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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Apr 30.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1. 페레그리노's - 1


파리를 떠난 TGV는 2시간 뒤 바욘역에 정차했다. 바욘에서는 간선열차로 갈아탔다. 열차를 기다리는 동안, 나와 같이 생장으로 향하는 동행을 만났다. 


그는 헤르만 헤세(생각하시는 그거 맞다. 유우명한 독일 작가 헤르멘 헤세와 동명이인이다)라는 이름의 독일인이었고, 함부르크 출신의 전직 응급구조원이었다.

60대 초반의 말수가 극도로 적고 대단한 장신인 그와 함께 열차를 탔고, 우리는 편안한 침묵을 공유하며 생장 피드포르역에 내렸다. 


생장 피드포르는 예상보다 훨씬 조용하고 작은 마을이다. 기독교 3대 성지 중 하나라는 산티아고 순례길의 시작은 정말이지 조촐하다. 


고즈넉한 시골마을은 높낮은 산에 폭 안겨 있다. 엽서에서 튀어나온 듯 예쁜 거리에는 행인이 거의 없다. 헤르만과 나란히 길을 걷던 나는 저만치 앞서 가는 여행자를 발견했다. 그는 젊은 헝가리 청년으로 필립이라고 했다. 


우리 셋은 순례자협회 사무실을 찾아 한참 마을을 헤맸다. 역 앞에 지도가 있었지만 봐도 무슨 소린지 도통 모르겠다. 길에서 발견한 상점에 들어가 영어로 물었으나, 직원과는 영어가 한 마디도 통하지 않는다.   


결국 1시간 가까이 헤맨 끝에 간신히 우리 외의 또 다른 여행자를 만났다. 나이 지긋한 두 여성의 이름은 다이앤과 자넷. 


“걱정 말아요. 나는 이번이 세 번째라, 여긴 아주 훤하니까.”


자넷이 든든하게 말하며 앞장선다.


순례자협회 사무실은 언덕배기의 중턱 즈음부터 솟은 성벽 안 마을에 있었다. 그 주변은 마을 아래쪽 분위기와 사뭇 다르다. 아래쪽이 널찍하고 잘 정비된 신시가라면, 이곳은 역사를 고스란히 간직한 구시가지 같다. 구불구불 좁고 가파른 길, 바닥에 깔린 매끄럽게 닳은 포석들, 금 가고 낡은 나무문이 달린 집들이 퍽 운치 있다.


순례자협회 사무소는 아주 아담하고 소박해서 여느 가정집처럼 보였다. 문 앞에 조개와 순례자의 지팡이가 놓여있지 않았다면 알아채지 못하고 그냥 지나칠 만큼 평범하다.


활짝 열린 사무소 안으로 들어가자 미리 와 있던 몇몇 여행자들이 우릴 본다. 책상 앞엔 사람이 없다. 협회 직원들은 전부 어디론가 나가고 없는 모양이다.


가방을 한쪽 구석에 내려놓고 회람판이나 사진, 지도가 붙은 벽을 죽 훑어봤다. 퀼트로 짠 태피스트리와 순례자 그림이 그려진 액자가 걸려 있다. 한쪽엔 이제 갓 도착한 이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커피와 차, 뜨거운 물이 담긴 보온병도 준비되어 있다. 차를 한 잔 마실까 고민하는데, 협회 직원인 듯 보이는 노년의 남자가 들어온다. 그는 날 보곤 다정한 미소를 짓는다. 뒤이어 비슷한 연배의 또 다른 여인이 들어선다. 그녀도 날 안경 너머로 스윽 보더니 빙그레 웃는다.


“어서 와요.”


마침 책상 앞 의자에 앉아있던 나는 몸을 돌려 앉았다. 안경 쓴 여인은 크레덴시알(순례자 증명서)의 발급을 위한 양식 종이와 기록 장부를 건네주며 말했다.


“기입한 다음에 다시 내게 줘요. 양식지를 확인한 후에 크레덴시알을 발급해 줄 거예요.”

“네.”


난 양식지의 ‘순례의 목적’ 중 어느 항목에 표시를 해야 할까 망설였다. 종교적인 이유는 아니고, 스포츠는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영적인 이유로 하자.  


여인은 내가 작성한 양식을 받아간 뒤, 크레덴시알과 각 지역별 알베르게 리스트를 건네주고 크레덴시알 뒤편을 펼쳐 설명한다.


“길을 두 가지가 있어요. 노던 웨이(Northen way)와 프랑세스(Fransais) 이렇게 두 곳. 그리고 이 크레덴시알은 당신이 순례자임을 증명하는 여권 같은 거예요. 절대로 잃어버리면 안 돼요. 이 리스트에 명시되어 있다시피, 적당한 거리마다 알베르게가 있어요. 사설도 있고, 바티칸의 성당과 협회 등에서 만든 공용 알베르게도 있지요. 어느 곳을 선택하느냐는 당신에게 달려 있어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주의할 점. 절대 무리하지 말라는 거예요. 자신의 페이스를 꼭 지키되, 끝까지 포기하진 말아요. 당신이 이 순례를 모두 마친다면, 이 길에서 반드시 뭔가를 발견하게 될 테니까요.”


그렇게 말한 여인은 나에게 축복을 빌며, 오늘 묵을 숙소를 알려주었다. 알베르게에서 며칠이나 묵을 수 있냐고 물으니, 하루뿐이고, 더 머무르려면 사설 알베르게로 옮겨야 한다는 답이 돌아왔다. 아예 처음부터 사설 알베르게로 갈까 하다가, 그냥 내일 바로 떠나기로 마음먹고 협회를 나왔다. 헤르만과 다이앤, 자넷은 아직도 수속 중이다. 


내가 묵을 알베르게는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육중한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허리가 굽은 노파 한 명이 우릴 맞이한다. 협회 직원이 나에 대해 스페인어로 설명하고, 노파는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높고 빠른 투로 대꾸하더니, 별안간 내 손목을 휙 잡아채고 끌고 간다. 협회 직원이 “부엔 카미노(Buen Camino)!"라고 외친다. 나는 그녀에게 변변한 인사도 못하고 노파에게 질질 끌려갔다. 


노파가 날 데려간 곳은 도미토리다. 그곳엔 총 3대의 침대가 있었는데 모두 2층침대다. 침대 하나를 골라 가방을 놓고 나오자, 노파는 다시 날 이리저리 끌고 다니며 샤워실과 식사를 할 수 있는 곳, 빨래를 널 수 있는 곳을 알려준다. 빨래터에는 벌써 누군가의 옷들이 빼곡히 널려 있다. 


방으로 돌아오자, 내 맞은편 침대 아래층에 길쭉한 인영이 앉아있다. 키가 몹시 큰 동양인 청년으로 20대 초반 정도다.  10대를 갓 벗어나 20대에 한창 적응 중(술집에 들어가면 반반의 확률로 신분증을 요구할 것 같은)인 어설프고도 성숙한 분위기가 흐르는 사람이다. 


 그는 무방비한 눈으로 날 흘끗 보더니 쓱 시선을 돌렸다. 난 그만 머쓱해져서 몸을 돌렸다. 그리곤 끼니를 때울 요량으로 방을 나왔다. 바로 그때 내 앞에서 오던 남자를 보지 못하고 부딪쳤다. 남자는 “억!” 하더니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나는 고개를 들어 남자의 얼굴을 보았다. 맑고 유독 큰 눈 외에는 이렇다 할 특징 없이 평범한 동양인이다. 키는 성인 남자 평균인데 반바지 아래 드러난 굵직한 종아리가 범상치 않다. 


“Sorry."


라고 간단히 말한 후 나가려는데, 그가 갑자기 불러 세운다.


“一緒に食事しますか(같이 식사할래요)?”


일본어가 튀어나온 건 둘째 치고, 생각지도 못한 말이라 어리벙벙해서 그를 보았다. 남자가 시원하게 웃는다.


“はじめまして(처음 뵙는군요). 私は藤本潤と言います(저는 후지모토 쥰이라고 합니다).”


난 그를 말끄러미 보다 대꾸했다.


“あ, はい. Yun Jane です(아, 예. 윤재인이에요.) というか私は韓国人です。. (근데 전 한국인인데요.)”


그러자 남자의 얼굴에 옅은 당혹감이 번진다.


“Oh, I'm so sorry. I thought you were a Japanese. (실례. 일본인이신 줄 알았어요.)”

“Never mind. Anyway, 日本語で話してもいいし、英語も大丈夫です。(괜찮아요. 일본어로 말씀하셔도 되고 영어도 괜찮아요).”


그의 입모양이 ‘O’를 그린다. 


“日本語も可能ですね。일본어도 할 줄 아시는군요).”

“ちょっとだけどね。(조금만이지만요).”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지은 그가 내가 나온 방 안쪽에 대고 유창한 영어로 묻는다. 


“이수 군도 함께 가지 않겠습니까?”


그러자 안에서 아까의 그 청년이 큰 키를 휘적대며 방을 나온다. 눈대중으로만 봐도 185를 훌쩍 넘는다. 그런데, 아까 이름이 ‘이수’라지 않았나? 

의아해서 보는데, 그 청년이 손을 내민다. 그리고 또렷하고 익숙한 언어가 들려온다. 


“안녕하세요. 한이수입니다. 한국인이에요.” 


… 한국인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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