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인가? 기회인가?

은퇴 후 생활 이야기

by mini

남편은 엔지니어로 32년간을 같은 직장에서 일을 하며 은퇴를 했다.

은퇴한지 5년째다.

은퇴를 하게 되면 잠만 실컷 자면 된다고 했다.

구체적인 계획을 물어보면 다 필요없고 자고 또 자고 할것이라고 했다.

내심 불안했다.


나는 지금 대학의 시간강사로 강의를 하고 있다.

남편이 은퇴를 하게 되면 나는 강의수를 줄여서 전원생활을 하고 싶다고 나의 계획을 남편에게 전했다.

그렇게 잠정적 합의가 된걸로 알고 나는 열심히 전원생활을 할만한 곳을 찾아다녔다.

거의 3년간을 알아본 결과 지금의 집을 구하게 되었다.

대지 200평에 건평 30평의 붉은 벽돌로 된 참한 집이었다.

60가구가 살고 있는 전원주택단지이고 우리집은 마을 중간쯤 위치해 있었다.

건축된지 5년된 집이다 보니 손볼것도 없고 마당안의 나무는 왠만큼 자라서 딱 보기 좋았다.

남편도 동의를 하여 이 집으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우리 동네는 담이 없다.

마을을 형성하면서 담을 만들지 않기로 주민들끼리 합의를 하였다고 했다.

그러다보니 지나다니는 이웃들과 빨리 친해질 수 있어 금방 적응을 할수 있었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그런데 남편은 그런 이웃들을 불편해하기 시작했고 내게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지나가는 이웃을 불러 커피라도 대접할라치면 남편의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마당에 나오지 않는 남편의 생활과 눈만 뜨면 마당에서 생활하는 나는 그저 물과 기름일 뿐이었다.

남편은 이웃에서 나눠주는 채소나 과일들도 부담스러워 했다.

그렇다고 거부할수도 없는 나는 남편 몰래 받고 몰래 나름대로의 보답을 했다.


이쯤 되다보니 이장님이나 이웃지인들은 마을의 모든 일들에 대하여 남편이 아닌 내게 연락을 해 왔다.

중간에 서 있는 나는 참으로 경직된 생활을 하고 있었다.

남편의 성격을 익히 알고 있었던 터라 더 놀랍지는 않지만 그래도 전원생활을 하게 되면 달라질거라는 기대가 있었다.

머리속으로 생각만 하고 행동은 하지 않는 남편의 사고는 점점 더 깊이 자기 안으로 파고 들어 나오는 길을 잃은 듯 했다.

늘 종이와 펜으로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만을 반복한다.

나는 마당에 두 발을 내딛게 되면 바로 행위를 한다.

화단을 정리해볼까 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꽃을 심어볼까 생각이 들면 5분거리에 있는 꽃집에 가서 원하는 꽃을 사다가 화단에 심는다.

어려울것이 하나도 없다.

이런 나를 지적한다.

색깔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둥 성장속도가 어떻게 되냐는 둥 지적에다 질문공세까지 한다.

물론 내 대답이 남편의 마음에 들리가 없다.

화를 낸다.


나는 슬그머니 호미를 놓고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집을 나선다.

마을 주위에 근사한 찻집들이 군데군데 있기 때문이다.

찻집으로 가는 길에 흘린 눈물의 양은 얼마나 될까.

그 길을 수도 없이 오가면서 생각한 것은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라는 사실이다.

결혼생활 25년만에 공황장애 진단을 받았다.

결혼생활 32년이 된 지금은 공황장애 약의 갯수가 점점 더 늘어나고 있다.


나는 세상에서 무서운게 별로 없다.

내가 가진것 이상의 욕심을 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저 주어진 상황에 열심히 살고 내 형편에 맞게 즐기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남편은 최강적이다.

아무리 노력을 해도 대화의 물꼬를 만들지 못한다.

대화가 아닌 꼭 필요한 말만 하다보니 부부끼리 할말이 없다.

적막강산이다.


나는 남편에게 제안을 했다.

내 자매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이사를 가고 싶다고 했다.

그곳에서 좀 더 넓은 마당을 가지고 더 많은 꽃과 나무를 가꾸며 죽을때까지 살고 싶다고 했다.

나랑 함께 갈것인지, 이곳에 남을 것인지, 아니면 혼자 아파트로 갈것인지 결정을 하라고 했다.

어떤 결정을 내려도 나는 받아들일것이다.

단 함께 간다면 본채와 아랫채를 지어서 거주공간을 분리할 것이다.

본채와 아랫채가 연결되는 부위에 주방과 거실을 두어 공동공간으로 사용할 것이다.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고 했다.

답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며 나는 새로운 땅을 알아보고 있다.


약 1000평 가량의 땅이 필요하다.

소박하게 집을 짓고 나머지 땅에는 꽃과 나무를 키우고 텃밭을 일구며 살것이다.

나의 삶을 걱정하는 내 자매들과 함께 차도 마시고 밥도 같이 먹고 그렇게 살고 싶다.

나를 응원하는 경제적으로 독립한 두 아이들도 있다.

지금 나의 상황은 위기가 아닌 또 다른 기회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