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 세라 자페
아주 오래전 노동은 너무 고되서 아무도 하려고 하지 않았다. 봉건시대부터 대략 1970~80년대까지도 지배계층은 가진 재산에 주로 의지해서 살았다. 고대 그리스 상류층은 육체노동자, 장인, 상인을 포함하는 하층계급 노동자들인 바나우소이banausoi와 노예에게 일을 맡기고 자신들은 여가를 즐기며 공동체 생활에 참여했다. 제인 오스틴의 소설을 읽다 보면, 누구랑 결혼할지 머무적거리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소설 속 인물들이 대체 어떻게 먹고 사는지 의문이 듦과 동시에 깨달음도 얻는다. 부자들에게 일이란 누군가 대신해 주는 것이었다. p.8
책을 만나기까지
인구 감소와 관련된 모임 지정 독서를 읽다가 책 덮개에서 <일은 당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라는 제목을 발견했다. 돌려 말하지도 않으며, 비유와 의미를 함축하려는 노력 하나 없이 직설적인 문장은 눈에 날아와 박혀 빠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지금 다니는 직장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 나의 경력이 과연 어디로 향해가고 있으며 그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이 많았기에 망설임 없이 책을 추가로 빌렸다.
이 책은 번아웃이나 감정노동 또는 과열경쟁이나 폐쇄적 조직문화에 지친 현대인의 마음을 다독여주는 심리상담이나 위로의 글귀가 담긴 책이 아니다. 따라서 이 책의 목적은 치유가 아니다. 대신 많은 사람들이 직장과 직업에 대해 느끼는 피로감과 불만의 근원을 역사와 문화, 경제의 흐름을 따라 파헤치고 분석한다.
왜 우리는 일에 열정을 쏟아붓지 못하는가?
열정을 쏟아부었지만 왜 결과에 만족하지 못하는가?
자기 일에 관심을 갖고 몰두하라는 가치관은 과거에도 있던 '당연한' 담론인가?
일을 좋아하지 못하는 '나'는 문제가 있는 것일까?
청소년기가 진작에 지났어도 우리는 가끔씩 세상의 논리에 삐딱선을 타고 싶을 때가 있다. 하지만 대개 그런 삐딱선을 드러내면 사회와 주변은 '논리가 없는' 우리의 빈약한 반항을 비웃는다. 직장인답게, 어른답게 굴라는 지적을 받으면 우리는 그때부터 그 삐딱선을 안으로 숨긴다. 하지만 안으로 숨어들었다고 하여 반항심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단지 그 반항심이 더 설득력을 얻는 날이 올 때까지, 그 주장이 더 많은 사람들의 지지와 공감을 받는 날이 올 때까지 기다릴 뿐이다.
작가는 그동안 경쟁, 능력주의, 성과, 자기 계발이라는 일방적 가치관으로 인해 가지치기당하고 무시받은 이 반항심들에 힘과 논리를 실어주고자 역사와 문헌과 근거를 가져온다. 당신의 반항심은 이유가 있는 것이라고. 당신이 일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은 잘못되지 않았다고.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일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고.
가득한 컨베이어 벨트, 비어있는 손
결국 산업 노동자들은 당근 하나를 받게 된다. 헨리 포드의 포드 모터 컴퍼니에서 이름을 딴, 이른바 포드주의 타협이었다. 노동자들은 꽤 많기는 하지만 감당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보통 하루 8시간 주 5일 근무) 자신들의 시간을 고용주에게 바치고, 대신 회사로부터 후한 급여와 의료보험, 약간의 유급 휴가와 연금을 받게 되었다. 노동자가 생계유지, 가족 부양과 퇴근 후 여가를 즐길 수 있게 된 것은 모리스가 말한 "휴식의 희망"이었다. p.9
노동운동을 통해 노동자들은 소위 '가족 임금제', 즉 남자 혼자 일해도 아내와 아이를 부양할 수 있는 정도의 급여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 제도는 1896년 호주에서 한 가족을 부양할 수 있는 가장이 되려면 필요한 최저임금 기준을 법으로 정하며 최초로 도입되었다. (…) '가족 부양자'가 되는 것은 노동자 계층 남성이 조립라인에서 누릴 수 없던 자부심과 권력을 얻을 방법이었고, 두둑한 월급봉투를 내밀지 못하는 이들과 비교해 남자다움도 명확히 할 수 있었다. p.51~52
직업은 애초에 인간 역사 대부분의 시간 동안 즐거웠던 적이 없었다. 고대부터 시작하여 근대 대부분의 과정 동안 피지배계급은 자신들의 직업 그리고 노동으로 산출한 결과물을 자신의 뜻대로 통제할 권한이 없었다. 그리스 시민들에게 일과 노동이란 애초에 정치 활동에 참여할 수 없는 계급들이 마땅히 해야 하는 몫에 불과했다. 그리스의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착취를 기반으로 일부만이 누리던 사회활동이었다.
신분제 기반의 인류역사에서 이 흐름은 큰 변화 없이 이어졌지만 공장 그리고 그 공장에 필요한 대규모의 노동자 수요와 함께 바뀌게 된다. 헨리 포드의 포드 모터 컴퍼니는 세계 최초의 자동차 대량생산 방식을 고안한 것으로 공학도와 경영가들에게 중요한 인물이지만 포드는 그 이상의 것들을 만들어냈다. 지쳐서 쓰러질 정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결코 짧지는 않은 일일 8시간 근무를 한 달 동안 바치면 회사는 그에 대한 보상으로 노동자에게 3~4인의 가정 생계를 꾸릴 수 있는 급여를 제공하는 보상체계, 즉 '포드주의 타협안'이 등장했다.
포드주의 타협안은 자동차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이상으로 우리의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이끌었다. 남성들은 노동의 대가로 얻은 수입을 통해 가부장의 권위를 집안에서 확보하게 되면서 우리에게 익숙한 현대적 가부장제가 등장하기 시작한다. 과거에는 여성들도 생계를 위해 밭에서, 들에서, 또는 누군가의 가사노동을 대신해주고 품삯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남성가장의 단독 노동만으로도 생계유지가 가능해지면서 아내의 역할은 8시간 근무로 정신과 육체가 지친 채 돌아온 남편이 원기를 회복하고 다시 출근할 '활력'을 얻도록 내조를 하는 전업주부라는 개념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게 된다.
포드는 오늘날 지구 반대편의 우리에게도 익숙한 중산층 가정, 8시간 근무, 전업주부, 노동의 대가로 복리후생과 급여를 제공하는 기업의 보상제도라는 근무방식과 가정생활양식을 빚어냈다는 점에서 현대사회를 빚어낸 셈이다.
가족부양의 부담을 덜어냈지만 이 시기에도 일은 결코 즐거운 것이 아니었다. 공장 기반의 제조업 노동은 대량생산이라는 그 특성상 업무를 표준화하고 반복노동을 통한 숙달을 노동자에게 강요할 수밖에 없다. 과거의 장인계층과 기술자들은 자신의 노동의 결과물로 예술품이나 생활용품, 각종 도구와 기자재를 만들어냈고 그 과정에서 장인정신이나 예술혼이라는 가치를 산출물에 부여함으로써 산출물을 '소유'하는 희망이 있었다.
하지만 공장노동자들은 이제 잘게 쪼개지다 못해 하나하나의 동작과 작업만 놓고 보면 의미를 파악할 수 없는 반복노동을 장시간 반복해야 했다. 거기에는 인간의 정신과 의미가 부여될 틈이 없었고 컨베이어 벨트는 쉬지 않고 돌아가며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 노동자는 자신의 노동과 시간을 바쳐 조립하고 가공하더라도 그 결과물을 자신이 소유할 수 없었다. 과정에 가치를 부여할 수 없고, 작업과 노동의 결과물을 소유할 수 없게 되면서 일은 단순한 작업의 반복물로 전락한다.
고객을 위한다는 이름으로
하지만 소매업 직장과 제조업 직장의 실질적 차이는 '웃음 띤 서비스'였다. 제조업 노동자와 달리, 소매업 노동자들은 일을 사랑하는 것처럼 보여야 한다. p.166
타인에게 내 감정을 강요하는 일을 피하려고 내 감정을 관리하는 일은 스스로 종속적인 관계를 자처하는 격이다. 온종일 타인의 감정을 어루만져야 한다면 정작 자기감정과 개인적 요구사항은 삼켜버리도록 길들여진다. 서비스 업계에서 필요로 하는 능력은 힘없는 삶에서 습득한 능력이고, 결국 천부적인 권리로서 존경을 기대하는 힘 있는 자들이 그런 능력을 능력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도 놀라운 일은 아니다. p.171
포드주의가 만들어낸 대타협의 제조업 시대는 한동안 국가, 기업, 노동자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영구적인 체제처럼 보였다. 하지만 노동력의 비용이 올라가면서 기업들은 기계를 생산라인만이 아니라 인간을 대체하는 자동화 영역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섣불리 투자하기가 망설여지던 다른 회사들은 보다 저렴한 노동력이 넘쳐나는 제3세계에서 노동력을 아웃소싱할 수 있는 기회를 발굴했다. 이제 공장과 일터는 더 이상 미국 국내에 남아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제조기술의 발전으로 곳곳에 상품과 재화가 넘쳐나게 되면서 생산중심의 경영보다는 목표로 하는 고객을 찾아내고, 고객에게 상품을 적재적소에 인도하고, 고객이 상품을 구매하게끔 유도하는 것이 경쟁력이 된다. 사람이 물건을 찾던 시대에서 물건이 손님에게 찾아가거나 자신을 내세울 필요가 생겼다. 공장이 떠나 비어버린 미국의 지역사회와 중소도시에는 점차 월마트를 비롯한 소매기업들이 자리를 대신했다.
월마트의 창업자 샘 월튼이 다른 소매업 경쟁자들을 제치고 공룡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비결은 '기업문화를 이용한 경제적 보상의 축소'를 꿰뚫어 봤다는 점이다. 월튼은 항상 야구모자를 쓰고 다니며 본인의 소박한 이미지를 강조했고 여기에 더해 지역사회와 손님의 행복을 위해 봉사한다는 종교적 가치관을 기업문화에 접목시켰다. 1970년대에 미국 여성들이 구할 수 있던 일자리의 대부분은 가사 돌봄 아니면 음식점 서빙이었고 이런 일들에 비하면 월마트에서 모두가 하나 되어 유니폼을 입고, 정해진 구호와 노래를 부르고, 안무에 맞춰 춤을 추고, 항상 쾌활한 태도로 손님을 접수하는 월마트의 문화는 일의 가치와 소속감을 느낄 수 있는 차별화되는 부분이었다.
월튼은 직원들이 소속감과 일의 가치를 충족한다고 느끼면 당장의 경제적 보상이 노동의 대가에 비례하지 않더라도 불만을 느끼지 못한다는 점을 간파했다. 일을 사랑한다면 손님에게 더 적극적으로 홍보하고, 그로 인해 판매로 이어진다면 실적에 비례한 성과급을 제공하겠다는 명목으로 매장 직원들의 기본급은 조금씩 낮아지고 있었다. 충분한 보상과 기업 복리후생은 이제 직원에게 '기본적으로 제공하는' 복지가 아닌, 직원이 자신의 '성과를 증명해야만 제공받을 수 있는' 경쟁목표가 되었다.
월마트는 유통업계 전반에 퍼질 경비절감의 또 다른 축을 고안해 낸다. 거대한 공간에 물건을 종류별로 진열해 놓고 고객이 직접 물건을 보고 고르며 계산하는 방식이 퍼져나갔다. 기존보다 더 적은 직원으로도 보다 많은 주문을 계산할 수 있는 바코드 시스템이 도입되었다. 판매직의 노동은 점차 직원만이 할 수 있던 판촉과 영업의 기술을 내려놓고 그 자리에 기술을 들여와 모두를 대체가능한 표준화의 방향으로 유도했다.
고객만족이라는 이름으로 직원이 해야 할 업무는 고객에게 떠넘겨지면서 직원의 역할은 축소되어 간다. 역할의 축소는 급여의 하향평준화로 이어졌다. 급여의 하향평준화로 원가를 절감한 월마트는 다른 경쟁자들보다 저렴하게 상품을 판매할 수 있었다. 손님이 집어가는 저렴한 상품의 가격표 이면에는 삭감된 월마트 직원들의 복지와 급여가 담겨 있던 것이다. 모든 것은 고객을 위해서였고 그 숭고한 이름에 판매직들은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월마트는 소속감으로 직원들을 끌어모아 성장했지만 뒤에서는 그 직원들을 업무의 효율화와 표준화라는 이름으로 다시 대체하고 있었다. 표준화가 개인에게 적용되는 순간부터 직원은 업무와 동일한 존재가 된다. 성별과 나이, 출신을 불문하고 직원 중 누가 오더라도 동일한 절차에 따라, 평균적인 수준의 성과와 결과물이 나와야 한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은 다른 사람을 데려와 언제든 '나'를 교체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소매업/판매직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제조업 노동자와 달리 고객을 직접 대면해야 하는 위치다. 고객 응대의 태도와 미소가 평가의 기준이 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결국 이들은 고객만이 아닌 자신들의 상급자와 매니저에게도 감정의 통제를 요구받는다. 피고용자들은 교체당할 명분을 책잡히지 않기 위해 언제나 웃어야 하고 불만을 표출할 수 없는 '감정노동'이 여기서 파생된다. 미소와 친절이 일상화되고 단지 업무상 필요한 최소요건으로 전락하면서 노동자는 자신의 감정은 잊고 타인의 감정만을 신경 쓰게 되는 무감정한 인간이 되어버린다. 언제든 갈아 끼울 수 있는 패션코너의 마네킹처럼.
일을 즐기라는 말
인생을 최대한 바치도록 하려고 페이스북 본사 기술자들이 일하는 곳은 퍼즐, 게임, 레고, 스쿠터 같은 장난감들이 널려 있었다. 밤늦게까지 일하는 소녀왕들을 즐겁게 해주려고 새로운 놀잇거리들이 줄지어 들어왔다. "심지어 일할 때도 노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페이스북이 생각하는 미덕이었어요. 다른 기업들과의 차별화 전략이었고, 모든 것을 게임처럼 만드는 방법이죠." 하지만 프로그래머들은 파티에도 노트북을 챙겨와서 일을 끝마치곤 했다. p.384~385
아마존 물류창고에서 앱으로 할당되는 작업에서 심지어 프로그래밍 작업까지, 인간이 해야 하는 몹시 재미없는 노동에 대해 IT 업계가 제시한 해법은 '게임화'였다. (…) 일을 게임화한다니, 이보다 더 재밌는 게 있을까? 하지만 문제는 예술가이자 작가인 몰리 크레이배플이 수년 전 정확히 예측한 대로, "게임 상금이 과거에 급여라고 불리던 것이다." p.388
제조업은 일의 과정과 결과물에 대한 주도권을 우리에게서 빼앗아 갔고, 소매/유통업은 인간을 일에 맞춰 표준화시키는 탈인간화의 과정이었다. 하지만 이제 기업들은 우리에게 생각하지 말고 조직에 따르라며 빼앗았던 인간성을 다시 요구하고 있다. IT와 플랫폼으로 대변되는 현대의 기업들은 '창의적이고 자기 주도적이며 일을 즐기는' 직원을 이상적인 인재상으로 간주한다.
기업들은 우리에게 다시 권리와 인간성을 되돌려 주었으니 우리는 일에서 보람과 소명 그리고 만족을 느껴야 하건만 왜 현실은 그렇지 않을까? 일 그 자체를 즐기는 것이 곧 보상이며, 그러다 보면 훗날 더 큰 경력의 발전과 경제적 보상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가 그 틈 사이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일에 대해 열정이 넘치고 자발적인 직원이 된다면 기업은 더 이상 자극을 위한 채찍질도, 보상을 위한 당근도 줄 필요가 없어진다. 부품이 그 자체로 끊임없이 자기 자신에게 기름칠을 하여 스스로 잘 굴러가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보상이 동기가 되고, 다시 동기가 보상이 되는 순환논법의 감옥이다.
1960년대에 미국은 국방부 산하 고등연구계획국(ARPA)의 주도로 아르파넷(ARPAnet)을 개발하는데 이 당시에 참여한 프로그래머들의 평균 근무시간은 하루 16시간이었다. 아르파넷 개발자들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자의 아이디어를 실현하면서 자발적인 장시간 노동을 이어갔고 그 과정에서 게임이나 이메일의 개념이 도입되었다. 아르파넷은 개발자들의 열정적인 창의성을 기반으로 계획에 없던 기능들이 추가되면서 점차 인터넷의 초기 형태를 갖추어 갔다.
아르파넷-인터넷으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IT 업계는 비약적으로 발전했지만 동시에 IT 업계에 종사하려면 아르파넷 개발자들처럼 열정에 기반한 장시간 근무가 필요하다는 신화가 탄생한 계기이기도 하다. 아르파넷에 몰두한 참여자들이 만들어낸 게임, 이메일과 같은 파생 작품을 통해 개발자는 다시 업무에 몰입하는 구조가 이어졌고, 그 결과 업무와 놀이 또는 업무공간과 사생활의 구분도 모호해져 갔다. 재미있었기 때문에 일터에 더 오래 머문 몇몇 선구자들의 빛나는 사례는 어느 순간부터 업계의 불문율이자 모두에게 요구되는 관행이 되어가고 있었다.
IT업계는 이런 분위기를 파악하여 직원들이 노조를 결성하여 연대하게 놔두기보다는 직원들에게 업무의 자유로움, 수평적 분위기 그리고 놀이에 기반한 직장문화라는 당근으로 눈을 돌렸다. 페이스북의 본사 기술자들이 일하는 사옥에는 퍼즐과 비디오 게임, 레고, 스쿠터 같은 장난감들이 널려있다. 일을 할 때도 마치 노는 것처럼 어떠한 행동과 발언의 제약이 없이 자유롭게 일하는 것을 미덕으로 삼는 분위기를 구축했다. 이런 조치들이 직원을 위한 기업의 복지로 볼 수도 있겠지만 노조결성과 불만을 훨씬 저렴한 값에 무마할 수 있는 '관리방안'이기도 하다.
그 결과 일에 대한 자율성은 인간이 본래부터 갖추고 함양해야 할 내면의 자질에서 좋은 직장을 위한 근무조건으로 성격이 바뀌었다. 우리는 성인이 되었고, 우리 자신의 삶과 인생을 통제하는 자기주도성과 자유의지를 이미 타고났고 기를 수 있건만 일에 대한 자율성은 여전히 기업이 하사해야만 얻을 수 있다. 이미 자율적인 인간이기에 자신의 일을 사랑하여 보상을 받는 것과, 보상을 받으려면 일을 사랑하고 자율적인 인간이 되라는 것은 같지 않다.
취준생들 사이에서 '자소설'이라는 신조어가 나오는 이유는 3천자 또는 5천자 이상의 휘황찬란한 열정, 희망, 성실함의 강요와 '나' 사이의 괴리감 때문이다. 기업은 열정적으로 무언가를 했던 경험, 실패나 어려웠던 순간을 극복한 경험, 동기와 앞으로의 포부를 우리 모두에게 요구한다. 하지만 우리 대부분은 극적인 인생을 살아가지 않으며 단지 오늘 하루를 충실히 살아갈 뿐이다. 모두가 아르파넷의 선구자들처럼 살아갈 수는 없다.
일이 즐겁지 않아도 부끄럽지 않도록
우리는 어떤 관계가 해체되었을 때 그 관계를 불가능하도록 만든 사회적·제도적 압박 대신 스스로를 비난한다. 사랑은 아직도 또 하나의 소외된 노동에 지나지 않는다. p.456
저자는 일이 인간에게 의미가 없다거나, 직업을 통해서 발전할 수 없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자신의 일터에서 동료들과 소통하고, 도전을 통해 자극을 받고 목표를 달성하여 성취감을 얻을 수 있는 직장이라면 그 기회를 충분히 만끽하라고 독려한다. 하지만 오늘도 많은 일터와 사업장과 회사의 피고용인들 중에는 그런 경험을 거의 또는 전혀 겪지 못하는 삶이 어디엔가 존재한다.
왜 일은 재미가 없는 것을 넘어 어떨 때는 괴롭고, 삶에 의미 있게 다가오지 못하며, 오히려 나의 정신과 건강을 위협하는 것처럼 느껴질까? '나'의 삶과 선택이 잘못된 것일까? 일에 의미를 찾지 못하는 '나'는 잘못된 인간인가? 작가는 그 고민과 괴로움의 근원을 더 이상 자신에게서 찾지 말라고 우리를 위로한다.
일은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다. 당연하게도 일은 무정물이며 우리의 감정과 사고와 여건에 대해 단 한치도 고려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가 아무리 일에 열정과 사랑을 바치더라도 일은 우리에게 감정을 내어주지 않는다. 현대사회는 성취, 명성, 재정적 기반, 권위, 인간관계, 인격수양과 같은 인간적 욕구의 많은 부분을 개인이 자기 주도적으로 삶에서 쟁취하게 놔두지 않는다. 성공적인 사업가 또는 야심 찬 직장인이 되어 그것들을 움켜쥐라며 일의 논리를 우리에게 주입한다.
하지만 우리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들은 컴퓨터나 계산대, 탁상과 의자에 있지 않다. 그것들은 언제나 직장의 바깥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가족이나 친구의 형태로, 때로는 운동과 독서와 명상과 만남의 형태로, 나 자신의 내면과 영혼의 깨달음의 형태로 기다린다. 역사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일은 인간이 존재와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생계를 해결하기 위한 필요로 생겨났다. 그것이 어느 순간 역전되어 직업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라는 지금의 세상이 힘겨운 누군가를 위해 작가는 기꺼이 그의 옆으로 다가가 변호한다.
일에서 사랑을 찾지 못하더라도 괜찮다고.
글토막
사랑의 진정한 의미를 다시 찾기 위해 일을 그저 일이라고 부르고 싶다. ― 실비아 페데리치
p.446
* 개인적으로는 가장 독후감을 쓰기 어려웠던 책이었다. 분량과 내용의 전문성도 문제였지만, 책의 구성이 가정의 돌봄 노동, 가사 노동자, 교사, 판매직, 비영리단체, 예술가, 인턴, 시간강사, 프로그래머, 운동선수에 이르는 10개의 직업군을 작가가 병렬적으로 나열하는 구조라 얼개와 서순을 잡기가 까다로웠다. 결국 경제와 산업의 발전에 따른 큰 흐름을 따라가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하여 공장노동자(제조업)-판매직(소매업)-프로그래머(IT)로 이어지는 구성으로 가닥을 잡았다.
* 혹여 책에 관심이 있어 읽고자 하는 분은 개인적으로는 1장 '가정의 돌봄 노동'을 가장 마지막에 읽으라고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