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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May 08.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1. 페레그리노's - 2



셋이서 저녁을 먹으러 간 곳은 근처의 작은 식당이다. 테이블은 4개뿐으로, 주홍빛 조명과 정감 있는 아기자기 정감 가는 소품이 여기저기 놓여있다.


우린 페레그리노 메뉴를 주문했다. 식전에 테이블 와인 한 병과 물이 나왔다. 우린 잔에 와인을 따른 후 건배했다. 부엔 카미노Buen Camino. 모두가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말을 외쳤다.  


“이수 군은 뭐하는 분인지 물어도 될까요?”


각자의 와인잔이 반 이상 비워졌을 즈음, 후지모토 상이 이수에게 물었다. 떠드는(?) 건 주로 나와 후지모토 상의 몫이라 묵묵히 전채 접시(바케트 조각과 발사믹 소스를 살짝 넣은 올리브 오일이 나오는데, 진짜 기가 막히게 맛있다!)  비우기에만 열중하던 이수가 눈을 본다. 갑자기 제 이름이 끌려 나와 당황한 눈치다. 


“휴학하고 여행을 하고 있습니다.”


아, 대학생인가? 깍듯한 그의 영어 끝에 부산 억양이 묻어난다(정말이지 이런 건 느낄 때마다 신기하다. 어떻게 모국어의 방언 억양으로 외국어를 말하게 되는 걸까?). 어쩐지 부산 출신이지만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후에 이는 사실로 밝혀졌다). 


여하튼 답은 그게 끝이다. 말수가 몹시 적거나, 낯을 몹시 가리거나 둘 중의 하나겠지. 어쩐지 한국에 있는 내 막내 남동생 같은 생각이 들어, 곤란해 보이는 그를 돕기로 했다. 


“후지모토 상이야말로 뭐하는 분이세요?”

“아, 저는 학생입니다.”


고개를 갸웃했다. 그의 나이는 언뜻 봐도 서른이 넘는다. 게다가 학생이라기보다는 붙임성 좋은 대기업의 영업맨 분위기다. 


“전공이 뭔데요?”

“바티칸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하고 있죠.”


그 대답을 듣자, 번뜩 머리에 스치는 것이 있다.


“혹시 신부님이세요?”


후지모토 상이 ‘오오~ 바로 알아보시네요.’ 하는 탄성을 뱉는다. 동시에 알아들은 이수의 눈마저 휘둥그레진다. 


“맞긴 하는데, 아직 보조 신부예요.”


이번에는 내가 당황스럽고 말았다. 신부님이라니. 신부님을 이렇게 지척에서 보다니. 지금이야 부모님이 성당에 다니시지만, 나는 우리 집이 가톨릭으로 개종하기 전 개신교도였을 적에 마지막으로 교회를 갔고, 그 후로는 무교를 선언(?)했다. 그래서 신부님이란 나에게는 늘 전해 듣거나 매체를 통해 익숙해진 낯선(…) 존재다. 먼발치에서라도 본 적이 없는 부류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런 사람과 마주 앉아 와인을 마시고 있다니……! 


“전혀 그렇게 안 보이세요. 영락없이 그냥 휴가 낸 회사원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 후지모토 상은 “종종 듣습니다, 그런 말.”하곤 사심 없이 웃는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세례명을 여쭤도 될까요?”

“그럼요. 전 토마스라고 합니다. 그 이름으로 부르셔도 좋습니다.”

그러더니 신부님이 물었다.


“저야말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이유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오르신 건지 두 분께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와 이수는 서로를 보았다. 


“신부님은요?”


갑자기 이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어서 답을 미룰 생각으로 신부님에게 되묻는다, 마침 직원이 거대한 접시 가득 음식을 담아 가져왔다. 갓 튀긴 감자와 구운 닭고기, 이탈리안 소스로 버무린 신선한 야채샐러드가 풍성하다. 우린 각자의 접시에 조금씩 덜어가며 먹기 시작했다.


“제 목적이야 명백하지요. 나는 가톨릭 신부고, 여긴 가톨릭 성지 순례 중 하나니까요. 유학을 마치고 오키나와로 돌아가기 전에 순례길에 오른 겁니다. 여기 말고도 가야 할 곳이 두 군데 더 있어요. 포르투갈의 파티마와 예루살렘입니다.”

“예루살렘? 이스라엘도 가세요?”


“네.”라고 대답한 그는 바지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 모습을 보고 순간 어리둥절해졌다. 신부들에게 술 담배가 허용되던가?  

신부님이 물었다.


“재인 씨는 무슨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됐습니까? 가톨릭교도인가요?”


난 어깨를 으쓱했다.


“아뇨. 저는 무교예요.”

“신을 믿지 않습니까?”

“신은 믿어요. 신의 존재 외에는 인간의 능력으로 설명할 수 없는 그 많은 신비를 납득할 방도가 없잖아요.”

“그런데 어째서?”

“원래는 교회를 다녔어요. 부모님은 현재 가톨릭으로 개종하셨지만, 어쨌든 저는 그전에 무교를 택했죠.”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생각해 보면, 가톨릭 순례길에 섰으니 이런 질문이 한 번 이상은 나오리라 예상했어야 하는데. 내게는 이제 백악기 화석과 다를 바 없는 종교 문제를 꺼내려니 조금 막막하다. 


“종교 생활을 할수록 믿음이 사라지더라고요. 주일에 나오는 교회를 일주일에 한 번 받는 면죄부쯤으로 아는 사람이 너무 많았어요. 평일 내내 죄를 저지르곤 교회에 와서 기도하고 속죄하면 그 주의 잘못이 전부 지워지기라도 한다는 듯이요.”

“…….”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려는 신도들도 있었죠. 그러나 아닌 사람들이 압도적이었어요. 그런 사람들을 보면서 처음에는 신이 정말 있는 걸까 싶다가, 실은 있긴 한데 생각만큼 인간에게 크게 관심이 없고 오히려 인간이 되레 신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절절매나 보다, 하는 생각에 이르렀죠. 교리니 분파니 하며 서로가 정교라고 전쟁을 벌이고 죽고 죽이며 누군가를 미워해대는 꼴을 보는 것도  아주 질렸고요. 게다가 대부분의 종교에서 여성의 위치는 또 얼마나 빈약한가요. 좌우지간 이런 온갖 갈등의 핑계가 될 정도라면 종교 정도는 없어도 되는 거 아닌가, 종교 아니어도 갖은 핑계로 싸우는데, 굳이 종교까지 거들 일인가 싶고.”


식탁이 조용하다. 난 잔에 남은 와인을 털어 마시고 말을 이었다.


“그때는 그랬지고, 지금은 또 달라요. 사람은 누구나 마음 둘 곳이 있어야 하는데, 종교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종교에 마음을 두기로 했나 보다, 하는 정도죠. 애초에 완벽한 인격이나 인간이 종교생활을 굳이 할 리도 없고요.  이제는 그냥 그 문제에 아무런 생각이 없어요. 철저하게 남의 일이 됐달까.”


신부님이 물었다.


“그렇다면 재인 씨가 이 길을 걷는 목적은 뭔가요?”


묻는 뉘앙스가 이 길을 걷는 나의 목적과 종교는 더 이상 연결 짓지 않기로 한 듯 보였다. 나는 잔을 내려놓았다.


“그 목적은 찾아보려고요. 지금은 막연한 느낌만 있어요. 이 길을 다 걷고 난 후에야 구체적으로 잡힐 것 같달까.”


나는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주저앉은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을지, 전보다 더 단단하게 만들 수 있는지를 볼 생각이에요.” 


더 많은 말들이 입안을 맴돌았지만, 나는 더 말하기를 관두었다. 나도 아직 또렷하게 말할 수 없는 것들이 너무 많았으니까. 


“잘 될 거 같은가요?”

“해봐야 알겠죠?”


난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대꾸했다. 신부님은 이제 이수를 건너다보더니 벙긋 웃었다.


“이번엔 이수 군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을까요?”

“저요? 특별히 전……”

“모두가 특별한 이유로 이곳에 와 있진 않을 겁니다. 각자의 이유로 와 있는 거겠죠.” 신부님이 여상한 투로 말한다. 그 말투에 힘입었는지, 머뭇머뭇 이수의 입이 열렸다. 


“저는 졸업하기 전에 여행을 나와 보고 싶었어요. 유럽을 원했는데, 워낙 물가가 비싸서 적당한 나라를 찾다가 이곳을 알게 됐습니다. 여행기도 읽고, 사람들 이야기도 들어보니까 그런대로 원하는 조건이 맞더라고요.”

“어떤 면에서 이수 군은 우리 중 가장 순수하게 길을 즐기는 사람이 될 수도 있겠네요.” 


오오, 유려한 화법이다. 과연 신부님인가(?)! 

이수의 이야기를 끝으로 우리의 화제는 내일 일정에 대한 것으로 바뀌었다. 


“내일 어디까지 갈 생각인가요?”

“론세스바예스요. 하루에 20km 이상은 걷고 싶지 않지만, 일단 피레네 산맥은 넘고 나서 페이스를 늦출까 해요. 신부님은요?”

“저랑 이수 군과 일정이 같군요. 저희도 론세스바예스까지 갑니다.”

“벌써 두 분은 동행하기로 약속이 된 거예요?”

“그건 아닙니다만, 목적지가 같으니 출발시간이 겹치면 함께 해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신부님은 그렇게 말하며 허허, 웃었다.


식사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오자, 우리 도미토리에는 세 사람의 페레그리노들이 더 들어와 있었다. 그들 중 두 명은 스페인 사람이고, 한 명은 나이가 상당해 보이는 스위스 노인이다. 


민소매 티와 반바지 차림인 스위스 노인의 몸은 구릿빛으로 그을린 데다 자잘한 근육이 붙어있어 벗어진 머리와 덥수룩한 흰 수염과 달리 꽤 강인해 보였다. 게다가 오래 여행한 사람들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우린 짧은 악수로 인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내일 새벽같이 출발해야 할뿐더러 갈 길이 멀었다. 27km. 네팔에서의 경험으로 이 거리가 만만치 않음을 이미 안다. 거기다 산맥도 하나 넘어야 한다. 내일 일정은 프랑세스 경로에서 가장 험하다는 일정 중 하나가 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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