 특성이 빚어낸 그들의 모습으로 인해 다시 차별받는 인과관계의 순환이 반복된다.
오수는 신에게 바쳐진 사람, 달리 말하면 제쳐 놓은 존재로서, 영원한 금기이고, 그의 자손들은 또한 그랬다. 일반인과는 결혼할 수도 없었다. 이들은 사실 부랑자로, 대사당 가까이에 위치한 특정한 곳에 살았다. 어디를 가나 이들은 헝클어진 더러운 머리카락을 길게 기른 채 금단의 천민이라는 모습을 하고 다녔다. 면도칼은 그들에게 금기였다. 오수는 일반인의 모임에 참가할 수 없었고, 일반인 또한 오수의 집에 들어갈 수 없었다. 이들은 부족의 네 개 칭호 가운데 어떤 것도 얻을 수 없으며, 죽음을 맞아도 악령의 숲의 다른 소수가 이들을 묻었다. 이런 이들이 어떻게 예수를 따르는 사람이 될 수 있단 말인가?
p.185
처음에는 그저 머무를 거처와 음식을 찾아온 오수들은 곧 기독교의 가르침에 누구보다 감화되어 열성적인 신도로 탈바꿈한다. 다음에는 연달아 쌍둥이를 낳아 친지로부터 따돌림당한 여인이, 그다음에는 가족과 갈등을 빚어 가출한 청년이, 이후에는 이렇다 할 업적도 재산도 없어 무시받고 남들이 업신여기던 남자들이 하나 둘 찾아온다. 이들은 우무오피아가 세월에 걸쳐 쌓아 올린 재물과 권력과 명예의 울타리의 벽을 넘지 못한 소외된 이들이다.
하지만 교회에서 그들은 모두 동등한 '신도'였으며, 선교사의 교육을 받는 '학생'이었고, 하느님 아래 모두가 '형제이자 백성'이었다. 신의 계시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내쳐진 이들은, 정작 우무오피아가 아닌 바다 건너 백인들의 보이지 않는 제국과 종교가 그들을 품고 있었다.
이케메푸나의 죽음 이후 방황하던 은워예는 교회를 지나가다 성가聖歌를 듣고 충격에 빠진다. 가사가 담고 있는 자비와 포용의 내용은 그 스스로도 무엇인지 알지 못한 채 막연히 찾아 헤매던 바로 그 감정이었다. 결코 인정받는 아들이 될 수 없다는 답답함, 자신보다도 외지인을 더 아꼈던 아버지에 대한 울분, 그런 이케메푸나를 아무렇지 않게 해친 아버지와 마을에 대한 두려움을 하소연할 곳 없던 은워예에게 누군가 도움의 손길을 내밀고 있었다. 폭언과 폭행에 지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질타가 아닌 보살핌이었다. 자신의 아버지가 그토록 혐오했던 나약함의 일부를 교회는 차별 없이 받아들였다.
우무오피아의 어른들은 기독교가 오기도 전부터 수시로 마을의 젊은이들이 점점 예의를 모르며, 이웃들의 정과 의리는 사라지고, 남자들은 점점 용기와 도전을 주저함을 한탄하곤 했다. 옛 우무오피아의 영광스러웠던 과거를 읊으며 그 시절의 전설과도 같은 일화와 영웅을 찬양한다.
"남자들에게 먼 부족에도 친구가 있던 좋은 시절이었지. 자네 세대들은 그걸 모르지. 자네들은 집에만 있고, 바로 옆집의 이웃도 두려워하지."
p.162
하지만 누구를 위한 영광이며, 누구를 위한 영웅담일까? 쌍둥이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둘 중 한 명이 죽음을 맞이해야 하며, 남자로서 자신의 힘을 증명하지 못하면 무시당하는 마을에서 과연 영웅은 태어날 수 있는가? 부족의 기개와 담력이 쇠퇴하는 것이 과연 해가 갈수록 유약해지는 젊은이들의 탓일까? 아니면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그들의 가혹한 시련 때문일까? 신의 뜻이라는 이유로 원로들은 오늘도 진실로부터 눈을 돌린다.
우무오피아를 나날이 쇠퇴하게 만드는 건 외부에서 찾아온 시련이 아니다. 당연하다는 이유로, 전통과 권위라는 이유로 구성원들이 침묵하고 묵인한 폐단이 세월에 걸쳐 지반을 침식하고 있다. 백인과 기독교는 그 침식의 갈라진 공백을 타고 들어와 자리를 채울 뿐이다.
불은 스스로를 태우고 재를 남긴다.
수를 불려 가는 기독교는 마을의 권위와 가치마저 위협하는 세력으로 거듭난다. 선교사들이 제공하는 기술과 교육에 주민들이 매혹될수록 원로와 주술사의 영향력은 나날이 줄어든다. 전통의 권위가 약해질수록 그에 비례하여 신앙을 왜곡하고 광신에 빠지는 추종자 무리들이 마을에서 말썽을 부리면서 교회와 마을의 갈등이 심화된다.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알 수 없는 다툼은 소문에 소문이 붙어 험담과 비방이 되고, 사람들은 점점 흥분하고 상대에 대해 실체 이상의 분노와 혐오를 키워간다.
결국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하고, 교회가 파괴되자 백인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재판소와 판관과 집행자들을 마을로 데려온다. 종교의 가르침은 끝나고, 총과 법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는 통치가 시작된다.
백인과 서구문명이 빠르게 번질수록 오콩코의 지위는 한없이 떨어진다. 과거에 사람들은 그의 모습과 말만 들어도 두려워했지만 이제 그의 의견은 자주 무시당한다. 아들 은워예는 가족을 버리고 선교사를 찾아가더니 그들의 지식과 종교를 배우기 위해 바다를 건널 것이라고 한다. 이전의 마을 사람들은 모두 오콩코처럼 용맹한 전사들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백인과 그 시종들의 눈치를 보기 바쁘다.
오콩코는 왜 세상과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갈수록 나약해지는지 고민에 빠진다. 집에서 타오르는 모닥불의 불길을 보던 그는 떠올린다. 불은 맹렬하게 타오를수록 땔감을 더 빨리 태우고 금방 사그라든다. 더 이상 태울 것이 남지 않으면 불은 최후에 자기 자신마저 불사른 뒤 사라진다. 불이 꺼지고 나면 보잘것없는 재만 남는다. 우무오피아도 그 자신도 꺼져가는 불씨다.
오콩코의 불씨는 백인 판사가 마을에 온 순간부터 꺼져버렸다. 그토록 되고자 했던 마을의 영예로운 원로와 추장들은 이제 단 한 명의 백인 앞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그런데 이 백인 판사는 자신은 영광스러운 여왕 폐하의 대리인 중 한 명으로 이곳에 왔을 뿐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오콩코가 꿈꾸었던 원로와 추장들은 이 백인 판사와 그들의 여왕이라는 자와 비교하면 얼마나 보잘것없는 존재인가?
자신이 경험해보지 못한 권위와 계급의 절벽. 직접 행차하지 않고도 바다 건너 땅에까지 원격으로 권력과 힘을 행사하는 관료제의 힘 앞에 오콩코는 무력감을 느낀다. 그가 아무리 마을에서 씨름을 제일 잘하며, 혼자 힘으로 자수성가했어도 이들 앞에서는 그저 한 명의 '흑인'일 뿐이다. 그가 추구했던 원로와 추장의 삶이 계단의 꼭대기인 줄 알았건만 더 높은 위치에서 보면 아무것도 아닌 위치에 불과하다.
오콩코가 지금의 삶을 살기 위해 참고 희생한 것들, 희생시키고 억압한 사람들의 모든 수고와 노력은 이제 아무런 가치가 없다. 오콩코는 그의 삶이 계속해서 타오르는 불꽃인 줄 알았건만, 지금의 그는 꺼져가는 불씨와 잿더미일 뿐이다.
"우린 당신들이 행복할 수 있도록 당신들에게 평화로운 통치 체제를 가져왔습니다. 누군가 당신들을 괴롭히면 우리가 구하러 올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당신들이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도록 놔두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법정을 세워 위대한 여왕님이 다스리시는 영국에서처럼 사건을 간결하고 정의를 구현합니다."
p.227~228
작가 치누아 아체베는 교과서적으로만 접하던 서구문명의 침입과 제국주의를 오콩코와 같은 개인의 시선으로 풀어낸다. 우리는 기존의 전통 사회를 종교적 사명과 개척이라는 명분으로 근대 서구가 어떻게 유린해 왔는가를 다양한 변주로 접하지만 그것들은 지난 시대의 피상적인 지식이다.
우무오피아는 당시 근대의 손길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던 제3세계를 대변한다. 작가는 그 세계들이 무고한 희생자라는 통념을 벗어던지고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진 억압과 차별을 객관적으로 조명한다. 피해자는 항상 선하며, 가해자가 악이라는 일반화된 공식을 거부한다. 타문화에 대한 존중과 이해도가 없는 인종차별적인 서구권과 무고한 희생양으로서의 전통 사회라는 하나의 렌즈로만 바라보면 당시의 역사적 흐름을 오히려 지나치게 단순화하여 왜곡하는 것이다.
우무오피아에서 일어난 일은 단순히 백인종과 비백인종의 투쟁 또는 전통과 근대의 갈등이나 서구와 제3세계의 대립이 아니다. 이것의 하나의 구조화된 사회적 억압이 다른 체계화된 억압으로 넘어가는 공백과 혼란 속 과도기의 이야기다. 시대의 부침 속에서 기존의 억압자는 물러나지만, 그 안에서도 기회를 잡는 자들은 새로운 지배자로 부상한다. 모든 것이 변하는 이 혼돈 속에서 유일한 질서라면, 권력의 모습과 지배자는 바뀌어도 '억압'의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작가는 사회가 '왜' 무너져 내리는지, 어떤 맥락과 과정을 거쳐 약화되는지를 담담한 이야기 속에서 독자가 생각해 보게 한다. 책을 넘기는 동안 독자도, 오콩코도, 마을 사람 누구도 변화의 조짐을 체감하지 못했다. 마을이 가진 한계와 모순을 너무나 자연스러운 관습과 문화로 묘사하는 오콩코의 시선으로 들여다보기에 독자도 그것이 문제인지 모른 채 페이지를 넘기기 쉽다.
오콩코를 비롯한 원로들이 지배했던 과거가 더 좋았던 시절인가? 아니면 백인판사와 서구의 법이 들어온 지금이 더 공정한 사회인가? 각자의 의견은 다를 수 있어도 독자는 이 물음에 쉽게 답하기 어렵다.
불은 맹렬하게 타오를 때 가장 화려하지만, 그것이 자기 자신을 불사르는 일임을 알지 못한다. 우무오피아의 위세와 영광의 뒤에서 사람들은 하나 둘 등을 돌리고, 재력과 권력의 정점을 향해가던 오콩코는 이제 그저 식민지의 원주민이 되어 모든 것을 잃어간다.
19세기의 우무오피아아의 풍경은 21세기의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가치에 기반한 삶은 줄어들고 있고 이권과 패권이 국제 정치의 새로운 논리로 자리 잡고 있다. 불확실성 속에서 안정적이라고 여겼던 것들이 요동치고 있다. 모두가 자신의 권리와 힘을 극한으로 추구하고, 누군가는 그 안에서 종속되어 간다. 잘못된 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당연한 이치라고 생각하는 사이 사람들은 흩어지고 각자의 방향으로 사라진다. 세계의 어딘가는 문자 그대로 불에 타고 있다.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
글토막
오비에리카는 사려깊은 사람이었다. 여신의 뜻이 이루어진 다음, 그는 자신의 오비에 앉아 친구의 불행을 슬퍼했다. 왜 본의 아니게 저지른 잘못으로 이렇게 심한 고생을 해야 하는가?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 답은 없었다. 생각이 더욱 복잡해질 뿐이었다. 그는 내다 버린 자신의 쌍둥이들이 떠올랐다. 그 아이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대지의 여신이 쌍둥이는 대지에 대한 모독이므로 없어져야 한다고 명했었다. 그리고 만약 자신들이 위대한 여신을 거역하는 것에 대해 엄정한 벌을 내리지 않는다면, 여신의 저주가 명을 어긴 자들에게만이 아니라 온 땅에 퍼져 나간다는 것이었다. 어르신들은 손가락 하나에 기름이 묻으면 네 손가락으로 번진다고 말하곤 했다.
p.1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