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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Apr 09.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0. 지구의 이방인들 - 5



태윤과는 5일 만에 무사히 재회했다.

만나자고 약속하긴 했어도 자유여행자들의 일정이라는 게 정확히 딱 대기는 좀 어렵다. 오지에서 이동해오는 경우도 있고, 한국을 벗어나면 제시간에 출도착 하는 교통편이 드문 경우가 많기도 해서다. 그래서 솔직히 태윤과 정말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반신반의했었다.


하지만 우리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각자의 입장에서 최선을 다했고, 덕분에 국경 너머에서 또 만날 수 있었다. 우리는 이를 자축하며 건배했다. 안타깝지만 고추장을 구하지는 못했단다. 일정이 촉박해서 고추장을 판매하는 한인마트까지 갈 수 없었다고 했다.


우린 암만의 게스트하우스를 베이스캠프로 삼고 사해를 포함한 주변 유적지를 돌아다녔다. 불가마 같은 낮이 이어졌으며, 아침이면 코란 기도송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는 바람에 도대체 늦잠을 잘 수가 없다. 덕분에 어영부영 나까지 부지런을 떨고 있다.


밤이면 맥주와 해원 언니가 직접 만드는 한국 요리를 곁들여 실없는 장난과 잡담을 실컷 하다 잠이 들었다. 아침이면 그나마 선선한 때를 틈타 네팔 이후 거의 손 놓았던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조금씩 하거나 일기를 썼다.


여행을 하면서 오랜만에 다시 쓰기 시작한 일기는 종종 내 어린 시절의 일기장을 떠올리게 한다. 어렸을 때는 선생님이 시켜서도 했지만, 나부터 일기 쓰기를 굉장히 좋아했다.


그래서 집에 오래된 옛 일기장이 하나 가득 쌓이곤 했다.  그 일기장들은 몇 번의 이사를 거치며 조금씩 사라지다가, 어느샌가 완전히 없어지고 말았다.  


먼지 덮인 일기장의 무덤이 자취를 감추기 전까지 가끔 그것들이 눈에 띄면 한 번씩 들여다보곤 했다. 그렇게 들춰본 일기장은 날짜가 멀면 멀수록 내 것이 아니라 마치 남의 일기장을 읽는 것처럼 낯설었다. 기억나는 일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대다수였다.


이렇게 쓸데없는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적었다고? 내가 이런 데를 갔었나? 내게 이런 친구가 있었나? 그 선생님이 그런 분이셨나?


한 줄 한 줄 힘주어 빼곡히 채워진 일기장의 글자들은 조금씩 모아둔 큐빅 보석을 모아둔 것이나, 모래사장에서 우연히 발견한 색유리 같은 구석이 있었다.


기억하기로 나의 마지막 일기는 중학교 2학년의 여름 무렵이 끝이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소설을 흉내 낸 긴 글을 쓰기 시작했는데, 쓰고자 하는 욕구가 아마 일기에서 다른 형식의 글쓰기로 넘어간 게 아닌가 짐작한다. 당시는 이야기를 짓는 일에 한껏 몰두한 때라, 눈 떠서 감을 때까지 온통 쓰던 소설 생각뿐이었으니까.


그렇게 내 인생에서 또 등장할 줄 몰랐던 일기가 지금 나를 조금씩 다시 쌓고 다지고 매만지는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무엇이든 쓰고 싶고, 써야만 할 것 같은데 아무것도 쓸 수 없는 상황이 되니 저절로 일기에 손이 갔다.


어릴 적 하루도 빠짐없이 기록할 만큼의 열정은 아니다. 하지만 그와 비슷하게라도 이 여행을 하며 보고 겪고 듣는 일들을 최대한 깊이 사유하고 또렷한 언어로 간직하려 노력 중이다.


어쨌든 내가 보내는 오늘은, 다시없을 오늘일 테니까.   




암만을 떠나기 전날엔 와디무사의 어느 작은 기념품 가게에서 산 엽서로 사람들에게 편지를 썼다. 그리고 숙소에서 가족에게 요르단에 와있음을 알리는 메일을 보냈다.


엄마의 답신에는 “어지간히 싸돌아다녀라.” 는 단 한 줄만 달랑 적혀 있었다. 내내 보내오시던 다정하고 긴 편지가 아니어서 엄마의 불안과 황당함, 화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그렇다. 나는 가족에게 말도 없이 중동에 온 것이다.


나는 “곧 터키로 떠날 거니까 걱정 마세요.”라고 새로 답신을 적어 보냈다. 중간에 시리아에 들를 예정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저녁에는 얌전히 숙소에 있었다. 나는 유럽을 횡단하는 동안에는 (아마도) 손대지 못할 시나리오 수정 작업을 하는 중이고, 언니는 짐 정리로 골머리를 앓는 중이며, 태윤은 씻으러 갔다.


우리가 쓰는 도미토리룸의 황토색 벽 귀퉁이에는 보호색을 띤 도마뱀 한 마리가 찰싹 달라붙어 있다. (이집트로 넘어온 후부터 도마뱀을 흔히 보는데, 이때 나는 내가 의외로 파충류에 대해 무덤덤하단 사실을 처음 알았다. 솔직히 좀 귀엽기까지 하다) 나는 부러 도마뱀 이야기는 언니에게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아마 자지러지며 난리가 날 테니, 차라리 모르는 게 약이다. (어차피 잡지도 못한다)


그렇게 무사히 그날 밤을 보내고, 이튿날 국경을 건너는 택시에 올라 시리아의 수도 다마스커스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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