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핸드 투 마우스> 린다 티라도
'과연 이 직장이 일에 대한 나의 꿈과 야망을 충족시킬 것인가'라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호사를 누리는 사람들도 있다. 나는 직장의 근사함을 재는 나만의 척도가 있다. '내 소화기관의 은밀한 사정을 상사에게 알릴 것을 요구하는 일터인가, 아니면 원할 때 그냥 화장실을 갈 수 있는 일터인가'가 그것이다. (...) 화장실행을 미리 고지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일터 분위기에 대해 많은 점을 시사하기에 중요하다. 내 경험상, 상사가 아랫사람의 요도를 통제하는 직장은 다른 굴욕적인 일들도 한 다발씩 요구하는 경향이 있다. p.53
책을 만나기까지
이전의 <원더풀 랜드>를 읽던 중 미국의 현실과 정치적 양극화에 대해 독서모임에서 토론할 것으로 예상이 되었기에 다른 참고할만한 책이 있을지 인터넷 서점과 도서관 홈페이지를 돌아다녔다. 복잡하고 난해하며 분량이 상당한 미국사나 정치 서적들을 읽고 싶지는 않았다. 전문적이고 심층적인 분석은 이미 여러 언론과 전문가들이 내놓았으니까. 그보다는 '보통의' 미국인들이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그들이 현재의 정치구도와 세상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를 알고 싶었다. 단순히 지나가는 뉴스 인터뷰의 몇 마디가 아닌, 그들의 희망과 불안감의 구체적 모습에 대해.
사실 <핸드 투 마우스>는 트럼프나 미국의 양당체제, 최근의 미국우선주의나 관세협상과는 관련이 없다. 그럼에도 이 책을 잠시 읽어보고는 집까지 들고 온 이유는 3가지였다.
1) 256쪽의 에세이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과 내용
2) 하위 30%에 걸쳐있는 이들의 일상과 그들의 솔직한 생각
3) 생각해 보면 하위 30% 구성원들의 생각을 듣고 보고 마주할 일이 어디에서도 없었다는 점
저자 린다 티라도는 비록 대학교를 중퇴했지만 고등교육 과정을 이수할 만큼의 사회배경과 일반적인 지성, 교양 수준과 사고력을 갖춘 평범한 여성이다. 하지만 그녀는 방광에 문제가 있어 장시간 서있기 어려워하고, 치과를 갈 수 없어 입을 다물고 살아야 하며, 차가 없어 3km와 5km 거리의 두 직장을 번갈아 걸어서 이동해야 하는 워킹푸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하다.
린다는 우리들과 능력 면에서도, 인성과 자격 면에서도 뒤처지지 않는 평범한 인간이다. 하지만 그녀는 몇 번의 연이은 불행과 사고를 겪으며 가난의 문턱으로 미끄러졌고, 그 경우가 우리에게도 찾아오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노력의 계급화
노력이라는 단어는 결과보다는 과정에 더 초점을 두는 말이다. 토끼와 거북이의 일화에서 거북이가 토끼를 이겼다는 결론만을 떼어놓고 보면 이 우화는 말장난이 된다. 교훈이 되기 위해서는 이야기 그 자체의 전개처럼 과정이 있어야 한다. 토끼의 방심, 똑같이 자만하지 않고 노력한 거북이, 경주의 우승이라는 서사가 있기 때문에 말장난은 교훈으로 탈바꿈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노력중심 사회는 노력의 서사와 과정보다는 '그 노력의 대가로 무엇을 증명했는가'로 초점을 옮기게 마련이다. 이야기의 결말이 존재해야 하듯 노력의 결과물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제 시선은 결론으로 다시 서서히 이동하면서 우화의 교훈 대신 경쟁의 결과물만이 남는다. 거북이의 노력은 성과와는 별개로 그 자체로 가치 있는 것일까? 아니면 토끼를 상대로 이겼기 때문에 가치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
우리는 나이 들수록 어릴 적 재밌어했던 우화와 교훈이 담긴 이야기들을 재미없어한다. 그것들은 현실과는 다르다고, 핵심을 말하지 않는다고. '나'는 토끼의 재능과 속도를 가졌으며 방심조차 하지 않을 거라고.
노력이 성과물을 평가하는 단일 기준이 되면 개인의 결핍이나 불만은 노력이 부족했다는 방향으로 귀결되게 마련이다. 그 논리가 사회계급과 계층화에 연결되면 노력은 사회구성원의 현상태를 정당화하는 명분이 된다. 딱히 무책임한 삶을 살지도 않았고, 부정한 수단을 사용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의 삶과 가족을 소홀히 하지도 않았지만 현재의 상태에 만족하지 못한다면 '나'는 노력이 부족한 인간이다.
'왜 상대적으로 궁핍하거나, 생활에 어려움을 겪는 계층들은 자신의 상태를 개선하려고 노력하지 않는가?'
이 물음에 대해 작가는 노력 또한 최소한의 경제적 여건이 갖춰져야만 가능한 '자산'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노력이 노력을 방해할 때
저녁 시간대 중반까지는 첫 번째 일터인 바에서 일해야 했는데, 두 번째 일터인 식당에서 저녁식사를 접대하는 종업원들은 사전 준비를 위해 오후 세네 시에는 출근해야 했으므로 내가 저녁시간대에 일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바 때문에 식당에서 좋은 시간대를 놓치는 것도 모자라 식당 일 때문에 바에서 열리는 파티 등 특별한 행사들, 즉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행사도 놓쳤다.
일이란 이런 식이다. 두 곳 이상의 일자리를 뛸 때마다 나는 스케줄이 겹쳐서 한 곳에서 버는 만큼을 다른 곳에서는 잃었다. 즉, 첫 번째 일터에서 특별행사나 추가 노동시간을 미리 보장받을 수 있다면 두 번째 일터는 구할 필요가 없었다. p.38~39
내 주변에서는 누구나 먹고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다. 이것은 우리가 모든 잠재적 네트워크에서 단절돼 있음을 뜻한다. 내가 일과 관련한 인맥이 별로 없던 여러 이유 중 하나다. 인맥을 쌓을 기회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무급 인턴직, 또는 줘봤자 점심값 정도 주는 인턴직을 수락하는 것은 집세를 낼 필요가 없는 사람들의 몫이다. p.65
좋은 근무여건과 작업환경을 제공하는 일자리를 알아보고, 필요하다면 시간을 희생해서라도 여러 직업을 통해 수입을 늘리라는 조언의 함정이 여기에 있다. 남들보다 낮은 출발선에서 시작해야 하는 이들이 구할 수 있는 일자리 거의 대부분 경제적 보상이 충분하지 않다. 양질의 일자리가 아니다. 고용형태와 근무시간이 불규칙적이다. 최소한의 의식주와 제세공과금을 납부하기 위한 생계유지비를 확보하려면 장시간 근무가 필수조건이 된다. 문제는 어느 한 일터에서 장시간 근무를 할 경우, 다른 직업을 구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시간대가 겹치게 마련이다.
그날 하루의 일이 생각보다 빠르게 마무리되어 일찍 퇴근한다고 저녁의 여유가 반겨주지는 않는다. 대부분의 하층계급에게 노동시간의 축소는 수입의 감소를 의미한다. 저자와 같은 하층계급이 가까스로 두 가지 이상의 일자리를 얻어냈다고 해도 앞시간의 일터에서 정규 근무시간보다 조금이라도 일이 늦어져 잔업을 해야 하면 다음 일터의 근무 시작시간에 맞춰 도착하기 어려워진다. 저자의 국적이 미국이라는 점, 그녀가 사는 고향이 대도시가 아니라서 일터가 여기저기 분산되어 있다는 점, 자동차를 굴릴 여유가 없어 이동수단이 도보밖에 없다는 걸 감안하면 이 말의 무게감은 다르게 다가온다.
더 좋은 직업과 일자리를 알아보는 것과 그것을 얻어내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작가는 한때 대학교에도 다녔으며 정치와 사회활동에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가 일하고자 하는 분야에서 '성공적인' 경력기반을 다지려면 무급 또는 저임금 인턴이나 비영리조직 활동이 요구된다. 생활형편이 넉넉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신의 시간은 온전히 바쳐야 하면서도 그 노동의 대가에 상응하는 보상은 받을 수 없다. 당장의 금전적 대가보다는 1) 인턴을 마무리하면 정규직으로 전환될지도 모르는 기회, 2) 업계 사람들의 연락처를 통해 연락을 주고받을지 모를 가능성, 3) 경험이라는 장기적인 보상에 만족하라고 한다.
이런 일자리를 수락할 수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몇 개월의 수입이 없어도 한동안 버틸 만큼의 재정상태를 갖춘 이들뿐이다. 눈앞의 보상을 잠시 이연 시켜 더 큰 보상을 얻으라는 성공 법칙은 출발선부터 이미 개인의 노력과는 무관하다. 독립된 재산을 형성하기 전인 청년기라면 사실상 가족과 부모라는 '환경'이 노력의 실현 가능성을 좌우하는 셈이다.
빈곤하다고 하여 자기 자신의 상태를 돌아보거나 장기적인 비전을 생각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다만 집에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가스가 끊기지 않기 위해, 휴지가 없어 볼일을 보지 못하는 일을 겪지 않기 위해 수중에 단 돈 몇 푼이라도 확보해야 하는 긴박함이 환경과 사고를 지배하는 것이다.
이렇듯 최소한의 경제활동 단위이자 출발선인 구직 단계에서부터 무언가에 노력하기 위해서는 다른 곳에서 노력을 포기해야만 하는 역설이 펼쳐진다.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번 달의 생활을 포기해야 한다.
살기 위해 몸을 망쳐야 하는 이유
의사들은 잠을 잘 자고 잘 먹으라고 환자에게 말하는 것을 아주 좋아한다. 마치 그게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있는 일인 것처럼 말이다. p.88
내가 인간 이하처럼 느끼거나 실제 나 자신보다 형편없는 사람처럼 느끼는 경우는 아주 많다. 예를 들어, 나는 독서를 사랑한다. 강한 호기심을 타고난지라, 무엇을 알고 싶을 땐 불편한 질문도 별생각 없이 던지는 편이다. 하지만 이런 나도 최저임금이나 그에 준하는 임금을 받고 일할 때는 책을 읽지 않는다. 그러기엔 너무 피곤하다. 책장 위로 눈알을 굴리며 정보를 소화하는 노력조차 그저 너무 힘에 겨워서 잠들어버린다. 내게 남아있는 그 알량한 에너지를 자기계발 같은 부질없는 것에 쓰도록 나의 뇌가 허락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피곤해 기절할 때까지 멍하게 벽이나 깜박거리는 화면을 바라보기만을 원한다. p.94
우리는 그걸 느끼며 산다. 언제나 피곤한 상태로 주의가 산만해져 있는 것이 높은 수준의 인식 활동을 하는 데는 그다지 좋지 않다는 것 정도는 직접 알려줄 수 있었다. 나 역시 서서히 고급 수준의 개념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멈추기 시작했다. 생활을 이어가려고 견뎌야 하는 일을 뛰어넘는 생각을 해본 지가 너무나 오래되었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멍청한 기분이 든다. 나에게는 철학도, 음악도, 문학도 없다. 그런 생각을 할 여력이 없기 때문임을 알고 있지만 여전히 가슴은 쓰리다. p.132~133
저자가 대변하는 이들은 전혀 수입이 없는 절대적 빈곤계층이 아니다. 순간의 상태와 운에 따라 중위권의 밑바닥과 하위권의 꼭대기 사이에서 턱걸이를 하는 '워킹푸어'들이다. 수입이 있기 때문에 주와 연방정부가 제공하는 복지 혜택을 조건부로만 신청 가능하면서도, 삶의 여건이 크게 개선되지는 않기에 계속 일을 해야만 하는 계층들이다. 이들은 식사를 차리기보다는 간단한 패스트푸드나 간편 조리식 위주로 해결하고, 담배와 술과 저가의 진통제로 고단함을 버텨낸다.
자극적인 방법 대신 자기계발을 하며 자신과 가족을 위해 더 신경 쓰라는 조언은 하루에 8시간 이하의 근무를 하며 주말과 휴일에 휴식을 취할 수 있는 계층에게만 통하는 말이다. 아침 5시에 첫 번째 직장까지 '걸어서 이동해' 6시간 근무를 하고 오면 오후 1시에 집에 돌아와 정신없이 잠만 잔 뒤 다시 오후 6시에 다음 직장까지 '걸어가서' 새벽 1시까지 일하고 오는 삶에는 휴식이 있을 수 없다. 단지 다음 근무시간표에 늦지 않기 위해, 지각 벌금이나 근무시간 단축으로 수입이 줄어들지 않도록 버티기 위해 위장에 무언가를 채우고 수면을 보충할 뿐이다.
장시간 근무로 닳아가는 육체와 정신은 '시간을 투자하여' 장기적으로 상태를 개선하고 정서를 함양하는 취미를 원할 여력이 없다. 축적된 스트레스를 폭발적으로 쏟아내기 위해서는 그에 비례해 폭력적이고 자극적인 중독 물질이 들어가야 한다. 건강을 해친다는 걸 몰라서 궁핍한 사람들이 술과 마약, 담배에 몰입하는 게 아니다. 담배를 피우면 독이 폐와 기관지에 주입되는 걸 알지만 담배를 통한 자극으로 일하는 동안 졸리지 않고, 무언가를 후려치고 싶은 충동을 한동안 없애주기 때문이다. 술과 마약이 신경계와 뇌를 망가뜨리는 걸 알지만 병원에 갈 돈과 시간이 부족해 망가진 몸의 통증을 누그러뜨리는 건 중독에 빠지는 것뿐이다.
건설적인 취미와 생활은 워킹푸어들이 감당할 수 있는 수입 이상의 추가지출을 요구한다. 운동을 위해서는 헬스장에 등록해야 하고, 건강한 식단을 위해서는 신선한 식품을 파는 마트까지 갈 수 있는 자동차와 그것들을 보관할 냉장고가 있어야 한다. 육체에 쌓인 통증과 결림을 없애고자 마사지를 받거나, 침을 맞거나, 정신상담을 받으려면 돈을 내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미 빡빡하게 짜인 근무시간표에서 몇 시간을 덜어내야 한다. 그리고 이들에게 근무시간 조정은 보통 수입의 감소와 같은 말이다.
그러니 지금 당장의 모든 파괴적 충동과 우울함과 자기혐오와 만성적인 적개심을 삭이고 묵묵하게 일함으로써 지갑에 몇 달러라도 들어오려면 그들은 담배를 피워야 하고, 싸구려 술의 알코올에 취하고, 질 낮은 의약품이나 마약으로 통증을 견뎌내야 한다.
우리가 구석으로 밀어낸 가난
분노한 마을 사람들이 쇠스랑을 가지러 가기 전에 어떻게든 손을 봐야 한다고 느낀다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 서비스직 노동자에게 시시때때로 못되게 구는 것을 그만둬라. 누군가가 일을 잘하면 그 거지 같은 만족도 조사에 응해줘라. 왜냐하면 우리는 정말로 만족도 조사 할당량을 채워야 하기 때문이다. 팁 주기를 거부하면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거나 고고한 도덕적 의무를 수행하는 척하는 것을 그만둬라. 우리에게 당신들이 필요한 만큼 당신들 또한 우리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하기 시작하라. p.249
현대사회의 특징은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을 최대한 가리고 편리함과 쾌적함으로 그 자리를 채운다는 점이다. 상하수도는 아스팔트 아래로 파묻혀 이따금 폭우가 아니면 그 존재감을 인지하지조차 못한다. 쓰레기들은 야심한 새벽에, 우리가 하루를 시작하기 전에 정리된다. 화장실은 보통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위치한다.
가난이라는 단어를 보고 들을 때마다 항상 머리에 떠올리는 이미지가 있다. 어디에서 누가 그런 개념을 알려준 적도 없고, 나에게 가르친 적도 없지만 어느 순간부터 나는 가난에 대해 한 장면을 머리에 담아두고 있다. 진창에 떨어진 빵 부스러기나 낱알을 주워 먹는 넝마차림의 어떤 사람의 모습이다. 아마도 국제구호단체들이 만든 홍보영상이나 발간자료를 통해 그런 관념이 형성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도 알다시피 가난은 그런 모습으로 생기지 않았으며, 그런 형태로 다가오지 않는다. 절대적 빈곤부터 워킹푸어에 이르기까지 가난은 여러 얼굴을 가지고 있다. 근거 없는 내 상상 속 가난의 모습과 현실의 괴리가 발생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1) 유니폼과 단체복장, 사내구호와 접객 미소가 그 빈 공간을 메우고 있다. 누군가의 상대적 결핍을 표준화와 매뉴얼화라는 포장을 통해 일원화함으로써 우리의 시야에서 가려주기 때문이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 A를 마주할 확률보다, 내가 지불한 대가에 응당한 서비스를 제공할 의무가 있는 점원 A로 마주칠 확률이 더 높은 세상이다.
2) 가난이나 경제적 불평등, 계급 고착화, 복지 사각지대와 같은 문제들을 다룬 심도 있는 토론회나 다큐멘터리를 보면 그곳의 진행자와 참가자들은 대부분 정해져 있다. 깔끔하고 말쑥한 차림의 아나운서, 교수, 연예인, 인플루언서, 정치인들이다. 가난한 이들의 생생한 사연과 일상은 인터뷰나 녹화물의 참고자료 형태로 공개될 뿐 그들이 직접 나와 자신들의 생각을 우리에게 말하는 경우를 본 적은 없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 결과 가난은 어딘가로 내가 직접 찾아가지 않는 한 보기 힘든 일종의 진열상품이 되었다. 자주 마주치지는 않지만, 어쩌다 그런 것이 있었다는 걸 인지하고 다시 지나치는 무언가. 결국 나랑은 크게 관련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언가로 바뀌는 것이다.
책을 읽다 보면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대안도 없으면서'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 또한 이 책을 읽으며 느꼈던 양심의 가책을 마음의 간식 정도로 소모하고는 몇 주나 몇 달이 지나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 얇은 책 하나가, 전문적 지식이나 학위 없이 자신이 겪은 가난의 '자질구레함'을 묘사한 이 책 하나가 장황한 경제이론이나 복지, 정치토론보다 마음에 와닿은 이유는 하나다. 가난을 내 머릿속 미디어의 진열상품으로 남지 않게끔, 숫자와 표의 감옥에 갇힌 통계자료로 남지 않게끔, 유니폼과 깔끔한 도시의 풍경 너머를 생각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사는 곳과 직장 근처를 돌아다니다 보면 오수의 찌린내가 코로 올라올 때가 있다. 주말이라 환경미화원 분들이 쉴 때면 가게와 점포의 쓰레기들이 보도 위에 쌓여있는 걸 기억한다. 단지 내가 그것들을 기억에서 밀어냈을 뿐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글토막
한 주 한 주가 완벽한 사람들은 이틀 동안 화장실 휴지로 사용하던 종이냅킨마저 다 떨어져서 새벽 세 시에 월마트에 가 수표를 현금화해 본 적이 없다. p.18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