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Falling down, Falling apart - 4
거의 혼수상태로 잠든 채 악몽을 꿨다. 중간중간 깼다가 다시 잠들어도 같은 악몽은 이어졌는데, 막상 일어났을 때는 무슨 꿈이었는지 기억나질 않았다.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지른다.
여태까지는 하다못해 어기적거리면서라도 걸었다. 하지만 오늘은 아예 침대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가 없다. 숙소 바로 옆 식당까지 가는 데도 몇십 분이 걸렸다.
다마울리의 첫끼로는 밥보다 술이 절실했다. 그래서 맥주부터 시키고 튀긴 모모를 주문했다. 이번에는 지혜도 맥주를 주문했다. 지혜는 먼저 나온 맥주를 홀짝이다가 말했다.
“카트만두에 도착하면 월드비전에 메일을 보낼 거예요. 거기 근무하는 선배가 있는데, 그 언니에게 오늘 있었던 일을 꼭 말할 거예요. 이런 식으로 두고 볼 수만은 없잖아요. 아까 같은 사고는 일어나선 안 되는 거였어요. 그 버스 지붕에서 인사하던 소년들만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요.”
지혜는 무척이나 괴로워했다. 그런 그녀를 보는 나 역시 사람이 동시에 느낄 수 있는 오만 감정을 다 느끼는 중이다.
사고 현장에서 내가 가능했던 일은 고작 순간의 모면이었다. 그 이후로는 어떻게든 오늘 여정을 무사히 마쳐야 한다는 생각으로 머릿속이 꽉 찼다.
버스 전복 사고는 목격자일 뿐인 내게도 엄청난 충격이자 고통이었다. 지혜처럼 있어선 안될 일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가드레일 하나 제대로 설치되지 않은 계곡 고속도로를 목도하며 이 나라 행정 수준이 어느 정도일지 대강 짐작도 됐다.
월드비전에 메일을 쓰겠다는 지혜가 놀랍지만 한편으로는 그래 봤자 무엇이 바뀔까, 월드비전이 정말 여기 상황을 모를까, 기반시설은 그 나라 행정의 문제일 텐데,라고 비관하는 내가 있다. 한 사람의 애도와 열의에 가득한 편지 한 통이 뭔가를 바꿀 수 있는 힘을 가졌다면, 세계는 이미 지금보다 훨씬 나은 세상이었겠지.
그렇지만 지혜도 그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일을 쓰겠다고 말하는 것일 테다. 그런 그녀가 존경스럽다. 변화를 믿고 믿지 않고를 떠나 행동하는 것이 옳다고 믿는 저 신념이.
“……그래. 꼭 그렇게 해.”
“네.”
“……”
우리는 맥주에 잔뜩 취해 잠이 들었다. 밤이 깊자, 좀 나아진 줄 알았던 온몸에서 열이 끓기 시작했다. 식은땀에 젖은 채 뒤척이는 긴 밤이 지난다.
이튿날 아침. 우린 정오가 넘어서야 눈을 떴다. 잠이 깼는데도 베개에 얼굴을 묻고 반쯤 기절해 있었다. 출발하기에는 이미 시간이 늦은 데다 이 몸으로 걷는 건 무리다. 지혜도 컨디션이 엉망이다. 우리는 다마울리에서 하루 더 이곳에서 묵기로 했다.
우린 해 질 녘에야 정신을 차려 늦은 점심을 먹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 지혜는 주변 탐방을 하러 나섰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메모를 했다. 노트북은 다른 짐과 함께 카트만두에 보내 두었다. 하지만 오랜만에 펜을 쥔 손은 생각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고 자꾸 지면 위를 헤맨다.
결국 금방 체력이 떨어져 다시 잠이 들었다. 이번엔 꿈조차 없는 숙면이었다. 잠에서 깼을 땐 다른 신체 부위의 피로감은 훨씬 나아졌지만, 어쩐 일인지 발은 더욱 악화되어 있다.
시계를 보니 저녁 7시가 넘었다. 더 늦으면 식당이 문을 닫아 밥을 먹을 수 없다. 나는 어느새 돌아와 옆 침대에서 자는 지혜를 물끄러미 보다가 깨워 어제의 식당으로 다시 갔다. 그리고 음식을 주문한 뒤, 입을 열었다.
“몸 상태는 어떠니?”
“힘들어요. 언니는요?”
“솔직히 말해 딱 죽기 직전이다.”
“언니는 더 힘들 거예요. 도보여행은 처음이니까요. 난 경험이나마 있죠.”
나는 오늘 종일 입안을 맴돌던 말을 드디어 끄집어냈다.
“그래서 말인데, 난 여기서 그만둘까 해.”
“네?”
지혜의 눈이 커진다.
“도저히 더 걸을 몸상태가 아니다. 내일 여기서 여행자용 버스가 오거든 얻어 타고 카트만두로 가야 할 것 같아.”
“그렇지만……!”
지혜는 말문이 막히는지 입을 다문다. 내가 이런 말을 할 거라고는 조금도 예상하지 못한 얼굴이다.
“정말로 그만 둘 거예요?”
몇 번이나 내 입으로 그만둔단 소릴 하고 싶지 않아서 고개만 끄덕였다. 그런 내게서 무엇을 읽었는지, 지혜는 뭔가를 권하지도 더 묻지도 않는다.
“너는 어떻게 할래? 혼자는 겁난다며. 아직 온 만큼은 더 가야 되는데, 혼자 올 수 있겠어?”
“……”
솔직한 마음으론 지혜도 여기서 그만뒀으면 싶다. 이 여정에 지혜를 끌어들인 입장인 데다, 오지나 마찬가지인 지역을 지혜 혼자 걷게 두기도 불안하다. 내가 없는 사이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그 죄책감을 어떻게 감당할까? 어제 겪은 사고만으로도 이미 내 감당 용량을 한참 초과했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지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나는 초조함을 숨긴 채 결론을 기다렸다. 지혜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 내심 짐작 가는 바가 있었지만,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숙소에 도착해서야, 지혜는 답을 내렸다.
“전 완주하겠어요.”
난 한숨을 삼켰다.
“혼자서 괜찮겠어?”
“이왕 시작했으니까요. 전 끝을 봐야겠어요.”
지혜는 다부진 눈빛으로 말했다.
“……”
둘이서 걸어도 힘들고 고독한 길이다. 나는 그나마 동행이 있어 여기까지 버틸 수 있었다. 고작 요 5일 동안에도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았다. 나름 대도시인 카트만두가 가까워질수록 그런 일은 더 빈번해질지 모른다. 하지만 지혜가 나를 붙잡지 않았듯, 나도 그녀를 말리지 못한다.
“언니는 먼저 가요. 카트만두 가든하우스에서 다시 만나요.”
“무슨 일이 있으면 꼭 버스 타고 와. 몸이 안 좋거나, 안 좋은 일이 발생하면 망설이지 말고 그렇게 해야 해. 알았지?”
나는 거듭 당부했다.
이튿날. 나는 5km 정도를 더 걷다가 마침 지나가던 카트만두행 로컬 버스를 탔다. 지혜와는 도로 한복판에서 잠시간의 작별을 고했다.
5일 동안 형벌이나 다름없던 배낭을 끌어안은 채 비좁은 로컬 버스의 구석 자리에 앉았다. 몸은 말도 못 하게 편하나, 마음은 한없이 불편하다. 혼자 걷게 될 지혜에 대한 걱정, 그리고 지혜처럼 끝장을 보지 못하는 나의 나약함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느라. 그리고 그간 몸이 힘들어 한쪽에 미뤄두었던 상념이 한꺼번에 범람한다.
‘나는 해. 나는 시작하면 어떻게든 해내는 사람이야.’라고 여겼던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속절없이 쓸려나감을 지켜본다. 오직 그 믿음 하나로 여태 미래가 불투명한 길을 버텨왔는데, 그 토대가 무너지고 있다. 오롯이 내 것인 줄 알고 쌓아왔던 것들은 전부 허상이었을까?
나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걸까?
나는 대체, 어떤 사람이었던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