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4. 나는 침묵의 딸입니다 - 1

by 소라게


하늘에서 천둥번개가 우렁우렁 내리친다. 마치 내 머리맡에 바로 꽂히는 듯 엄청난 굉음이다. 얼마나 놀랐는지 침대에 누워있다가 거의 경기를 일으키며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엄마야!”


시야가 환하다. 눈이 뻑뻑한 걸 보면 아직 더 자야 할 시간인데, 주변이 밝다. 누군가 켜 둔 형광등 때문이다. 범인은 아델이다.

그녀는 팬티와 러닝셔츠 바람으로 호숫가 창문에 카메라 렌즈를 들이대고 있다. 철컥철컥 셔터음이 신속 경쾌하다. 그녀가 셔터를 누르는 순간 전후로 천둥이 친다.

나는 비몽사몽 일어나 아델 옆에 섰다.


“새벽부터 뭐해?”

“어? 미안. 나 때문에 깼어?”

“아니. 천둥소리가……, 아무튼 뭘 찍는데?”

“번개.”

“번개?”


난 어이없이 아델을 보다가 그녀가 “앗! 방금 또……! 에이, 놓쳤네.”라고 말해서 무의식적으로 호숫가를 내다봤다. 먹구름이 짙게 드리운 호수 주위로 연신 번개가 내리 꽂힌다. 처음 보는 초현실적인 광경이다. 나까지 덩달아 가슴이 두근거린다. 폭풍전야 같은 긴장감이 호수 전체에 감돈다.


“앗! 지금!”

“찍었어?”

“아잇, 놓쳤어.”

“어? 어! 다시!”

“알아!”

“이번엔 찍었어?”

“우와! 찍었어, 찍었어어!”

“진짜? 보여줘!”


우리는 잔뜩 신이 나 사진을 확인했다. 잿빛 호수 주변으로 메마른 섬광이 번뜩이는 순간이 잘도 포착돼 있다.


“그런데 오늘 사랑콧 간다며? 이제 곧 출발해야지 않아?”

“지금 나가야지.”


아델은 바닥에 던져두었던 바지를 재빨리 꿰어 입었다. 산길을 대비한 등산화와 청바지 차림이다.


“아침은?”

“어제 사둔 빵 챙겼어. 다녀올게!”

“어. 조심히 다녀와.”

“조금 있다 봐.”


아델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번 하늘이 우렁우렁 운다. 숙소 바로 앞 호숫가로 번개가 내리 찍힌다. 순간 주변이 온통 하얗게 변한다. 그리고서 얼마 지나지 않아,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창문을 열어둔 채 음악을 듣던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엄청나다 못해 우악스러운 폭우다.




오전 8시가 넘도록 아델은 돌아오지 않았다. 별일 없겠지 싶다가도, 급속히 불어나는 호수를 보면 걱정도 같이 부풀었다.

얼마쯤 내리다 말 줄 알았던 비는 아직도 퍼붓고만 있다. 수면은 흙탕물이 된 지 오래다. 이게 우기라는 건가? 위력이 무시무시하다.


나는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한 채로, 미리 사두었던 비옷만 몇 번을 쥐었다 내려놓았다. 사랑콧까지 가는 길이 험하다고 들었는데 도중에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닐지, 한편으로는 설마 혼자 갔겠어, 하는 생각이 거듭 오락가락한다.


……에라 모르겠다!

앉아서 걱정만 한다고 일이 해결될 거 같으면 세상에 문제가 어디 있겠어.


결국 나는 벌떡 일어나 비옷을 단단히 여며 입었다. 사랑콧의 위치는 대략 어딘지 짐작이 간다. 그 근처까지 가면 표지판이든 뭐든 있겠지. 그 사이에도 폭우는 그칠 생각을 않는다.


일단 객실을 나왔다. 숙소는 새벽부터 내린 폭우로 전 직원이 분주히 뛰어다니고 있다. 여주인의 남편은 정전을 대비해 발전기를 손보고 있다. 로비로 내려가자 여주인이 원래도 큰 눈을 더 크게 뜬다.


“미쳤어요? 이런 날씨에 어딜 나가요?”

“아델을 찾으러요.”

“미스 아델? 같이 있지 않아요?”

“아델은 새벽에 사랑콧에 갔어요. 일출 본다고요.”


여주인의 표정이 세상 기기묘묘해진다. 이마에 ‘이 날씨에? 일출?’이라고 써 붙인 것 같다. 그러게 말이다. 둘 다 가까이서 본 번개에 몹시 들떠서 거기까진 생각이 닿지 않았더랬다.


“걱정하는 건 알겠지만, 이런 날씨에 재인까지 가는 건 위험해요. 그리고 새벽에 갔다면 지금쯤 이미 내려왔을 거예요. 일출 포인 트니까 아직도 거기 있을 리 없죠.”

“그랬다면 숙소 먼저 와야 되잖아요.”

“글쎄……, 어디서 비라도 피하고 있을 거예요.”


전혀 마음이 놓이지 않는 대답이다.


“어쨌든 일단 나가볼래요.”


난 뒤에서 붙잡는 말들을 떨치고 밖으로 나왔다. 마침 지나가던 택시를 잡아타고 노스사이드로 향했다.


사랑콧으로 오르는 입구는 노스사이드의 호수 맞은편 들판에 있다. 짐작대로 작은 게스트하우스의 옆 논두렁에 사랑콧을 가리키는 화살표시가 서있다. 나는 질퍽거리는 논두렁길로 들어섰다. 젖은 진흙 속으로 발이 푹푹 빠졌다. 바짓단은 금세 엉망이 됐다.


진흙길이 끝나자 자갈과 바위 투성이인 오르막길이 이어진다. 아델이 말한 대로다. 산에서 내려온 빗물이 바윗 틈으로 콸콸 흐른다. 오르막길의 끝에서 곧장 산길이 시작된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려다보자니 앞길이 막막하다. 무작정 오긴 했는데, 나까지 어떻게 되는 거 아닐까 하는 위기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나는 미끄러운 바위를 조심조심 디뎌 넘기 시작했다. 위험하긴 해도 논두렁에 비하면 걷기는 차라리 수월하다.


산이 가까워올수록 지면은 점점 더 가팔라진다. 익숙지 않은 산행인 데다 길까지 험해 금세 숨이 턱에 닿는다. 한 켤레뿐인 운동화는 쫄딱 젖었다. 이쯤 되면 찝찝함을 넘어 그냥 포기 상태가 된다.

바윗길은 끝에서 두 갈래로 갈라졌다. 앞으로 쭉 뻗은 길은 산짐승이나 다닐 수준이고, 그나마 옆으로 갈라진 길이 오솔길 시늉이나마 한다. 이외의 길안내 표지판은 전혀 없다. 나는 망설이다가 인적이 느껴지는 길로 들어섰다.


울창한 숲이다. 허공을 촘촘히 엮은 나뭇가지와 잎들 덕분에 빗줄기가 약하다. 한결 낫긴 한데, 산길은 돌부리, 진흙과 모래, 기둥이 잘려나간 그루터기나, 삐져나온 잡목 덤불, 드러난 나무뿌리까지 더해져 함정이나 다름없다. 잡다한 장애물을 피해 20분쯤 걷고 나니까 진한 후회가 밀려든다.


왜 이 미친 짓을 자청했을까.

조난은 아델이 아니라 내가 당한 것 같은데.


비옷은 입으나마나다. 빗물이 줄줄 새서 속옷까지 젖었다. 옷이 더는 물을 흡수할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빗물은 아예 살갗을 타고 흘러내려 신발 속에 호수를 생성하는(?) 중이다. 다시 돌아갈까 하는 유혹이 강렬하게 솟구친다. 그러나 내려갈 길은 올라갈 길보다 더 까마득해서 엄두가 안 난다. 그러니까 나는 지금 딱 중간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중이다.


하는 수 없었다. 방법은 꼭대기로 올라가는 것뿐. 이제는 아델의 안위를 걱정할 때가 아니다. 일행도 없이 혼자 온 내가 제일 걱정이다. 사랑콧은 유명한 전망대이니까 누구든 지나다니는 사람이 있을 거다. 아니, 당장은 없더라도, 하다못해 비가 그치면 누군가 오지 않을까?


얼마를 더 올라갔을까. 중턱을 넘어선 즈음이다. 어디선가 개 짖는 소리가 들리더니, 최초의 인가가 등장했다. 언뜻 봐서는 헛간인지 집인지 구분이 안 가는 낡은 집이다. 과연 말이 통할까 싶지만(그래도 내 꼴을 보면 굳이 말이 필요할까 싶기도 하고) 도움을 청하려고 가까이 갔다. 그러자 입구를 지키던 험상궂은 개가 더 사납게 짖는다. 결국 망설인 끝에 돌아 나왔다. 사람 얼굴을 보기도 전에 개의 이빨부터 영접할 판이다.


좀 더 올라가서는, 이번엔 좁은 길목을 훌륭하게 횡으로 막고 선 물소를 피한답시고 애를 먹었다. 그래도 인가가 나타난 뒤부터 바닥에 디딤돌이라도 박혀 있어서 다행이었다. 당연히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이 비를 맞으며 산길을 헤매는 미친 짓은 나만 하는 중이니까.


그때다. 위쪽에서 누군가가 걸어 내려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나 말고 미친 자가 또 있구나 싶어 쳐다보는데, 이게 웬일인가. 아델이다. 더구나 혼자가 아니다. 그녀의 한쪽 팔을 잡은 낯선 동양인 남자가 뒤에 서 있었다. 아델보다도 그가 먼저 날 발견했다.


“아델!”


깜짝 반가워 버럭 외치자, 바닥만 보며 내려오던 아델이 고개를 든다. 날 본 그녀의 눈이 큼지막해진다.


“재인? 여길 어떻게……, 꼴이 왜 그래?”


순간 어이가 없었다. 이게 지금 누구 때문인데!


“설마 나 찾으러 왔어?”

“그럼 이 날씨에 내가 산책을 했겠어!”


아델이 황당해하며 쳐다본다.


“내가 어디로 올 줄 알고 찾으러 나와?”

“……”


할 말이 없다. 나는 몸을 휙 돌려 비탈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걱정이 떨쳐지자마자 짜증과 민망함이 밀려든다. 남자와 아델이 뒤따라 내려온다.


“제정신이 아니네. 이 비에 어딜 나와?”

“아익, 어쩌라고! 네가 하도 안 오니까 그랬지!”


듣다못해 왁 내지르자, 아델이 히쭉 웃으며 대꾸한다.


“고맙다고.”

“……”


다시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무사히 하산하기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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