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6. 보헤미안 하이웨이 - 1

by 소라게


른진의 패러글라이딩부터 이야기하자면, 그녀는 결국 패러글라이딩을 해냈다. 현장에는 내가 따라갔다. 아무렇지 않아 하는 날 보고 충동적으로 결정했던 모양인데, 막상 당일날이 되자, 아침부터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내가 따라간다 한들 뭘 어떻게 해줄 수 있는 건 아니어도 마음이나마 편하라고 함께 갔다.


른진을 태운 패러글라이딩이 절벽 너머로 날아가자, 나는 다른 패러글라이더 크루들 차를 얻어 타고 하산했다. 두 번째 보는 얼굴이라 그런지 그들은 꽤 날 친근하게 대했다.


막상 한 번 더 얼굴을 보려나 싶었던 라이언은 현장에 없었다. 다른 일로 오늘 비행에는 참여하지 않았단다. 하지만 당사자가 없는 덕분에 오히려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됐다. 믿을 수 없게도 라이언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꽤 유명한 패러글라이딩 대회 세계챔피언이었다. 아무 생각 없이 선택한 파일럿이 잭팟이었다니…….


하얗게 질린 채 내려와서 헛구역질을 몇 번 하긴 했지만, 그래도 른진은 평소였으면 감히 생각도 못했을 경험을 해보았다며 무척 만족해했다.


그리고 오늘, 른진은 고국으로 돌아간다.


포카라에서 지낸 지 꼭 15일째 되는 날이다. 버스는 아침 8시에 출발하는 차편이다. 전날 우리는 밤늦게까지 이야기를 나누다 잠들었다. 이튿날 아침, 나는 짐을 싸는 그녀 옆의 침대에 앉아 배낭 옆에 놓인 티베트와 달라이 라마에 대한 책을 걱정스럽게 보았다.


“저 책은 결국 가져가?”

“응.”

“그러지 말고 나한테 그냥 주라니까. 어차피 다 읽었잖아.”

“괜찮을 거야. 아마도.”


전혀 안심이 되지 않는 답이다.

짐 꾸리기를 마친 른진은 나를 꼭 껴안았다. 난 시무룩해져서 말했다.


“배웅할래.”

“그럴 거 없어. 거리가 꽤 되잖아.”

“괜찮아. 산책 삼아 걸어오면 돼.”

“…… 그래, 그럼.”


우린 른진의 짐을 들고 방을 나와 계단을 내려갔다. 택시는 이미 대문 앞에서 대기 중이었다. 우릴 발견한 택시 기사가 다가와 른진의 짐을 받아 트렁크에 실었다.


우리는 택시에 올라탔다. 호텔 주인 내외가 대문 밖까지 작별 인사를 하러 나왔다. 택시는 곧 출발했다. 우리 뒤로 레이크사이드가 차차 멀어졌다.



정류장 풍경은 처음 왔던 날의 오후와는 사뭇 다르다. 길 떠나는 사람들은 벤치나 테이블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거나 아침을 먹고 있다. 배낭을 멘 여행자도 심심찮게 보인다.


우린 예약한 버스를 찾아 른진의 짐부터 실었다. 른진은 이번엔 제 짐을 갖고 타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짐꾼에게 짐을 맡겨버리곤 나와 함께 간단히 끼니를 때운다.


출발 시간 10분 정도를 남겨두고, 버스 차장이 “카트만두! 카트만두!”를 외친다. 른진은 버스 앞에서 내 손을 덥석 잡고 껴안았다.


“내겐 자매고,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 잊을 수 없을 거야.”


난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당황했다.


“나도야.”

“응.”


다시 볼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는 누구도 하지 않는다. 그것이 몹시 어려운 일일 것임은 둘 다 잘 알고 있기 때문에. 하지만 서로를 잊지 않고 오래 기억하리란 것도 분명히 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나날 동안 른진과 나는 그런 시간을 보내왔으니까.


우리는 한참이나 서로를 끌어안고 있었다. 차장이 어서 타라고 재촉한 뒤에야, 겨우 손을 놓았다.


른진을 태운 버스가 정류장을 출발하여 멀어지는 모습을 오래오래 보았다. 그녀가 제발 무사히 고국의 집에 도착하길 바라면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을 혼자 걸었다.


혼자 걷는 건 이상할 게 없다. 늘 그랬으니까.

이상한 것은 숙소로 돌아가도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저녁이 되어도 아침이 되어도 감기는 눈꺼풀을 견디며 함께 수다를 떨 사람이 없다.


그게 조금, 허전하다.





한가한 날들이 지나간다. 나는 1인용으로 옮긴 새로운 방에서 별다른 것 없는 매일을 보내는 중이다.

자다 일어나서는 씻고, 노트북으로 글을 쓰거나 휴대폰에 저장해 온 전자책을 읽는다. 그것도 질리면 호수를 보며 생각에 빠져 있다가, 음악을 듣는 등 산만한 시간이 흐른다.


나는 창밖 어둠에 잠긴 페와 탈을 응시하며 커피를 마신다. 출발할 때부터 써왔던 일지는 어느 순간 에세이의 형태를 띠기 시작했다. 그래서 작정하고 지금까지 쓴 일지를 본격적인 에세이 초고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혀 한껏 물러져 있던 마음은 조금씩 다시 단단해지는 중이다. 한국에서 썼던 장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를 손보고 있긴 했다. 그러나 솔직히 글을 쓴다는 행위에 완전히 질려 있었다. 습관은 무시할 수 없어서 일지를 쓰고는 있어도 내용은 사실 기록에 가까웠다.


그런데 른진이 떠나고서 빈 시간들에 언어가 찰랑찰랑 차오르기 시작했다. 더 정확히는 른진과 포카라에 와서 지낼 때부터였다. 그래서 일지의 형식이 달라졌다. 하루 거의 대부분 그녀와 대화하지 않는 시간이 없었고, 우리의 대화는 단순 기록으로 남길 성질의 것이 아니었으니 그런 형식이 돼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써두었던 글의 마지막 페이지를 연다. 지난 새벽 내내 정신없이 달렸던 문장들이 왈칵 쏟아진다. 나는 체에 거르듯 써둔 글을 다시 읽으며 정돈을 거듭한다. 정리 과정이 끝나자 새로운 말들을 뱉어내고 싶어 안달 난 커서의 깜빡임을 주시한다. 빈 페이지를 채울 언어가 머리와 가슴, 손가락 끝으로 연결된다. 그리고,


쓴다.


그러다 보면 아침이다. 나는 더운 한낮을 피해 잠들었다가, 해 질 녘 다시 일어나 책을 읽거나 산책을 한다. 그리고 모두가 잠들었을 무렵부터 다시 빈 페이지와, 언어의 범람을 마주한다. 이것이 요 나흘 간의 내 일과다.


특기할 만한 사항이 하나 있다.

른진과 헤어진 날 오후. 레이크사이드를 걷다가 모처럼 새로운 얼굴을 발견했다(레이크사이드는 워낙 동네가 작아 일주일만 있어도 얼굴들이 눈에 익는다). 이름은 김지혜라고 했다.


서울의 S대 신문방송학과에 재학 중인 지혜는 3학년을 마치고 휴학한 뒤, 반년에 걸친 여행을 나섰다고 한다. 첫인상은 영락없는 여고생이라, 그녀가 대학교 졸업반을 앞두고 있음을 알고 제법 놀랐다. 기껏해야 대학교 신입생 정도일 줄 알았는데.


지혜는 나와 비슷한 키에, 웃을 때의 눈매는 사막여우를 꼭 닮았다. 포카라에 갓 도착해서 캠핑 촉에 앉아있는 걸 발견하고 먼저 다가가 말을 걸었다. “한국인이죠?” 물었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되물어왔다.


“어머, 한국인이세요?”


지혜는 알면 알수록 재미있는 아이다.

아무리 사소해도 새로운 것이라면 한껏 신기해하고 감탄한다. 게다가 돌아다니는 정도는 른진을 훌쩍 웃돈다. 그런 쪽으로는 영 취미가 없는 나와는 약속을 따로 잡지 않는 이상 얼굴 보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 우린 주로 아침이나 저녁을 함께 먹는 중이다. 그 외의 시간은 대개 나 혼자 보낸다.


오늘은 른진이 돌아간 뒤로 꼭 닷새가 지난 아침이다. 나는 침대 위를 구르며 앞으로 무얼 할까 고민했다.


레이크사이드는 이젠 익숙하다 못해 정겹다. 가게마다의 우유 값까지 외울 정도. 정말 신선한 우유는 마켓이 아니라 캠핑 촉에서 선착장으로 내려가는 길의 아주 조그만 구멍가게에서 판다는 것도 안다. 예전엔 나만 보면 붙잡고 물건을 못 팔아 안달이던 상인들은 요즘 평범한 인사를 건넨다.

잘 잤느냐, 좋은 아침이다, 아침식사는 뭘 먹었느냐, 등등.


며칠 동안 큰 비가 내렸다. 우박이 내린 날도 있었다. 내가 쓰고 있으면서도 믿기 어렵다. 이런 더운 날씨에 우박이라니.


본격적인 우기의 초읽기에 들어서자, 거리가 텅 비기 시작했다.

그 사이 뒤늦게 트레킹을 준비하는 한국인 여행자 몇몇을 만났고, 망고주스가 기가 막힌 가게를 발견했다. 바게트 샌드위치 장인인 식당도 알아냈으며, 레이크사이드 상점 주인들과 얼굴을 익힌 뒤론 종종 함께 길가에 앉아 체스를 뒀다. 나이 지긋한 노인 한 분은 아예 본격적으로 날 앉혀 놓고 체스를 가르쳤다.


그리고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날이 궂거나 맑거나, 매일 이른 아침 노스사이드 멀리까지 산책을 나선다. 비가 오면 맨발로 비를 맞으며 걷고, 날이 맑으면 낯익은 동네 사람들과 수다를 떨며 산책을 한다. 길을 막고 선 물소쯤은 이제 엉덩이를 쳐 옆으로 비켜나게 할 정도가 됐다.


물소 떼가 풀을 뜯는 들판(우기가 되면 물에 잠기는 땅이다)을 혼자 노닐며 큰 소리로 노래를 부른다(어차피 아무도 못 듣는다). 그 들판 한가운데 서면 북녘 저편으로 히말라야의 설산이 구름 너머로 나타났다 사라지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숙소를 향해 걷다가 멈춰 섰다. 매일 보았음에도 어딘가가 달라진 듯한 풍경을 보며 예감했다.


아마 곧 나는,

또 어딘가로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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