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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May 22.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1. 페레그리노's - 3




눈을 뜬 것은 새벽 6시 30분 무렵이었다. 잠은 서서히 깬 것이 아니라, 마치 누군가 몰래 다가와 놀라게 하듯 느닷없이 달아났다.


방 안은 어두웠다. 내 아래 침대와 이수의 침대는 이미 비어있다. 대체 몇 시에 출발한 걸까. 주변은 출발을 준비하는 페레그리노들의 조심스러운 움직임으로 낮게 수런거린다.


나는 씻고 돌아와서 배낭의 물건들을 몽땅 뒤집었다. 그리곤 입고 있는 옷 외에 편한 위아래 옷가지 두어 벌, 레깅스 두 벌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곱게 개켜 선반에 올려두었다. 필요 없는 물건과 책도 그 옆에 놓아두었다.


이제 남은 물건은 휴대폰과 노트북, 여분의 옷, 슬리퍼, 비상약, 작은 조명이 달린 펜, 세면도구, 여권이 든 복대뿐이다. 꽤 많은 물건을 버려왔지만, 아직도 버릴 것들은 잔뜩 남아있었다.


그래도 일부 순례자들처럼 택시나 우편으로 짐을 미리 보내 두진 않기로 했다. 내가 짊어질 짐이 딱 나의 욕심만큼이라고 어느 책에선가 읽은 기억이 났다. 그러니 내가 얼마만큼의 욕심을 짊어져야 무사히 이 길을 모두 걸을 수 있을지 지켜보기로 했다.


절반이 넘는 짐을 처분하자, 이제 가방 무게는 4kg이 조금 넘는다. 나는 가뿐해진 어깨를 들썩이며 식당으로 갔다. 식당에는 어제 길에서 만났던 다이앤과 자넷, 그리고 토마스 신부님이 먼저 와 있었다.


“어? 아직 출발 안 하셨네요?”


 신부님이 퉁퉁 부은 얼굴로 멀건 커피를 들이키며 말한다.


“늦잠을 자서요.”

“이수는 이미 출발했죠?”

“그런 것 같습니다. 부지런한 친구인가 봐요.”

“아아.”


기다란 목재 테이블 위엔 바게트와 커피, 약간의 버터와 잼이 놓여 있다. 난 도무지 씹히지 않는 질긴 빵을 억지로 입에 욱여넣었다. 맛은 없지만, 먹어두지 않으면 금세 지칠 거다. 어쨌든 오늘은 산행을 해야 하니까.


신부님이 물었다.


“물은 준비했나요?”

“아뇨. 곳곳에 순례자를 위한 수도가 설치되어 있다고 그러지 않았나요?”

“그래도 정확한 위치를 모르잖습니까.”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무거운 것도 싫지만, 무엇보다 물병이 없어요.”


신부님의 눈초리가 별 해괴한 사람 다 보겠다는 듯 기묘해진다.


“여길 오는데 그런 준비를 안 했다고요?”

“충동적인 결정이었달까요.”


난 마지막 빵조각을 꾸역꾸역 입에 욱여넣으며 그간의 일을 짧게 말했다. 신부님은 탄식에 가까운 한숨을 뱉는다.


“신고 있는 신발은 러닝화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난 운동화를 내려다봤다. 좀 더럽긴 해도 그동안 길이 잘 들어서 이보다 편한 신발은 없다.


“괜찮아요. 여기서 어쭙잖게 새 등산화라도 신으면 반나절도 안 돼서 발이 만신창이가 될 걸요.”

“그도 그렇겠군요.”


반쯤 식은 커피를 한 대접이나 후루룩 마시곤 일어섰다.


“난 지금 출발할 건데, 같이 가실래요?”

“그러죠.”


신부님도 자리에서 일어선다.


각자의 짐을 지고 알베르게 앞에서 다시 만났을 때, 신부님은 등산용 모자를 쓰고 순례자 지팡이를 짚은 채 서있었다. 그 모습을 보니 그가 신부라는 사실이 더더욱 믿기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사내 등산모임에 참석한 회사원 같다. 그의 배낭엔 협회에서 산 조개가 매달려 있다. 그는 푹 꺼진 내 배낭을 보더니 “설마 짐이 그게 다예요?”라며 놀랐다.


“필요 없는 건 다 처분했어요.”

“처분이요?”

“다 들고 못 걸어요. 네팔 트레킹 때 아주 뼈아프게 배운 바가 있거든요.”


신부님은 고개를 절레절레 가로저었다.


“어쨌든 물은 일단 내가 500ml 정도 가져왔어요. 함께 나눠 마시다가 수도가 보이면 채워서 다니도록 하죠.”


신부님을 거기까지 신경 쓰게 만든 것이 좀 면구스럽다. 부탁하진 않았지만, 그가 보기엔 아무래도 내가 너무 대책이 없어서 고심 끝에 내린 결정이었을 테니까. 나는 미안함을 고맙다는 말로 대신하며 앞장섰다.



생장 피드포르 마을을 벗어나기도 전부터 길 위에 배낭을 짊어진 사람들이 하나둘씩 늘어난다. 마주친 우리는 짧은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눈인사만 대신하며 스쳐가기도 했다. 그렇게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보니, 완전히 떠오른 태양이 너른 목초지와 가파른 산등성이를 선명히 비춘다. 엽서에 나올 법한 목가적인 풍경 위로 선선한 아침이 고루  번진다.


알베르게를 떠난 지 1시간쯤 지나자, 경사가 급격히 가팔라지고 인가가 사라졌다. 길은 포장도로에서 오솔길로 변했다. 길 찾기는 어렵지 않다. 잊을 만하면 나타나는 노란 화살표의 흔적들만 좇으면 되니까.


도중에 엄청난 장신에다 다부진 체격의 이탈리아 여성 가브리엘을 만났다. 매체를 통해 흔히 접하던 이탈리아인의 모습과는 너무 달라서 깜짝 놀랐다. 토마스 신부님은 그녀가 북부 이탈리아 출신이며, 보통 외부에 알려져 있는 이탈리아 인의 전형적인 이미지는 남부 이탈리아인들로부터 비롯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가브리엘은 걷는 것이 무척 느렸다. 마치 신중히 자리를 골라가며 풀을 뜯는 소처럼 무겁고 육중한 걸음이었다. 표정이나 말투도 멍한 구석이 있어 반응이 한 박자씩 늦었다. 어수룩하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는 영어를 못하고, 나는 이탈리아어를 못하기 때문에 신부님이 우리 둘 사이의 통역을 맡았다. 바티칸에서의 유학 생활 덕분에 신부님은 이탈리아어에 능했다.


우리는 결국 가브리엘보다 앞서 걷게 되었다. 그녀 속도론 오늘 하루가 꼬박 지나도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긴커녕 피레네 산맥 중턱 어딘가에서 정말로 풀 뜯는 소들과 같이 자야 할 것만 같았다.


우리 둘은 또 그렇게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제법 대화가 오갔지만, 가팔라지는 경사만큼 말수도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오전의 한기를 밀어낸 태양이 정오의 한낮에 가까워지자, 얼굴에서 땀이 뚝뚝 떨어진다. 아침에 먹은 빵은 대사기관 어딘가에서 증발해버린 지 오래다. 일부러 잔뜩 발라 먹은 버터도 기력을 다한 모양이다.


우린 산 중턱의 오리손 알베르게 앞에서 가방을 내려놓고 잠시 쉬었다. 비슷한 속도로 올라오던 페레그리노들도 그곳에서 쉬고 있다. 한참 앞서 가던 다이앤과 자넷, 심지어는 생장 역에서 만났던 헤르만도 다시 만났다.


“경사가 엄청난데요. 아유, 더워.”


넌더리를 내는 자넷의 얼굴이 잔뜩 붉게 상기돼 있다. 등산화와 등산용 바지 사이에 드러난 그녀의 종아리는 푸른 정맥이 튀어나와 보였다. 활동적인 인상에 호리호리한 다이앤은 팔팔한 기색으로 친구의 안위를 살피는 중이다. 나? 나는 이미 땅바닥에 큰 대자로 뻗어 새파란 하늘을 올려다본다. 구름 한 점 없이 높다.


“재인 씨, 물 좀 마셔요.”


신부님이 물통을 내민다. 물통의 입구엔 스트로 기능을 하는 빨간 꼭지가 달려 있다. 바하리야에서 봤던 낙타 가죽으로 만든 수통이 떠오른다. 하나쯤 갖고 싶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사 올 걸 그랬다. 나는 감사 인사와 함께 물통을 받아 들고 입술만 축인 뒤 돌려주었다.


“이수 군은 어디쯤 가고 있을까요?”

“글쎄요. 아무래도 젊고 건강한 친구니까 속도가 훨씬 빠르겠죠. 지금쯤 아마 피레네 정상에 거의 이르렀을 겁니다.”

“벌써요?”


나는 혀를 내둘렀다. 그리곤 바닥에서 일어선다.


“아빠 말씀이 너무 오래 쉬면 더 피곤해진대요. 그만 출발하죠.”


신부님이 바닥에 놔둔 배낭을 메고 일어선다. 우린 아직 쉬고 있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출발했다. 우리보다 한 발 앞선 헤르만의 뒷모습이 저만치 보인다.


오리손을 벗어나자 한층 본격적인 산길이 시작되었다. 매끈한 포장도로는 아니지만 기나긴 세월에 걸쳐 사람들의 발로 다져진 길이 이어진다. 숲이 끊기는 간격마다 드러난 평원에선 젖소 무리나 양 떼가 느긋이 풀을 뜯거나 풀밭에 드러누워 볕을 즐긴다.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딸랑딸랑 워낭소리가 바람에 섞여 내가 있는 곳까지 날아든다. 한가로운 저들의 등 뒤론 아주 먼 산봉우리들이 청명하게 내다보인다.


“재인 씨. 뒤를 봐요.”


신부님이 말했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보았다. 그러자 청량하고 힘찬 바람이 온몸 구석구석 미끄러지듯 스치고 지나간다. 발아래로 까마득히 멀어진 생장 피드포르와 짙푸른 평원이 있다. 비행기로, 배로, 기차로, 버스로 국경을 넘던 내가 이번에는 두 발로 걸어서 국경을 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하자 가슴이 뛴다.  


“꼭 <사운드 오브 뮤직> 영화의 마지막 장면 같지 않아요?”


신부님이 날 본다.


“폰 트랩 대령과 마리아가 아이들을 데리고 걸어서 알프스 산맥을 넘잖아요. 스위스로 가려고.”

“아아.”


신부님의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여기가 알프스는 아니지만, 그런 느낌이 들긴 하네요.”


산 위로 올라갈수록 바람이 세기를 더한다. 등 뒤에서 떠미는 바람에 몸이 저절로 나아간다. 정면에서 닥쳐올 때는 한 발 떼느라 진땀을 뺀다. 정상으로 가까워질수록 땀에 젖을 새가 없다. 흘리자마자 마르는 데다, 심지어는 춥다.


급경사 구간을 지나자 이젠 완만한 경사가 끝도 없이 이어진다. 저 모퉁이만 돌면 정상일 것 같은데, 막상 가면 또 다른 길이 기다리고 있다.


게다가 언젠가부터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격렬한 허기와 갈증이 폭풍처럼 덮쳐온다. 시작은 그저 배가 고프다는 정도였다. 하지만 몸의 에너지를 태우는 속도가 격렬해지자 허기는 금세 복통으로, 급기야 복통도 느끼지 못할 정도의 졸음으로 이어지기까지는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방전이 임박한 손전등처럼, 나는 걷는 상태로 깜빡깜빡 정신이 들어갔다 나가길 반복했다. 너무 졸려서 그냥 이대로 풀밭에 자빠져 자고 싶은 생각뿐이다.


한 시간마다 쉬어주던 걸, 이제는 15분 걷고 30분 쉬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정말이지 산행을 앞두고 있으면서, 먹을 것도, 물도 챙겨 오지 않다니. 간혹 스스로도 황당할 만큼 대책 없을 때가 있는데, 하필 오늘이 그날인가? 이대로라면 론세스바예스에 도착하기도 전에, 피레네 산맥  중턱 어느 뫼에선가 아사하고 말 거다.


“신부님, 잠깐. 잠깐만요.”


나는 끝내 길가의 풀밭에 드러눕고 말았다. 나보다 좀 앞서 걷던 신부님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많이 힘들어요?”

“……저 지금 살아있는 거 맞죠? 죽은 귀신 아니죠?”


신부님은 웃음 반, 걱정 반인 얼굴로 내 옆에 앉는다. 그리곤 “한숨 자고 갑시다.”라고 제안했다. 그 자비로움에서 처음으로 그가 진짜 신부님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풀밭에 누워있는 동안 죽음 같은 평안이 쏟아졌다. 신부님이 벗어준 윈드재킷을 덮고 멍청히 하늘을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고작 십 수 분 정도의 짧은 낮잠이었으나 무덤처럼 깊고 까마득했다. 다시 눈을 뜨자, 곁에서 작은 성서를 읽고 있는 신부님의 옆얼굴이 보인다. 어딘지 고요하고 성스럽다. 맹목이나 맹신이 아닌, 성찰과 시련을 거친 신앙의 얼굴이란 저런 걸까?


“어때요? 좀 괜찮아졌어요?”


기척을 눈치챈 그가 성경을 덮으며 묻는다. 난 몸을 바로 세우며 그에게 윈드재킷을 돌려주었다.


“근데 이젠 배가 고파 죽을 것 같아요.”


신부님은 빙긋 웃더니 자신의 배낭 옆 주머니에서 작은 병을 꺼내 건네주었다. 그 안에 든 것은 와인으로, 그가 예배를 드릴 때 사용하는 것이 분명했다.


“이거라도 마셔둬요. 어쨌든 에너지원이 들어있을 테니.”


난 입을 떡 벌렸다.


“이건 미사용 와인이잖아요. 이걸 어떻게 마셔요?”

“괜찮아요. 백포도주도 있으니까.”


무시무시하게 강렬한 유혹이다. 그리스도의 성혈로 배고픔을 씻는다고? 진짜로?

물질적으로는 저 병에 든 것이 단순히 어느 포도원에서 생산한 어느 와인임을 뻔히 알면서도, 그것이 상징하는 바로 인해 이렇게나 배덕감이 든다. 하지만 당장 마시지 않으면 이 들판에서 뼈를 묻을 것 같다. 그렇게 난 생각지도 못한 선택의 기로에 서고 말았다.


To be or Not to Be.

To drink or Not to drink.


몇십 초간의 치열한 고민 끝에, 나는 신부님의 손에서 와인을 받아 든다.


“진짜 마셔도 되는 거죠? 진짜죠? 저 진짜로 마십니다? 그래도 저 지옥 가는 거 아니죠?”


신부님이 킬킬 웃는다.


“무신론자라면서요?”

“아니, 신은 있다고 생각한다니깐. 종교에 뜻이 없는 거지! 그래서 저 지옥 가요, 안 가요?”

“글쎄요?”


그는 이 상황이 그저 웃긴 모양이다. 나는 울상을 되었다가, 일단 당장의 목숨부터 구하고 지옥 가는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다.


그래서 신부님이 내민 와인을 낚아채 뚜껑을 따서 단 두 모금 만에 모조리 마셔버렸다. 그 뒤에야, 신부님에게는 권하지 조차 않았다는 걸 깨달았고, 쭈뼛쭈뼛 빈 와인병을 돌려주며(그 와중에 쓰레기마저 그에게 맡겼다니……!) 웅얼웅얼 사과했다.


“미안해요, 신부님.”


신부님은 고개를 저었다.


“난 괜찮아요.”


그는 정말로 신부님이 맞았다(?).


텅 빈 뱃속에 들어간 와인은 순식간에 취기로 변했다. 그리스도의 성스러운 피가 나의 혈관을 질주하기 시작하자 호랑이 기운이 솟아난다. 갑자기 온 세상이 총천연색으로 선연하게 빛나며, 별안간 나는 무적이 되고야 만다.


“신부님, 이제 출발합시다!”


그렇게 분연히 자리를 떨치고 일어서자, 바닥은 출렁출렁 들판은 산들산들 춤춘다.


기분, 최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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