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페와 탈에서 아침을 - 2
날이 저물자 우린 가까운 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나섰다. 도로 건너편 멀리 언뜻 보이는 페와 탈은 어둠에 잠겨 윤곽만 흐릿했다. 느낄 수 있는 건 밤이 되어 짙어진 물 냄새뿐이다.
저녁만 간단히 해결하고 숙소로 돌아왔다. 종일 버스를 타느라 뻐근한 몸을 곧장 침대에 던졌다. 우리는 금세 까무룩 잠들었다.
그리고 이튿날, 아델의 발진은 훌륭하게 나에게까지 옮아왔다.
“가려워 죽겠어!”
드러난 팔과 다리를 득득 긁으며 왈칵 짜증을 부렸다. 아델은 온몸에 돋아난 내 발진을 보고 걱정했다.
“아무래도 벌레 물린 자국 같은데…….”
숙소의 위생 상태로 봐선 결코 여기 문제는 아니다. 이게 뭐든 버스 시트에서 옮은 것이 아델의 몸을 물어뜯다가, 이젠 나한테로 노선을 갈아탄 게 분명하다. 나는 온몸을 득득 긁으며 가이드북을 뒤졌다. 이런 증상에 대해 뭔가 팁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다행히도 정보는 있었다. 하지만 내용을 보고는 더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아무래도 내가 물린 것은 벼룩 같았다.
맙소사. 벼룩?!
벼룩 이런 건 생물 백과 혹은 다큐멘터리에서 화면만큼 확대된 상태로나 보는 거 아닌가?
“놔두면 괜찮아지는 것 같아.”
아델은 그렇게 말했지만, 발진은 점점 심해졌다. 벼룩을 없애려고 목욕하면서 살갗이 벗겨지도록 문질러대는데, 효과는 미미했다. 나는 가이드북을 다시 뒤졌다.
“벼룩은 우리 몸이 아니라 섬유에 붙어 있을 거래(역시나 버스 시트에서 옮은 게 맞았다). 없애려면 섬유를 삶아서 살균 소독을 해야…….”
“…….”
고심 끝에, 우린 아예 숙소를 바꾸기로 했다. 마침 머물던 숙소가 페와 탈의 중심가인 레이크사이드로부터 꽤 멀었기 때문에 옮길까를 고민하던 참이기도 했다.
다음날은 눈 뜨자마자 근처의 약국부터 들렸다. 약사에게 물린 자국을 보여주자, 그는 나비와 벌레 그림이 프린트된 보라색 튜브형 연고를 주었다. (네팔에서는 나비도 사람을 무나?) 받은 연고를 온몸에 처덕처덕 발랐다. 그리고는 레이크사이드 중심가를 향해 나섰다.
중심가까지, 한참이나 국왕 별장의 외벽을 따라 걸었다. 외벽의 끝과 끝에는 출입금지 팻말과 초소가 있고, 총대를 멘 군인이 느슨한 태도로 그곳을 지키는 중이었다. 버스에서 보았던 군인들보다 차라리 덜 무서웠다.
외벽이 끝나자 숨이 멎을 듯한 풍경이 시원하게 뻗는다. 풍성한 태양빛이 거대한 페와 탈과 강가를 두른 짙푸른 녹음으로 한껏 쏟아진다. 이른 햇살의 선명함은 나뭇잎 줄기, 둥치의 결, 호수의 잔잔한 파문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파랑, 분홍, 노랑, 연두, 보라 빨간색의 로잉보트 위에서는 사공이 낚시를 하거나 노를 젓는다. 수면이 그들의 움직임을 따라 일렁인다. 인적이 거의 없는 건너편 숲에서는 이름 모를 산새가 운다. 호수는 깊고 깊은 속은 꼭 감춘 채, 그를 둘러싼 장관만을 고스란히 반사한다.
나는 호숫가에 선 채 넋을 잃었다.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러다 강한 강바람이 온몸을 구석구석 훑으며 지나자, 다시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나는 정신없이 셔터를 누르는 아델에게 물었다.
“페와 탈이 보이는 숙소로. 어때?”
“Where else would we be?”
레이크사이드 중심에 이르자, 골목과 상점, 호텔과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페와 탈이 훤히 내다보이는 자리마다 고급스러운 호텔(이라기보다는 호스텔이지만)과 식당이 들어서 있다.
나와 아델은 꼭 페와 탈이 보이는 숙소를 구하고 싶었다. 그러나 편의시설이 집중된 중심가의 숙소비용은 비쌌다. 게다가 어디선가 음악이 종일 흘러나오고, 인파로 부산했다.
“좀 더 북쪽으로 올라가 볼까.”
아델은 기꺼이 동의했다.
레이크사이드의 북쪽을 노스사이드(North side)다. 노스사이드는 레이크사이드와 제법 떨어져 있으며 로컬 지역에 가깝다. 노스사이드의 호숫가 근처는 논밭 혹은 너른 습지다. 건너편 언덕에는 드문드문 아담한 게스트하우스가 자리 잡고 있다. 층계참엔 낮잠을 자는 집시의 해먹이나, 빨래들이 널려 있다. 버펄로나 소, 개, 닭들은 어디서나 어슬렁거린다.
우리가 원하는 숙소 조건은 딱 2가지. 벼룩 없이 깨끗하게 관리된 객실, 그리고 페와 탈이 내다보이는 큰 창. 그런데 의외로 이 두 조건이 한 번에 딱 맞아떨어지는 숙소가 없다. 우리는 거의 들판만 남은 위치까지 올라와서야 되돌아가 보기로 했다. 여기서 더 올라가면 중심가와 너무 멀어진다.
그나저나 햇빛이 몹시도 뜨겁다. 공기가 습하거나 덥지는 않다. 다만 유독 해가 가까운 느낌이다. 게다가 호수에 반사된 빛까지 더해져, 한낮에는 눈이 부셔 손차양을 만들어야 호수를 제대로 볼 수 있을 정도다.
한참을 걷다 더위에 지친 우리는 코딱지만 한 구멍가게에 들어가 먼지가 뿌연 콜라를 사서 마셨다. 미지근한 콜라는 갈증해소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그래도 고갈된 에너지는 어느 정도 돌아왔다.
다시 레이크사이드를 향해 걸었다. 그러다 무심코 호숫가로 시선을 돌렸다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하얗고 정갈한 건물 꼭대기 언저리에 <레이크 팔레스> 간판이 걸려 있다. 언뜻 열린 대문 안 너머로 페와 탈이 엿보인다. 나는 앞서 걷던 아델을 붙잡아 세웠다.
“여기 어때?”
건물을 쓱 훑어본 아델의 눈이 빛난다.
“근데 비쌀 것 같아.”
“그래도 한번 물어나 보자.”
우린 대문 안으로 들어섰다. 마당 그늘엔 플라스틱 테이블이 두 세트 놓여 있고, 의자엔 싸리를 입은 여인이 딸아이의 젖은 고수머리를 빗겨주는 중이다.
“어서 와요.”
여인이 우릴 향해 활짝 웃는다. 문득 루앙프라방에서 첫날 묵었던 숙소 여주인이 떠오른다. 그 여주인보다는 한참 어리지만, 미소가 참 근사하다.
“호숫가가 보이는 트윈 룸을 찾고 있어요. 얼마죠?”
“아아. 우선 앉아요. 시원한 마실 걸 좀 줄게요.”
여인은 말릴 틈도 없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지나가던 직원을 붙잡아 음료를 가지고 오게 했다.
직원은 시원한 물과 민트 티를 가져왔다. 민트 티엔 갓 딴 푸른 어린잎이 동동 떠 있다. 한 모금 가득 입에 머금었다가 목으로 넘기니, 순간 별이 보인다. 말도 안 되게 청량하고 시원하다! 지친 기운이 삽시간에 증발해 버린다.
“향이 좋죠? 내가 직접 기른 거예요.”
여인이 방실방실 웃으며 마당 한쪽에 자리한 소담한 정원을 가리킨다.
“페와 탈이 보이는 방이라면 3층에 트윈 룸이 하나 있어요. 가격은 700루피구요.”
나와 아델은 서로 얼굴을 마주 봤다. 생각보다는 싸다. 그러나 비수기 시즌이 가깝고, 또 나는 장기체류를 할 예정이니, 좀 더 값을 깎았으면 했다.
“전 적어도 한 달 이상 머물 것 같은데요. 이 친구도 15일은 머물 예정이고요. 좀 더 깎아줄 수 있나요?”
“그래요? 그럼 잠시만 리셉션 룸으로 오시겠어요?”
리셉션 룸으로 자리를 옮긴 여인은 능숙하게 탁탁 계산기를 두드렸다.
“그럼 600루피는 어떠세요? 아가씨는 친구가 돌아가고 난 뒤에 작은 방으로 옮길 거죠?”
“네.”
“그럼 우선 15일 동안 600루피에 그 방을 드리겠어요. 어때요?”
“먼저 방부터 볼 수 있을까요?”
“물론이죠.”
여인은 우리를 3층으로 안내했다. 객실은 ‘ㄱ’ 자 모양의 건물의 코너에 있는 곳으로 밖에서 보면 좁지만, 안으로 들어오면 널찍하다. 침대가 두 개, 욕조가 딸린 샤워 실이 하나, 간이 서랍, 책상이 놓여 있는데도 공간이 많이 남는다. 문 맞은편의 커다란 창은 커튼이 드리워져 있다. 여주인이 커튼을 걷자, 페와 탈의 전경이 바로 눈앞이다.
건물 뒤편은 수목이 우거진 강가의 그늘에 자리해 있다. 아침이면 페와 탈과 조용한 아침 인사를 나눌 수 있는 창을 보고, 우리 둘은 홀딱 반해버렸다.
“이 방으로 하겠어요.”
나는 여인에게 손을 내밀었다. 검고 부드러운 그녀의 손이 맞잡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