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객을 가장 많이 만난 PM

by Terry Cabinet

얼마 전 업무 일지를 자동화하려고 클로드를 만지작거리다가, 지난 1년간의 캘린더 데이터를 들여다볼 일이 있었다. 별 기대 없이 고객 미팅 일정만 추려봤는데, 숫자가 100건을 넘기고 있었다.(26년 1분기가 지난 시점 벌써 30건을 넘기고 있다.) 주 2회 꼴. 처음 든 생각은 "내가 이렇게까지 많이 만났었나?"였고, 바로 뒤따른 생각은 "그래서 뭘 얻은 거지?"였다.


왜 그렇게 많이 만났는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우리 팀은 아직 규모가 작고, 나는 PM이면서 AE를 겸하고 있다 보니 도입 문의가 오면 내가 직접 만나고, 제품 소개를 하고, 딜을 클로징하고, 온보딩까지 함께하는 구조다.

처음에는 본업 이외의 추가적인 업무 정도로 여겼는데 한 20건쯤 만나고 나니까 느낌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고객을 직접 만나는 PM과 그렇지 않은 PM은 제품을 보는 눈이 다르다. 리포트로 전달받은 VoC와, 내 눈앞에서 고객이 표정을 찌푸리며 "이건 좀..." 하고 말끝을 흐리는 것은 같은 정보라도 무게가 전혀 다르다.

50건쯤 되니까 패턴이 보이기 시작했다. 도입을 검토하는 고객들이 공통적으로 묻는 질문, 검토 과정에서 공통적으로 걸리는 포인트, 경쟁사에서 넘어오는 고객들이 유독 불만족했던 것들. 누군가한테 정리된 문서로 전달받았다면 그냥 데이터였을 텐데, 같은 말을 열 번 스무 번 직접 반복해서 들으니까 몸으로 체감이 되는 거다.

그러다 100건이 넘어가면서 더 재밌는 일이 생겼다. 고객이 입을 열기 전에 무슨 질문을 할지 예측이 되기 시작한 거다. "이 규모에 이 업종이면 아마 이걸 물어보겠지." 그러면 선제적으로 답을 준비해둘 수 있고, 미팅 하나의 밀도가 확 올라간다. 고객 입장에서도 "이 사람은 우리 상황을 알고 있구나" 하는 신뢰가 빨리 쌓이고.


고객을 직접 만나는 PM이 얻는 것들

가장 먼저 느끼는 건 문제의 온도다. 같은 "이 기능 없어요?"라는 질문이라도, 체크리스트를 채우려고 묻는 건지 이게 없으면 진짜 못 쓰겠다는 건지, 눈빛을 보면 안다. 백로그 티켓에는 이 온도가 담기지 않는다. 그래서 고객을 직접 만나본 PM이 우선순위를 다르게 매기는 거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한 뎁스 더 파고들 수 있다는 것. "왜 그 기능이 필요하세요?"를 바로 물어볼 수 있으니까, 중간에 AE를 거쳐서 확인하고 다시 전달받는 핑퐁이 없다. 이 한마디가 만들어내는 차이가 얼마나 큰지는 별도 글에서 다뤄볼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라포. 도입 문의부터 온보딩까지 같은 사람이 쭉 대응하면, 고객과 사이에 자연스러운 신뢰가 쌓인다. 이게 나중에 엄청난 자산이 된다. 소프트랜딩이 끝나고 유저 인터뷰나 고객 사례 인터뷰를 요청하면, "아 그때 같이 세팅했던 분이시죠" 하면서 흔쾌히 응해주는 고객이 많다. 이렇게 얻은 생생한 목소리가 다시 제품 개선의 재료가 되고, 개선된 제품이 다시 세일즈를 쉽게 만든다. 일종의 플라이휠인데, PM이 직접 고객을 만나야 이 바퀴가 돌아가기 시작한다.


물론 대가는 있다

솔직히 말하면 힘들다. 하루에 신규 문의가 최소 1~2건 이상 들어오고, 진행 중인 딜에서 메일과 전화가 수십 건씩 쏟아지는데, 이게 전부 제품 기획이라는 메인 업무 위에 얹어지는 부하다.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하고, 제품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비중은 계속 줄어든다.

아이러니한 건, 제품력이 곧 가장 큰 세일즈 무기이기 때문에 제품 업무를 줄일 수도 없다는 거다. 줄이면 본말이 전도된다. 결국 전체 업무량이 과도하게 불어나는 구조가 되는데, 이게 지속 가능하지 않다면 언젠가 플라이휠이 무너질 것 같다는 문제를 직감하기 시작했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클로드를 이용한 다양한 업무 자동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AI 클로드를 이용한 업무 자동화 사례들도 자세히 다뤄볼 생각이다)


그래도 이 시기에는 맞다

그럼에도 스타트업 초기, 특히 PMF를 찾아가는 과정에서 PM이 고객을 직접 만나는 건 사치가 아니라 필수라고 생각한다. 제품과 시장 사이의 거리를 가장 빠르게 좁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고객의 수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시점에서는 이 역할을 나누게 될 거다. 그때 내가 100번 넘게 고객을 만나며 쌓아온 패턴과 감각이, 그대로 인수인계의 기준이 될 거라 믿는다. PM이 책상에서만 제품을 만드는 시대는 끝났다. 적어도 B2B에서는 그렇다. 고객 앞에 직접 서보면, 같은 제품도 다르게 보이기 시작한다.

작가의 이전글AI를 대하는 PM의 마인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