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경험을 하고 난 다음 날.
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당연한 일인가?
곧 죽을 텐데.
그렇게 아무것도 먹지도, 자지도 않고 그저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며 하루 종일 누워있었다.
뭐, 원래부터 하는 일 없이 누워만 있는 인생이었지만 말이다.
"앞으로 29일밖에 안 남았네."
죽음을 알게 되었다고 무언가 크게 바뀌는 일은 없었다.
어차피 알리지도 못하는데 말이야.
"형님. 오늘도 여전히 한가하게 누워만 있구먼? 할 거 없으면 술이나 마시자고."
그러자, 현관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옆 집에 살고 있는 이 씨였다.
"시끄러워. 나 바빠."
"방바닥이나 뒹굴거리면서 뭐가 그리 바쁜데?"
"아, 그..."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죽음에 대해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입이 꽉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 몰라. 바쁘다니까 그러네. 저리 가."
신기한 경험이었지만 납득하고 말았다.
정말로 어제 그 소녀에게 들었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어휴, 나이 먹고 이렇게 놀러 와주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이렇게 사람을 막 대하고 그래."
이 씨는 자연스럽게 방 안으로 들어와 냉장고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집 냉장고에는 술밖에 없었지만, 이 씨가 들고 온 반찬으로 제법 그럴듯한 술상이 금세 차려졌다.
술은 내가.
안주는 이 씨가.
그렇게 차려진 술상에서 가볍게 마시는 것이 우리의 하루 일과 중 하나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하기 싫었던 나였지만, 먹음직한 술상에 자연스럽게 몸이 이끌리고 말았다.
"크흠... 오늘은 밭에 안 나가도 돼?"
방금까지 분위기를 잡고 있었던 것이 비해 너무나 쉽게 풀리는 자신의 모습이 민망하게 느껴졌지만, 헛기침을 하며 별것 아닌 일상 이야기를 시작했다.
"밖에 나가봤어? 이 날씨에 일하면 바로 머리 붙잡고 쓰러져서 하늘에 계신 어머니한테 인사하고 올 걸?"
"그래? 그렇게 덥나?"
"아이고, 이 형님이? 농사도 안 지어봤서 그런가, 너무 만만하게 보는 거 아니야?"
젊은 시절, 아끼며 생활한 덕분에 돈이 부족하진 않았다.
그렇기에 이렇게 은퇴해서 나름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하지만, 그건 앞에 있는 이 씨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일 그만두고 좀 쉬라니까. 얼마나 번다고 그 고생을 해."
"우리 기석이한테 양파랑 마늘이라도 보내줘야 할 거 아냐?"
"우리 기석이는 무슨... 누가 보면 내 아들이 아니라 니 아들인 줄 알겠다."
기석이.
늦은 나이에 얻은 내 사랑스러운 아들.
하지만 아들을 얻은 그날, 사랑스러운 아내를 잃고 말았다.
아이를 낳기에는 우리 부부의 나이가 그리 적은 편은 아니었기에 생긴 사고였다.
그 시절의 기술로는 어쩔 수 없는 사고라는 것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남겨진 아들을 볼 때마다 떠오르는 기억이, 나를 계속 괴롭게 만드는 것도 사실이었다.
"우리 여편네랑 어린 시절에 똥기저귀까지 다 치워주면서 키웠는데. 우리 기석이지."
당연히 홀아비가 아이를 키우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었다.
그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것이 이 씨 부부였다.
이 씨 부부 또한 아픔이 있었다.
힘들게 얻었던 아이를 유산하고, 그 뒤로도 아이를 갖지 못했기에 내 아들을 자신들의 자식처럼 끔찍하게 아끼며 보살펴주었다.
정말 고마운 사람들이 아닐 수 없었다.
"에휴... 그럼 뭐 해. 지 애비 보러 한 번을 안 내려오는데."
"어쩔 수 없잖아. 출산일이 이제 2달 남았다 그랬나?"
이미 며늘아가의 배는 당장이라도 나올 것처럼 부풀어올라 거동이 힘든 상태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굳이 임신이 아니더라도, 평소 같았다면 아들이 오지 않는 것에 대해 불평할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오늘만큼은 달랐다.
이제 곧 내가 죽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니까.
"에휴, 이래서 나이 먹으면 안 되는데. 불만불평만 늘어가."
나는 눈앞에 따라진 막걸리를 벌컥벌컥 마시며 불평을 뱉었다.
"어이고? 웬일이요? 스스로 자신이 늙었다는 걸 인정하고.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하면 죽을 날이 얼마 안 남았다던데."
흠칫
나는 별생각 없이 뱉은 이 씨의 말에 몸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꼈다.
나의 죽음이라는 것을 남의 입을 통해 들으니 더욱 섬찟하게만 느껴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리 없는 이 씨는 별생각 없이 술을 마시며 중얼거렸다.
"진짜 왜 그런데? 나이 먹어서 외로워서 그래? 정 뭣하면 직접 서울에 올라가면 되잖아."
"서울에? 내가?"
"그래. 형님이. 아니,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언제까지 아들이 찾아오는 것만 기다려? 형님이 직접 간다고 누가 욕할 것도 아닌데."
평소였으면 '당연히 자식이 부모님을 찾아와야지. 내가 굳이 힘든 몸을 이끌고 가야겠냐?'라고 소리치며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말에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도 나쁘지 않네. 그러고 보니 단 한 번도 찾아가 본 적이 없었어."
"얼씨구? 진짜 이상하네. 지금 보니까 더위는 형님이 먹었구먼."
나는 출발하기 위해 급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평소의 게으르던 모습과 너무 다른 내 모습에 이 씨가 깜짝 놀라며 말했다.
"이 시간에 가봤자 어차피 밤에나 도착할 텐데 어디 가려고? 어차피 차도 없어. 그냥 오늘은 술 마시고 푹 주무신 다음에 내일이나 출발해."
"하지만 시간이..."
"뭐 그리 급해? 기석이가 어디 도망가는 것도 아니고."
기석이는 도망가지 않지만, 나는 곧 떠나게 된다.
"나는...!"
나는 나에게 남겨진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것을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다시금 입이 다물어지는 것을 느끼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으음... 그래. 그러자고..."
고민해 보니, 서울에 가는 시간이 그리 오래 걸리는 것도 아닌데 너무 조급했던 것 같다.
그래. 아직 시간은 남아있으니 괜찮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