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과에 가려진 것들에게 바치는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by 망망대해
9788937463884.jpg


내 인생이 택했던 길을 두고 왜 이렇게 했던가 못 했던가 끙끙대고 속을 태운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여러분이나 나 같은 사람들은 진실되고 가치 있는 일에 작으나마 기여하고자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그리고 누군가 야망을 추구하는 데 인생의 많은 부분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다면 결과가 어떻든 그 자체만으로도 긍지와 만족을 느낄 만하다.
p.373




이런 분들에게 이 책을

- 직업이 개인의 인생에 있어 어떤 의미인지를 생각해보고 싶을 때

- 자신이 가고 있는 방향과 선택한 결정에 대해 의문, 후회, 불안을 느낄 때

- 목표를 이루지 못했거나 결과물이 노력과 기대에 미치지 못하여 괴로울 때




책을 만나기까지

몇 달 전 다른 독서모임을 알아보던 적이 있었다. 마침 지정도서로 진행하는 모임이었기에 신청하고 책도 준비했으나 일정 문제로 인해 참가는 하지 못했다. 그래도 이미 집어든 책이기도 했고, 만일 다음 일정에 참여하게 되면 모임장과 얘기해 볼 대화 소재도 챙길 겸 완독을 했다.


이 작품에는 딱히 이렇다 할 위기나 극적인 사건이 없다. 전체적인 책의 느낌은 조용히 흐르는 강을 따라 강변을 걷는 듯하다. 급류도, 폭포도, 눈이 즐거운 경치도 없이 비슷비슷한 풍경이 반복된다. 그렇게 계속 걷다 보면 어느새 강의 하류까지 도달하고 바다가 펼쳐진다. 개인에 따라서는 밋밋하다고 느낄 수도 있고, 작가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와닿지 않을 수도 있다.


책 중에는 강렬한 인상과 자극을 남기는 것도 있고, 잔잔한 감동을 주는 작품도 있다. 전자는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우리의 마음을 적시고, 후자는 가랑비와도 같아 어느새 흠뻑 스며든다. 어떤 경우이든 기승전결의 전개와 서사의 진행에 따라 갈등이 해소되거나 교훈이 전달되는 방식을 통해 독자는 작품의 모양을 마음에 새기게 된다.


하지만 <남아 있는 나날>은 소나기처럼 퍼붓지도, 가랑비처럼 어느새 옷을 적시지도 않는다. 대신 영국의 안개처럼 주변을 맴돌고, 다가가면 흩어질 뿐이다. 멀리서 보면 안개의 존재를 알 수 있지만 정작 안갯속으로 들어가면 그 형상과 실체를 볼 수 없듯, 읽는 동안에는 책의 존재감이 느껴지지만 다 읽고 나면 책의 감상을 말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여러 번 읽고 또 읽었다.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전까지 책을 네 번을 읽었다. 제아무리 단단한 물체라도 사람의 잦은 손길이 닿으면 번들거리는 흔적을 남기듯 조금은 책의 때가 마음에 묻은 것 같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책의 때를 문장으로 풀어내기 위한 시도다.




photo-1425421669292-0c3da3b8f529.jpg


'프로답게'라는 말

주인공 '스티븐스'는 영국에서 나고 자란 노(老) 집사다. 업무상 필요한 출장과 여행을 겸하여 잉글랜드의 남서부로 차를 타고 이동하던 스티븐스는 깊은 생각에 잠긴다. 영국과 해외의 많은 집사들 중 '위대한 집사'로 꼽히는 사람들은 어떤 특성이나 자질이 있는지에 대해. 무엇이 특정한 직업인을 위대하다고 여기게 만드는 반면, 누군가는 평생 그런 평가를 받지 못하는지 말이다. 스티븐스가 차로 이동하는 내내 설명하는 직업론을 읽으며 독자는 '품위'와 '전문성'이라는 가치를 따져보게 된다.


품위와 전문성은 같은 개념인가? 아니면 다른 것인가?

전문가들은 모두 품위를 가지고 있는가?

품위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스티븐스는 두 일화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첫 번째 일화. 작중 배경은 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 1920~30년대의 전간기(戰間期)이다. 스티븐스가 섬겼던 노신사 '달링턴 경'은 외무성 출신으로, 자신의 경력과 인맥을 활용해 독일에 대한 승전국들의 배상안을 조정해 유럽의 긴장도를 낮추려고 노력한다. 달링턴 경은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등 각국 정계의 유명 인사들을 저택으로 초청하여 비공식적인 사전 합의를 이끌어냄으로써 앞으로 다가올 국제 회담에서 공식적으로 베르사유 조약의 내용을 수정하는 발판을 만들고자 한다.


달링턴 경은 비록 독일이 전쟁을 먼저 시작했더라도 이미 승패가 결정 난 마당에 패자가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는 배상안을 요구하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그건 조약이라는 이름을 뒤집어쓴 비물리적인 폭력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달링턴 경은 승자와 패자를 아우르는 참전국이 모여 서로의 이해관계와 입장을 성심성의껏 논의한다면 가치 있는 합의안을 도출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그리고 이를 통해 유럽에 상호 이해와 평화가 찾아올 수 있다고 확신한다.


하지만 행사의 마지막 날 저녁, 미국에서 온 '루이스 의원'은 달링턴 경을 비롯한 유럽 정치인들의 시도와 노력을 비웃는다.


"점잖고 선량하신 신사 여러분, 제가 한번 물어보겠습니다. 여러분을 둘러싼 세계가 어떻게 변해가고 있는지 혹시 아십니까? 여러분의 그 고상한 직관으로 활약할 수 있었던 시대는 끝났습니다. 다만 여기 유럽인 여러분들이 아직 모르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를 초청해 주신, 선량한 신사분들은 스스로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문제들에 끼어드는 것을 아직도 업으로 믿고 있습니다. 지난 이틀 동안 이 자리에서 시답잖은 얘기들이 너무나 많이 나왔습니다. 의도는 선량하지만 순진하기 짝이 없는 공론들이었죠. 유럽인 여러분들이 자신들의 문제를 풀어가기 위해서는 프로들이 필요합니다. 그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면 여러분은 조만간 재앙으로 치닫게 될 것입니다. 건배합시다, 신사 여러분. 제가 선창하겠습니다. 프로페셔널리즘을 위하여!"
p.140~141


두 번째 일화. 하루는 스티븐스가 달링턴 경을 찾아온 정계 방문자들의 시중을 들던 중, 손님들로부터 질문을 받는다. 정치인인 이들은 집사인 그에게 온갖 외교, 국제무역, 경제, 정치 시사들을 묻고 그에 대한 견해나 해법이 무엇인지를 말해보라고 떠본다. 전쟁으로 영국이 미국에 진 국가부채가 무역 침체의 원인인지 아니면 금 본위제를 포기하는 것이 문제인지. 프랑스와 러시아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군사 협정이 체결되면 유럽 통화문제가 어떻게 변할 것 같은지 등등.


스티븐스는 이들이 자신을 적당한 놀림거리로 써먹으려고 일부러 난해하며 답이 명확하지 않은 질문을 던졌음을 알고 있다. 하지만 집사로서 손님에게 불쾌해하는 기색 없이 공손하게 자신은 그런 문제를 알지 못하고, 그럴만한 능력도 없다고 답한다. 이에 손님들은 낄낄거리며 노골적인 웃음을 주체하지 못한다. 그들은 스티븐스와 같은 '대중'들은 복잡하고 전문적인 오늘날의 사안들에 참여할 능력이 없음에도 민주주의를 원한다고 조롱한다.


스펜서 씨가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도 우리는 여전히 이 나라의 중대한 결정들을 여기 이 사람과 그 동류인 수백만 대중의 손에 맡겨야 한다고 고집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금과 같은 의회 제도에 묶여 있는데도 수많은 난제의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한다는 게 좀 놀랍지 않습니까? 뭐, 전쟁 캠페인이라도 기획하신다면 ‘어머니 연맹 위원회’에 물어보시는 게 좋을 겁니다."
p.304


한쪽이 어느 한쪽을 깎아내리는 이 두 일화는 서로 다른 사건임에도 익숙한 구도가 반복된다. 미국 정치인이 유럽 정치인들의 순진함과 무능력함을 비웃는다. 그리고 그 순진하고 무능력한 영국 정치인들은 그들의 국민이 정치에 참여할 능력이 없다고 비웃는다. 전문성이 없다는 비웃음은 권력과 계층의 계단을 타고 흘러내리다 스티븐스에게 떨어진다. 스티븐스는 집사이자, 직업인으로서 웃음을 잃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일에 집중한다. 과연 누가 진정한 전문가이며 품위를 가졌다고 봐야 할까?


우리는 일상이나 직장에서 '프로답게 행동해' 라거나 '돈 받고 일하면 프로처럼 해야지' 또는 '프로의식을 가지라'는 말을 자주 하거나 듣게 된다. 보통 이런 말들은 상대의 직업의식이나 결과물, 태도의 부족이나 결핍을 지적하거나 또는 누군가를 고양하기 위한 경우에 자주 쓰인다.


그렇다면 '프로답게'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 뜻을 물어봤을 때 전문성 또는 전문가다움이라고 답하곤 한다. 그렇다면 전문성은 무엇인가. 자신의 일에 전념을 다하고 관련 지식과 경험을 풍부하게 갖춘 인재라고 답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분야나 직무에서 오래 종사하고 경험을 쌓아 지식이 많으면 그 사람은 무조건 프로가 되는 것이냐고 물어보면 꼭 그렇지는 않다고 할 것이다.


우리는 프로답게라는 말을 쓰지만 정작 그 말의 의미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스스로 정의 내리지 못한 채 쓰고 있다.




61MpeyeYJ9L._AC_SL1500_.jpg


전문성, 현실에 대한 외면인가 아니면 피난처인가

달링턴 경은 스티븐스를 조롱했던 방문객들에 대해 다음날 그를 불러내 사과한다. 하지만 달링턴 경의 사과 한편에는 미묘한 서열과 계급의식이 깔려있다.


"예전에는 그것이 훌륭한 방식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세상이 복잡다단해졌다네. 정치나 경제, 국제 통상 같은 것을 일반인들이 제대로 이해하기란 힘들지. 또 그런 걸 알 필요가 뭐 있겠는가? 사실 어젯밤 자네의 대답은 아주 훌륭했어, 스티븐스. 자네가 그런 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었겠나? 자네 분야와 동떨어진 것을 알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지, 안 그런가?"
p.308


현대사회는 개인의 가치와 성장을 중요시한다. 교육을 통한 의식과 지적 수준의 성장, 직업을 통한 사회적 가치 창출, 납세자이자 소비자이며 투표권자로서의 경제적/정치적 권리행사 등 분야와 영역을 불문하고 우리들 각자의 역할을 통해 사회에 기여하고 있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우리들 대부분은 살아가면서 '나'의 가치가 과연 지역사회, 국가, 세계 더 나아가 운명에 있어 어떤 의미나 영향력이 있는지 고민하게 된다. 불만에 찬 고객을 상대하거나, 설득하기 어려운 상급자를 마주할 때면 '나'라는 존재가 국가는커녕 이 작은 조직 안에서조차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회의감이 든다. '나'라는 존재 한 명이 없더라도 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굴러갈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을 위해 노력하고 기를 쓰며 살아가는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일을 하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재무팀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수시로 상당한 금액이 기재된 문서들을 보게 된다. 몇 년 치 급여로도 충당할 수 없는 숫자들이 '법인'이라고 하는 법적 인격체의 의사결정에 따라 회사의 장부에 들어오고 빠져나간다. 세금계산서 하나만 봐도 억 단위의 금액이 찍힌다. 이런 자료들을 보다 보면 숫자는 더 이상 내가 체감할 수 있는 금전적 감각으로 인식되지 않는다. 마치 영화 매트릭스에서 가상현실 공간의 배경에 흐르는 난수들처럼 머릿속에서 물고기처럼 떠다닐 뿐이다.


숫자들이 헤엄치는 형이상의 세계를 컴퓨터와 계산기를 통해 얼핏 장막을 들춰볼 뿐이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보면 모니터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한다. 나의 몸은 사무실 공간 한편을 벗어나지 못하지만 의식은 실체가 없는 데이터와 관념의 세계를 떠돈다. 회사와 직업이라는 세계는 이처럼 형이상학적이다. 그리고 형이상학적일수록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현실과 동떨어진다는 느낌을 받기 마련이다.


스티븐스는 어느 날 달링턴 경이 저택 직원들 중 유대인 출신인 자들을 전부 해고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당시의 달링턴 경은 영국에 일부 퍼져있던 파시스트 및 친나치주의자들과의 만남으로 인해 유대인들에 대한 그릇된 생각을 품는다. 스티븐스는 주인의 지시에 속으로 당황하지만 어떤 이의나 우려도 표하지 않고 그저 묵묵히 자신의 일을 행한다. 이런 지시가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며 잘못된 결정이라고 반발하는 직원도 나오지만 그는 우리 같은 자들이 고민할 문제가 아니라고 일축한다.


“켄턴 양, 당신은 그처럼 차원 높고 중대한 문제를 가볍게 판단해 버릴 위치에 있지 않다고 지적해 주고 싶소. 오늘날의 세상이 대단히 복잡하고 불안한 것은 사실이오. 당신이나 나의 위치에서는 이해하지 못할 일들이 수두룩해요. 유대 민족의 본질 같은 것도 그 중 하나이고. 반면에 우리 나리는 무엇이 최선인지를 판단하실 수 있는 좀 더 나은 위치에 계신다고 감히 말하고 싶소.”
p.227


스티븐스는 고용주의 됨됨이나 인성을 판단하거나, 일과 가치의 괴리감에 빠지기보다는 자신의 전문성에 몰두하는 방식으로 고민을 사전에 차단한다. 대다수의 평범한 사람들은 '높으신 분'들의 관념적이고 불확실한 사안들을 판단할 자질이 없고 또 그럴 이유도 없다는 것이다. 스티븐스는 직원이라면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역할 안에서 몸과 마음을 다해 최선을 다하기만 하면 될 뿐, 자신이 몸담고 있는 조직이나 고용주의 됨됨이를 판단하지 말라고 지적한다.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직업의식이자 전문가다운 행동이다.


스티븐스는 전문가 의식으로 자신의 심리적 갈등에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지만 동시에 이로 인하여 주인의 부당한 지시에 따른 동조자가 되었다. 이 사건 때문에 스티븐스와 동료직원은 갈등의 골이 생겨 오히려 다른 업무에 차질을 빚기도 한다. 프로정신 또는 직업의식과 전문성은 이처럼 개인의 주체적인 가치판단의 가능성과 여지를 차단하는 가림막이 되어 때로는 부정함과 불의를 외면하거나 더 나아가 동참하게 만든다. 한편으로는 개인이 어찌할 수 없는 심리적 갈등과 불안을 차단해 주는 피난처로서 작동하기도 한다.


경마장에 가보면 눈에 가리개를 씌운 말들이 있다. 말은 눈이 얼굴의 양 옆에 달려 있어 뒤에서 무언가 다가오는지를 금방 알아차리지만 겁이 많기에 쉽게 흥분한다. 경주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말이 불필요한 곳에 주의와 관심을 기울이지 못하게끔 시야를 차단해 앞만 보고 달리게 하는 것이다. 경주 트랙을 따라 달리는 말들은 가리개 덕에 동요하지 않고 목표까지 질주할 수 있다.


그러나 가리개를 쓰거나, 결승선까지 달려야 한다는 목표는 말 자신이 설정한 적이 없다. 경기장과 관객, 경마라는 시스템과 체제가 부여한 목표다. 경주마는 부상을 당하거나 은퇴하기 전까지 결코 자신을 둘러싼 보다 거대한 경마라는 시스템과 체계를 이해할 수 없고 또 이해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오늘의 경주를 끝낸 말은 열심히 땀을 흘리고 돌아와 보살핌을 받으며 배불리 먹고 잘 테니까.




2-Clarion.jpg


정상에 오르기 위해 희생한 것들

작품을 읽을 때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시간과 공간의 흐름이다. 스티븐스는 잉글랜드 남서부를 이동하며 자신의 저택에서 매 순간 멀어지고 앞으로 나아간다. 반면 책의 문장과 서술은 스티븐스가 자신의 젊은 날의 과거를 회상하며 뒤로만 향한다. 그의 몸은 매 순간 미래를 향해 나아감에도 의식은 과거로 돌아감에 따라 시간과 공간이 앞과 뒤로 상호 교차한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과거를 직업인으로서 담담하게 묘사하지만, 그의 감정선에는 전문성보다는 오히려 지난날에 대한 회한이 희미하게 드러난다.


아주 중요한 행사를 앞두고 2주 전부터 스티븐스의 아버지는 병세가 악화된다. 그의 아버지도 집사였으며 같은 주인을 모셨기에 사고를 방지하고자 업무에서 제외시켰지만 평생 자부심을 갖고 일해온 아버지에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스티븐스는 잘 알고 있었다. 행사 당일날 저녁 그의 아버지는 얼굴이 잿빛으로 변하고 호흡이 희미해져 가지만 스티븐스는 집사로서 행사를 주도하고 관리해야 하는 입장이라 자리를 비우지 못한다. 결국 스티븐스는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행사를 마무리한다.


"켄턴 양. 부친께서 방금 작고하셨는데 올라가 뵙지 않는다고 막돼먹은 사람으로 생각하지는 말아 주시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아버님도 이 순간 내가 이렇게 처신하기를 바라셨을 거요."
"물론입니다, 스티븐스 씨."
"내가 만약 이렇게 하지 않는다면 그분을 실망시키는 게 될 거요."
"압니다, 스티븐스 씨."
p.147


스티븐스가 그의 경력의 정점을 향해 가던 과정에서 아버지 못지않게 그의 삶에 큰 비중을 차지하던 또 한 명의 인물은 저택의 총무 '켄턴 양'이다. 하녀부터 시작하여 경력을 다져 총무의 자리에까지 오른 켄턴 양은 자신의 일에 전념하는 스티븐스에게 호감을 느끼고 접근한다. 켄턴 양은 때로는 다정한 방식으로 어떨 때는 깐깐하고 신경질적인 반응으로 자신의 감정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며 여러 형태로 스티븐스에게 접촉을 시도한다.


하지만 '집사' 스티븐스는 켄턴 양을 같은 저택에서 일하는 동료로만 간주하며, 그녀의 행동을 업무와 무관한 사적인 영역으로 해석하고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종종 그녀와 하루를 마무리하며 차를 마시고 잡담을 나누지만 그 감정은 업무를 원활히 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친절하고 편안하지만 그 친절과 편안은 각자의 근무복을 입고 있을 때만 적용될 뿐 그 이상으로 발전하지 않는다. 동상이몽의 나날에 켄턴 양은 결국 지쳐가고, 개인적인 어려움까지 가중되어 심란하던 차에 스티븐스는 그녀에게 인간적인 위로를 건네기보다는 상급자로서 지시와 지적을 반복한다.


시점은 다시 현재로 돌아오고, 여행 중인 스티븐스는 과거 자신의 행동과 발언을 계속 되새김질한다. 켄턴 양은 총무로서의 일을 그만두고 다른 곳으로 떠난 지 오래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행동과 말을 달리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곱씹는다. 그의 자각처럼 스티븐스는 전문성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았고 그 덕에 많은 인생의 고난과 갈등을 피하며 품위 있는 집사가 될 수 있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놓친 관점과 생각들이 많았음을 깨닫는다. 결국 전문성이라는 것도 인생의 여러 가치와 경험의 하나뿐이었음을.


하지만 이런저런 순간에 다르게 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상상하고 앉아 있어 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마음만 심심하게 만드는 건지도 모른다. 사실 ‘전환점’이 어쩌고 저쩌고 하지만 내가 그런 순간들을 제대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이렇게 돌이켜 볼 때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오늘날 그런 상황들을 되돌아보면 내 인생에서 정말 중요하고 소중한 순간들로 다가온다. 그러나 당시에는 물론 그런 생각을 하지 못했다.
p.268


전문성이 가지는 장단점과는 별개로, 직업과 일에 우리가 헌신하면 할수록 개인은 오히려 타인과 자신의 감정으로부터 고립된다. 일을 통한 만족감은 오직 일 그 자체에 대한 헌신과 집념을 요구한다. 그러나 이 만족감에는 상한선이 없다. 아무리 우리가 짝사랑을 하더라도 일은 무정물이기에 우리에게 사랑을 돌려주지 않는다. 감정과 정신 또한 에너지이자 자원이므로 개인이 만들어내고 투입할 수 있는 정도에 한계가 있다. 업무에 치이거나 일정이 바쁘다 보면 예민해지고 남에게 무관심해지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일이 우리의 감정을 모두 가져갔기에 자기 자신과 남에게 줄만한 것은 얼마 남아있지 않으니까.


전문성은 감정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외적인 압박 속에서도 원하는 목표를 달성하고 효과적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전문적인 직업인이 되려면 감정을 배제하고 냉철해지라고 한다. 그렇기에 전문성은 직업과 개인 간의 싸움이 아닌 '나' 자신과의 싸움이 될 수밖에 없다. 감정의 소모와 상실을 더 요령 있게 오래 버티냐, 아니냐의 차이일 뿐 언젠가는 우리가 일에 줄 수 있는 사랑은 고갈된다.


현대사회가 복잡해지면 질수록 전문성이라는 가치는 주목받아 왔다. 이제는 업계의 권위자들조차 국제적인 사안은커녕 국내정치나 한 산업의 종합적인 면모를 이해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시대다. 넓게 아는 것이 불가능해지면서 사회는 개인에게 자신의 전문성을 기르고 그것에만 집중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고 그런 자세가 '프로답다'는 직업의식으로 굳어져 왔다. 프로다움은 직업과 일을 가치의 우선순위에 둠으로써 개인의 감정은 뒤로 밀려났다.


전문성은 우리를 보다 심오하고 깊은 세계로 인도하지만 우물은 깊어질수록 빠져나오기도 어렵다. 현대인이 정신적인 고독감과 고립을 느끼는 이유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직업, 삶의 형태, 가치관과 욕망이 세분화되고 다양해질수록 우리는 각자의 영역에만 머무느라 타인과 교류하고 공감하기 어려워진다. 조직과 사회가 가치 있다고 부여한 것을 쫓느라 후회하기도 한다.


집사 스티븐스는 여행 내내 집사 스티븐스가 걸어온 길이 가치 있던 시간임을 스스로에게 강조한다. 그러지 않으면 그가 지금의 자리에 오르기 위해 희생한 많은 것들이 무가치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그건 곧 자기 자신과 삶에 대한 부정이 된다. 그렇기에 그의 강조의 문장에는 곳곳마다 품위에 가려진 절박함이 드러난다.


스티븐스는 자신의 모든 가치를 주인에게 바친 대가로 정작 자신의 가치는 얼마 남기지 못했다는 생각이 북받쳐 올라 억눌렀던 감정이 터져 나온다. 아버지와의 기억도, 지나간 사랑의 가능성도.




pexels-david-kanigan-239927285-29342388.jpg


결과를 위해 희생하며 걸어온 당신에게

누구나 살다 보면 한 번 이상은 목표를 이루지 못하거나 결과가 실망스러운 경험을 겪기 마련이다. 딱히 부정한 방법이나 속임수를 쓰지도 않았으며, 필요하다고 생각한 일을 모두 해왔음에도 운명은 야속하기만 하다. 나의 노력과 열정이 모두 잘못되었으며 헛된 시간이었구나 싶어 가슴이 아려온다.


많은 경우 개인은 어떤 사건의 시작부터 끝에 이르기까지의 과정과 기여를 온전히 평가받지 못한다. 왜냐면 과정은 그 자체로 결과에 이르기까지의 길고 지루한 여정이기 때문에 관심을 끌지 못하기 때문이다. 과정은 오로지 그 과정을 헤쳐나가는 개인의 시간과 경험 속에서만 의미를 갖기에 지극히 개인적이다.


현대사회는 표면으로 드러나는 실패냐 성공이냐의 이분법적 결과만을 기대할 뿐, 그 실패나 성공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깊게 들여다보지 않는다. 과정 속에서 얻어갈 수 있는 경험과 가치보다는 눈앞의 결과물에 집중한다. 그건 우리들이 이기적이거나 근시안적이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성장하며 겪어온 사회적 평가와 보상의 체계가 결과를 위주로 평가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모든 실패의 뒤에는 성공과 마찬가지로 누군가의 정성과 삶의 궤적이 담겨있다. 실패하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시도해야만 하고, 시도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시간이 투입되어야 한다. 아무것도 바치지 않으면 성공은커녕 실패조차도 찾아오지 않는다. 비록 만족하지 못할지라도 실패는 실패 나름대로의 결과가 있는 것이다.


스티븐스는 여정의 마지막 목적지에 도착하여 석양을 바라본다. 여행 내내 떨쳐내지 못한 여러 감정에 휩싸였지만 결국 그 회한마저도 현재에 이르기 위한 과정이었음을 깨닫는다. 그가 저택을 떠나 여행을 나서지 않았다면 지금의 일몰을 볼 수 없었을 것이고, 자신의 삶을 돌아볼 시간도 갖지 못했을 것이다. 결과가 어떠했건 자신이 걸어온 길에 언제나 충실하고, 신실하며, 때로는 좌절하고, 안타까워하고, 후회를 느낀 그 모든 과정을 받아들였기에 지금의 자신이 존재하는 것이다.


스티븐스는 자신이 살면서 이룩한 것들에 대한 자부심과 소중함을 깨닫지 못해 놓친 것들에 대한 안타까움 모두를 긍정하고 받아들이기로 한다. 성공도, 실패도 모두 그의 인생의 한 부분이다. 가족과 사랑을 놓쳤지만 그는 자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 가치에 진심을 다했고 그 덕에 남들이 오르지 못할 정점에 도달해 봤다.


하루를 최선을 다해 보내지 않으면 저녁의 마무리가 값지게 다가오지 않는다. 그날 하루가 좋은 날일 수도, 운수가 나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저녁을 기다리는 이유는 하루를 헛되이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작가는 책을 빌어 우리에게 말한다. 당신이 무언가를 위해 열심히 노력하며 살아왔다면 그것만으로도 당신은 의미 있는 삶을 살아온 것이라고. 당신의 노력은 당신 자신이 가장 잘 알 것이니 고생했다고. 당신의 성과가 아닌, 당신이 결과를 위해 바치고 희생해 온 모든 것들이 당신을 성숙한 인간으로 만들었노라고.


그러니 당신은 누구보다도 품위가 있는 사람이라고.




글토막

"즐기며 살아야 합니다. 저녁은 하루 중에 가장 좋은 때요. 당신은 하루의 일을 끝냈어요. 이제는 다리를 쭉 뻗고 즐길 수 있어요. 내 생각은 그래요. 아니, 누구를 잡고 물어봐도 그렇게 말할 거요. 하루 중 가장 좋은 때는 저녁이라고."
p.320


매거진의 이전글분노하지만 참는 자들을 위한 변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