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의 말을 믿지 않는다

by Terry Cabinet
나는 고객의 말을 믿지 않는다.

사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일시적이고 현상적인 요구사항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거다.

B2B SaaS PM으로 일하다 보면 수많은 기능 요구를 받게 된다. 특히 아직 제품을 제대로 써보지도 않은 도입 검토 단계의 고객들은 특히 더 그렇다.


"A사에는 이 기능 있던데, 여기는요?" 같은 질문들.


솔직히 말하면, 이런 질문의 대부분은 경쟁 제품을 써본 경험이 만들어낸 일종의 관성이다.

중요하든 안 하든 체크리스트를 채우려고 물어보는 경우도 많고.


그렇다고 이런 요구를 흘려들으면 될까?

오히려 반대다. PM이라면 바로 이 순간, 한 뎁스 더 파고들어야 한다.


물론 모든 요구를 같은 깊이로 뜯어볼 수는 없다. 경쟁사에도 있는 기능을 단순 비교 차원에서 묻는 거라면, 우리 로드맵과 대안을 설명하며 설득하면 충분하다. 그런데 "이 기능이 없으면 도입이 어렵습니다"라는 말이 나올 때가 있다. 그때가 진짜 파고들어야 할 순간이다. 핵심 질문은 딱 하나. 대체 어떤 목적으로 그 기능이 필요한 건가.


이 질문 하나가 완전히 다른 솔루션으로 이어졌던 적이 있다.


"로그인 기능 있어요?"

이런 일이 있었다. 도입 문의를 하던 고객이 채용 홈페이지에 지원자 로그인 기능이 있는지 물었다.

사실 우리는 그 기능을 일부러 빼두고 있었다. 회원가입하고 로그인하는 과정 자체가 지원자 경험을 심하게 해친다고 봤기 때문이다. 공채용으로나 필요한 기능이었지만 이 고객은 공채를 진행하지 않는 기업이었다.

그런데 왜 로그인이 필요하다고 했을까?

나는 PM이면서 AE도 겸하고 있는데, 이럴 때 장점이 하나 있다. 그 자리에서 바로 물어볼 수 있다는 거다.

"로그인이 필요하신 이유가 뭔가요?"

고객의 답은 이랬다.

"우리는 지원서에 자기소개서 항목이 있는데, 하나당 1,000자가 넘거든요. 지원자가 한 번에 다 쓸 수가 없어서, 임시저장하고 나중에 들어와서 이어 쓸 수 있으면 좋겠어요."


이 답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뭔가가 연결됐다. 아, 이 고객이 원하는 건 '로그인'이 아니라 '지원서 임시저장'이었던 거다. 다른 서비스에서 이 문제를 로그인으로 해결했으니까, 당연히 우리한테도 로그인이 있는지만 물어본 거였다.

물어보지 않았다면? 나도 그냥 "로그인 기능은 없습니다"로 끝냈을 것이다.


뻔한 답 대신, 본질에서 출발하기

여기서 고민이 시작된다. 로그인을 만들자니 회원가입이 따라온다.

회원가입이 붙는 순간 지원 과정의 허들이 생기고 지원자 경험은 나빠지게 되어 지원율 하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래서 방향을 틀었다.

회원가입 없이 임시저장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

뻔하고 익숙한 방식은 일단 접어두고, AI를 리서치 파트너 삼아 같은 ATS 시장은 물론이고 해외 SaaS, B2C 사례까지 넓게 훑었다. 이메일 인증, 휴대전화 인증, 매직링크 같은 방식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회원가입 없이도 지원자를 식별할 수 있는 방법들이었다.


각 방식마다 장단점이 있었고, 지원자가 실제로 얼마나 익숙하게 느낄지도 따져봐야 했다.

고민 끝에 이메일 인증과 매직링크를 하이브리드로 적용하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이메일만으로 간편하게 본인 확인을 하고 지원서를 임시저장할 수 있으면서도, 별도의 회원가입은 필요 없는 구조가 만들어졌다. 고객이 원하던 건 해결하되, 낡은 방식이 강요하던 불편함까지 걷어낸 셈이다.


고객의 말 뒤에 있는 걸 봐야 한다

만약 그때 고객의 말을 표면 그대로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됐을까.

아이디, 비밀번호 입력하는 전형적인 회원가입·로그인을 개발했을 거다.


경쟁사랑 똑같은 기능에, 지원자 경험은 더 나빠지고. 어느 쪽으로 봐도 딱히 득이 없는 선택이었을 거다.

복잡한 B2B SaaS를 다루는 PM이라면, 고객의 VoC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요구사항 안에 숨어 있는 진짜 문제를 해체해봐야 남들과 다른 솔루션이 나온다. 그래야 차별화된 가치를 줄 수 있다.

다음에 고객이 특정 기능을 요구하면, 한 번만 물어보자. "그 기능이 필요한 이유가 뭔가요?" 이 질문 하나를 던지느냐 안 던지느냐가, 경쟁사를 복제하는 제품과 경쟁사가 복제하고 싶은 제품의 갈림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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