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하지만 참는 자들을 위한 변호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 윌리엄 해즐릿

by 망망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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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오에 물리는 일은 있을 수 없고, 농축된 악의처럼 잘 보존되는 것도 없다. 우리는 모든 일에 싫증을 내지만 타인을 조롱하는 일에는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들의 결점이 우리 자신에게는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p.52




책을 만나기까지

꾸준히 고정적으로 나가는 독서모임이 있는데 저번 달의 책으로 꼽혔다. 소설이나 교양도서는 읽어도 에세이는 읽어본 적이 없었다. 딱히 이유는 없지만 학생 때부터 왠지 모르게 수필이나 에세이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어려서도 그렇고 현재도 누군가의 일상이나 소식 또는 견해에 별로 관심이 없다. 며칠, 몇 주만 지나면 무상하게 흩어지고 기억에서 사라질 시시콜콜한 것들이라고 무시하곤 했다. 생각의 근원을 타고 들어가다 보면 저 깊은 곳에 '타인이 나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는데 왜 내가 남에게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라는 냉소가 자리 잡고 있다.


그런 냉소를 역으로 비웃듯 책의 제목은 도발적이다. 세대와 성별, 정치견해 간 갈등으로 인한 편 가르기와 혐오를 걱정하는 논평과 기사들을 여기저기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해즐릿은 그런 우려들이 우습다는 듯 혐오는 즐거운 행위라며 변호한다. 독자는 해즐릿의 도발에 말려들어 책을 펼치게 된다. 그의 말에 반박하기 위해서라도. 한편으로는 그가 우리의 가책을 덜어줄 구실을 하나라도 알려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을 갖고.




7e8cebdeb2e863073aa1dc70283c3b69_t.jpeg 대부분의 거미는 우리에게 직접 해를 끼치지 않음에도 우리는 거미를 혐오한다.


박애의 정신 속에 담긴 혐오

악의에 찬 정신은 그것의 실제 행사보다 더 오래간다. 우리는 의지를 조절하여 악의가 행동으로 드러나지 않게 그것을 박애의 정신 안에 가두어 놓는 법을 배운다.
p.38


책의 첫 시작은 거미에 대한 해즐릿의 혐오론과 함께 시작된다. 그는 자신에게 대담하게 뒤뚱뒤뚱 다가오는 바닥의 거미를 혐오스럽게 쳐다본다. 크기로 보나, 지능과 힘의 정도로 보나 거미는 우리에게 상대가 될 수 없다. 하지만 우리들이 가진 위엄은 거미 앞에서 한없이 작아짐과 동시에 거미에 대한 혐오가 그 존재감을 방 곳곳에 가득 찰 만큼 부풀어 오른다.


해즐릿은 거미가 기어 다니고 있는 바닥 매트를 들어 올려 집 밖으로 던져버린다. 그 안에는 극도의 혐오감과 배려가 함께 깃들어 있다. 내리치거나 발로 밟는 감각조차 혐오스러운 소름 끼침이 한쪽에 있다. 다른 한쪽에는 생명의 소중함과 작고 나약한 존재에 대한 아량과 관용의 정신이 서 있다. 우리는 더 이상 심심풀이나 화풀이로 곤충을 잡아 그 날개나 다리를 뜯거나 멀쩡한 꽃과 잎을 꺾는 어린아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매 순간 꼴도 보기 싫고, 목소리도 듣기 싫고, 같은 공간에 있는 것 자체를 생각하기 싫은 사람이 한 번쯤은 생기기 마련이다. 그런 존재가 생기면 그동안 배워오고 익혀온 도덕과 종교적 가르침은 무의미해진다. 그럼에도 우리는 그들을 해코지하지 않는다. 대신 그들의 모든 세포와 몸짓 하나하나를 전부 혐오하기로 선택한다.


문명과 사회, 법률과 관습의 규약이 맹수를 감시하는 사육사처럼 매 순간 노려본다. 동물적 본능이 몸과 정신을 에워싸지만 그 본능이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야생에서 살지 않는 혜택을 누린다. 따라서 누군가를 혐오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사실 배려와 박애의 정신이라고 해즐릿은 말한다. 혐오하는 대상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최소한 나 자신의 사회적 생존을 위해서라도 행동 대신 내면에서 누군가를 해코지하기로 마음먹는 것이다.


아직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의 난폭함과 야수의 본능은 끝없이 통제당한다. 우리는 어른이기 때문에, 누군가의 상급자이기 때문에, 사장이기 때문에, 가장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이기 때문에, 학생이기 때문에, 모범이 되어야 할 위치이기 때문에 끝없는 자기 검열 속에 살아간다. 사회가 요구하는 '나'의 모습과 존재하는 '나'의 모습이 항상 일치하지는 않는다. 그 괴리가 커질수록 우리는 직장에서 번아웃이나 감정노동을 겪기 마련이고,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는 착한 사람 증후군이 아닌지 고민한다.


이처럼 문명사회가 끝없이 우리에게 강요하는 규율로부터 도망칠 수 있는 합법적인 탈출구가 혐오다. 우리가 혐오로부터 눈을 돌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본능적으로 흥미롭고 재미있으며 화를 풀어주기 때문이다.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것은 어른스럽지 못하며 약점을 보이는 행동이라고 지적받지만, 어떤 것을 혐오하면서 드러나는 공격성은 마치 나 자신의 힘이 솟구치듯 고양되는 감정을 불어넣는다. 행동으로 실행에 옮기지만 않으면 얼마든지 야만적 욕구와 상상 속의 폭력을 통해 상대를 해체하고 음미해도 막을 자가 없다.


동물을 구석에 계속 몰아세우다 보면 이빨과 발톱을 드러내듯, 우리의 내면에 억압된 폭력성이 폭발하기 이전에 김을 뺄 필요가 있다. 따라서 혐오는 개인이 스스로에게 가해진 압력을 조절하는 과정이다.




haiti.png 우리는 적을 혐오하지만 적을 구성하는 개개인을 만나본 적도, 만날 일도 없다.


혐오가 불분명해질 때

교황과 부르봉 왕조, 종교 재판소가 얼마나 오랫동안 영국인들의 숨통을 트이게 해 주었으며, 영국인들은 그들의 이름을 별명으로 써서 울분을 해소했던가! 교황과 부르봉 왕조, 종교 재판소가 최근 우리에게 어떤 해를 입힌 적이 있던가? 아니, 없다. 그런데도 우리의 위장에서는 항상 과잉의 담즙이 차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쏟아낼 대상이 필요한 것이다.
p.40
혐오의 즐거움은 종교의 심장을 먹어 들어가 원한과 광신으로 가득 채운다. 그것은 애국심을 구실로 다른 나라를 불바다로 만들고 역병을 퍼뜨리고 기아를 낳는다.
p.44


그러면 우리는 모두 작가의 가르침에 따라 앞으로 마음껏 누구든지 혐오할 권리와 면죄부를 부여받은 걸까? 해즐릿은 직접 그 답을 말하지는 않지만 혐오의 범위와 정도가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나열한다.


나를 둘러싼 인간관계에서 생기는 개인적 혐오는 정신에 이롭다. 주변인에 대한 혐오는 그 공격성이 나 자신과 대상을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혐오가 아무리 그 기세를 타고 올라 날뛰며 영토를 확장하더라도 나의 피부를 넘어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한다.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혐오는 내가 싫어하는 대상의 억양과 몸짓과 표정을 물려받아 손에 잡으면 만져질 것처럼 현실적이고 구체적이다.


하지만 우리 자신과 직접적으로 관련이 없는 대상으로 혐오가 옮겨갈 때, 구체적 개인이 아닌 불특정 다수로 퍼질 때 얘기는 달라진다. 이제 혐오는 인간의 모습을 갖추지 않으며, 만지거나 때릴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 군중 속으로 안개처럼 흩어진다. 혐오가 구체적이지 않고 틀과 육신에서 벗어나 불분명해지면 우리는 혐오의 이유를 망각하게 된다.


혐오가 인간의 모습을 벗어나 정의, 정치, 종교, 인종에 결부되는 순간 우리는 즐거움과 동시에 느끼던 일말의 가책과 자괴감마저 상실하게 된다. 정의감과 사명감, 종교적 사명이 정당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명분이 부여된 혐오는 이제 '정당한 분노'가 되어 물리력의 행사를 용인하고 권장한다.


조지 오웰의 디스토피아 소설 <1984>에는 '2분 증오 시간'이라는 통제수단이 등장한다. 시스템으로 체계화된 감시독재사회에 대한 의식적/무의식적 불만을 해소할 수 있도록 모든 당원들이 모여 2분 동안 누군가를 맹렬하게 증오하고 욕하고 길길이 날뛰도록 허용한다. 작중 당원들과 빅 브라더가 증오를 표하는 반동분자들은 과연 생존해 있기는 한지, 더 나아가 실제로 존재하기는 하는지조차 의심스러운 인물이다.


하지만 당과 당원들에게 반동분자의 존재의 여부나 사실관계는 중요하지 않다. 혐오의 합리화를 통해 불만분자와 외부세력에 대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억압의 체제를 유지하는 것만이 중요하다.


혐오가 위험해지는 순간은 바로 이 지점이다. 혐오가 개인적 감정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하고 행동에 옮길 것을 정당화할 때다. 개인적 감정의 표출구나 스트레스 관리수단으로써의 혐오는 해소의 순간이 존재한다. 누군가와 충분히 싸우고 다투고 나면 더 이상 감정의 앙금을 남겨두지 않고 화해하거나 영원히 절교하듯, 일상의 혐오는 혐오함으로써 해소될 수 있다.


그러나 혐오가 집단으로 이동하고, 그 이유를 감정이 아닌 명분으로 치환하게 되면 혐오는 수레바퀴처럼 끝없이 돌기만 할 뿐 해소되지 못한다. 집단과 조직은 머리가 여럿 달린 히드라와 같아 아무리 그 목을 베어 내더라도 다시 자라나고 새로 생겨난다. 한 머리를 잘라내면 더 잘라내야 할 다른 머리들이 다가온다. 혐오의 굴레 속에서 우리는 먼저 지쳐 쓰러지거나, 히드라의 머리가 내뿜는 독에 압도당하기 전까지 빠져나오지 못하게 된다.


해즐릿은 진정으로 혐오스러운 것은 동물적인 본성을 버리지 못한 우리 자신이나 상대가 아니라고 말한다. 혐오를 부추겨 손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원하는 바를 달성하려는 배후에 선 자들과, 그 선동에 이끌려 파도처럼 휩쓸리기만 하는 군중이 차오르는 현실을 혐오한다. 그리고 그런 세상이 오지 못하게끔 지독하게, 끝까지 악랄하게 물어뜯어 막아내지 못한 자기 자신을 혐오한다.


나에게는 애국자와 자유의 친구는커녕 압제자와 노예, 국왕의 독재와 미신의 사슬에 묶인 국민만 보인다. 어리석음이 속임수와 결탁하여 공공심과 여론을 날조하는 것을 본다. (…) 이것이야말로 나 자신을 혐오하고 경멸할 이유가 되지 않을까? 나는 그렇다고 생각한다. 무엇보다 세상을 충분히 혐오하고 경멸하지 않았기 때문에.
p.57~60




833e1ebef7bb887470b28264859cdce2.gif 혐오의 끝은 누워서 침 뱉기이다.


혐오의 해학

마찬가지로 알맹이는 별로 없지만 매우 재미가 있어 인기 있는 책들이 있다. 이 책들은 우리의 기분을 상하지 않게 하고 비위 맞추기를 원칙으로 삼아 그 목적을 이룬다. 우리는 기분을 존중받아 만족하므로 일단 저자의 재치와 지혜에 휴전을 허락한다.
p.111


<혐오의 즐거움에 관하여>는 첫 장에서는 작가의 장황한 혐오론을 설파하고는 이어서 죽음의 공포로 주제를 옮긴다. 그리고는 질투의 감정에 관해서 분석한다. 한 번쯤 생각은 해보지만 남들에게 말하기 꺼려지는 주제를 아무렇지 않다는 듯 태연하게 글로 풀어내는 그의 뻔뻔함과 솔직함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신랄해서 얄미운데 가려운 속을 긁어주니 밉지만은 않다.


200여 년의 세월을 거슬러 지금에도 통하는 그의 비난과 지적을 보며 '나만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아니었구나, 나의 부정적인 생각이 나만의 문제가 아니었구나'라며 공감도 하게 된다. 뒷담화가 아닌 앞담으로 대놓고 잽과 어퍼컷을 날리는 속 시원함이 글에서 느껴진다. 우리는 때론 당연한 것에 일부러 삐딱선을 타거나, 어깃장을 놓고 싶어지는 때가 있지만 그 모서리를 가리고 살아간다. 그 생각이 설득력을 얻거나 공신력을 불어넣어 줄 누군가가 나타나기를 기다린다.


그렇게 점점 작가에게 호의와 찬사를 보내고 싶어지기 직전에 작가는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들에 관하여>에서 우리가 거슬린다며 그 기대를 단숨에 박살 내버린다. 작가는 이제 자신이 살면서 마음에 들지 않고 정이 안 가는 인간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내 그 이유와 행태를 구체적으로 고발한다. 무수한 인간유형의 사례를 꺼내오는 작가의 입담에 슬슬 긴장되기 시작한다. 왠지 책 너머에 앉아 있는 나의 시선을 알아보고는 작가가 점점 다가오는 것 같다. 이제껏 작가와 함께 맞장구치며 같이 혐오한 대상이 돌고 돌아 화살촉이 우리 자신에게로 향한다.


친절하지만 왠지 정이 안 가는 인간은 그 친절의 이유가 공감이 아닌, 은근히 자신의 은혜와 우월감을 드러내고 싶어서라고 까버린다. 사실관계를 따지기 좋아하는 인간은 자신이 솔직한 인간이라고 자부하지만 그건 그저 감정을 고려하지 않는 후안무치한 놈일 뿐이라고 말한다. 남의 실수를 지적해 주는 사람은 상대를 어린아이로 전락시키는 모멸감을 심는 짓이라고 비난한다. 실수할까 봐 두려운 사람은 자기 자신의 과민함에 휩싸여 실수를 초래하는 바보라고 놀린다. 식당에서 소스가 어떻고, 자리가 어떻고, 음료가 어떻고 불평이 많은 인간은 자기 체질과 심리가 허약한 약골이라 그런 걸 자기 자신만 모를 뿐이라며 조롱한다. 진리와 정의를 장황하게 늘어놓는 사람들 치고 정작 옆자리의 기분을 좋게 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쯤 되면 그의 포위망에 걸려들지 않을 사람은 없다. 그의 날이 선 창과도 같은 문장 어딘가에 한 번쯤은 몸이 꿰뚫리게 된다. 재미있는 점은, 해즐릿 본인도 살아생전에 그의 성미와 정치적 성향과 언변으로 인해 그와 갈라지고 연을 끊은 인간들이 상당했다는 점이다.


어쩌면 그는 타인만이 아니라 까다롭고 신경질적인 자기 자신에게서도 그런 성질들을 추출하고 정제하여 문장으로 풀어놓은 것인지도 모른다. 타인을 혐오하고 거슬려하듯 자기 자신에게서도 그런 거슬림을 관찰하지 않고서는 풀어낼 수 없는 세밀함이 느껴진다. 작가는 독자인 우리를 향해서도 비판하지만 동시에 독자인 우리도 작가에게 비판을 되돌려 줄 수 있는 기회를 남긴 것은 아닐까. 해학과 풍자는 상대만이 아닌 자신까지도 그 대상에 포함할 때 완성되기 때문이다.


그의 에세이를 읽다 보면 결국 모든 감정과 허식, 죽음의 두려움을 넘어 생에 대한 즐거움을 말하고 있음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저속할지언정 혐오도 그런 즐거움의 하나임을 그는 수줍은 우리를 대신해 떳떳이 세상에 밝힌다.




글토막

우리는 이 친구들의 어리석음을 동정하거나 불평하는 체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이야기를 즐긴다. 배를 쥐고 웃을 때까지 “막간의 휴식도 없이 몇 시간이고 계속” 그들을 조롱한다. 일화들과 특성, 걸작인 인격들을 음식처럼 차례대로 식탁 위에 올려놓고 물릴 때까지 마구 칼질을 한다.
p.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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