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라피스 라즐리 - 2
3일 동안 숙소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둘째 날, 체류 비자를 얻기 위해 하는 수 없이 이민국 사무소에 다녀온 걸 빼면 정말 한 발짝도 나가지 않았다.
하필이면 이민국 사무실의 위치가 가이드북 책자에 명시됐던 자리에서 이전하는 바람에 땡볕 밑을 한참 헤맸다. 카트만두는 습하진 않았지만, 볕이 몹시도 따가웠다. 여하간 카트만두의 인상은 나날이 최악으로 치닫고 있었다.
아침엔 가든 하우스의 정원에서 식사를 때우고, 옥상의 의자에 앉아 카트만두 시가지를 구경하다가 낮잠을 잤다. 자고 일어나면 저녁때가 되었다. 그러면 숙소에서 TV를 보며 여행자들과 몇 마디 잡담을 나누고, 저녁을 먹은 뒤 다시 잤다.
이러기를 4일째. 6시쯤 일어나 랩톱을 켜는 내게 마두가 다가와 물었다.
“재인은 왜 외출을 안 해요? 카트만두, 별로예요?”
마두는 송아지를 닮은 눈과 숯검정 눈썹을 씰룩이며 물었다. 나는 마두를 빤히 보다가 대답했다.
“여행이 길어서 좀 지쳤거든요. 한동안은 아무것도 안 하고 쉴 거예요.”
이곳에 이미 오만 정이 다 떨어졌다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입에 담기도 싫은 일이기도 했고, 어쨌든 카트만두는 마두가 살고 있는 터전일 테니까.
“여행이 길었어요? 카트만두가 처음이 아닌가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중국에서부터 라오스와 태국을 거쳐 왔어요.”
원래도 큰 마두의 눈이 더 커진다.
“거기서 여기까지 왔다고요? 어떻게?”
“뭐…… 배도 타고, 버스도 타고, 기차도 타고, 비행기도 타고. 그러고 보니 안 타본 게 없네.”
“굉장하네요. 설마 혼자서?”
“네.”
마두는 호기심으로 눈을 번쩍이며 물었다.
“네팔에는 얼마나 있을 예정이에요?”
“글쎄요.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그렇군요.”
마두는 아주 재밌는 걸 봤다는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더니 곧 제 할 일을 하러 갔다.
저녁이 되어 로비로 내려왔을 때, 나는 난데없는 질문공세에 시달렸다. 로비의 테이블 하나에 모여 앉아있던 여행자들의 눈이 일제히 나를 향했다.
“혹시 그쪽이에요?”
뭐가?
엄청나게 큰 키의 여자가 대뜸 말을 걸어온다. 키가 180cm에 육박하는 것 같다. 살면서 이 정도 큰 키의 여성을 실물로 보는 건 처음인 데다 박력이 굉장해서 그만 말문이 막혔다. 그녀는 짙은 검은색의 고수머리에 선이 또렷한 밤색 눈을 가진 서양인이다.
그녀의 이름은 카트리나. 애칭은 캣. 국적은 독일, 나이는 고교를 갓 마친 열아홉. 네팔에 와 있는 건 여행이 아니라 대학 진학 전의 자원봉사활동이 목적이었다.
“재인의 여행 이야기를 들려줘.”
기대 어린 눈으로 묻는 캣에게 나는 전래동화를 읽어주는 기분으로 그 간의 일들을 말해주었다.
“어째서 그런 여행을 하는 거야? 여행 블로거 뭐 그런 거?”
“아니.”
눈이 동그래진 캣이 또 무언가 물으려는데, 비슷한 또래의 금발 여자애가 로비로 들어오며 대화에 끼어든다.
“헤이, 캣.”
그녀를 발견한 캣이 활짝 웃으며 자리를 내주었다.
“어제 잔뜩 마셨나 보네?”
“응. 아직도 술이 안 깨.”
캣과 간단한 인사를 나눈 그녀는 로비 소파에 늘어져있더니 갑자기 히스테릭하게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난 어리둥절해서 캣에게 물었다.
“친구?”
“응. 샘이라고, 영국인. 나랑 같이 사원에서 승려들에게 영어를 가르쳐.”
“근데 왜 저래?”
“술이 덜 깼나 보지.”
“아니거든!”
듣고 있었나? 샘이 냅다 몸을 일으키며 외친다.
“그게 아니라 엊저녁 일 때문에 웃은 거야.”
“뭔데?” 캣이 물었다. 때마침 캣의 아침식사 - 과일과 요거트, 달걀 프라이와 토스트였다 -를 든 급사 소년이 왔다. 나는 치킨 커리와 라이스를 주문했다. 샘은 “진한 커피나 갖다 줘.” 라며 말을 이었다.
“어제 클럽에 갔거든. 캣 너도 알지? 타멜 구석에 처박혀 있는 클럽 말이야. 거길 갔는데 릴리가 엄청나게 취해서 몸을 못 가누더라고. 함께 같던 남자애들은 재미있어만 하고. 우린 도와줄까 하다가, 어차피 즐기러 간 거였으니 그냥 내버려 두고 마시기 시작했어. 그런데 조금 있다 보니까 일행 남자애들은 다 사라지고 없는 거야. 릴리는 현지인 남자들한테 빙 둘러싸여 있고. 옷이 반 이상이나 벗겨져서 진짜 엉망진창이었지.”
“데리고 나오지 그랬어!”
“당연하지. 그대로 있다가는 클럽에서 당하게 생겼는데. 취한 틈을 타서 여기저기 더듬어대는 놈들뿐이었어. 제일 먼저 뛰어든 건 롤라였고, 그 뒤로 나랑, 케이트랑, 마이클이 덤볐지. 꺼지라고 소리 지르고 롤라가 주먹을 휘두르는 동안 마이클과 케이트가 릴리를 부축했어. 정말 가관이더라. 가슴이 반이나 드러나고, 치마도 말려 올라가서 팬티가 다 보이는 거야.”
“그래서?”
“클럽에서 데리고 나온 다음에 릴리네 숙소에 데려다줬지. 그리고는 우리도 아침까지 거기서 맥주를 마셨는데, 걔가 새벽에 일어나더니 그러는 거야. 몸에 차고 있던 복대가 사라졌다고.”
“복대?”
캣이 놀라 되묻는다. 나도 놀랐다. 복대는 여행자에겐 생명줄이다. 보통 복대 안에는 여권과 비자, 여권사본을 비롯해 거액의 돈과 신용카드까지 넣어두니까.
“그렇다니까. 그 말에 우리도 술이 확 깨는 거야. 릴리는 복대가 없다고 소리를 꽥꽥 지르면서 숙소를 뛰어다니더니, 갑자기 화장실로 달려가선 위장까지 게워낼 기세로 토하더라고. 그걸 보니까 우리까지 속이 뒤집혀서 마이클은 앉은 바닥에 그대로 토했어. 순식간에 방 안이 토사물 냄새로 가득 찼지.”
“웩! 그만 말해! 나 아침 먹잖아!”
캣이 요거트 그릇을 거칠게 내려놓으며 짜증을 냈다. 나도 입맛이 싹 달아났다. 샘은 히죽거리며 막 가져온 커피를 홀짝홀짝 마셨다.
“생전 처음 보는 난장판이었어.”
샘의 이야기를 듣자니, 이곳에 도착한 첫날의 추행 사건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다른 이유로 질색한 얼굴을 하고 있던 캣이 내 안색을 살피며 말했다.
“미안. 아침부터 들을 이야기는 아닌데.”
“아, 괜찮아. 그거 때문이 아니니까.”
“그럼?”
“사실 여기 처음 도착한 날, 옷을 사러 갔다가 나도 추행이랑 지갑털이를 같이 당했어.”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캣이 아마도 욕인 듯한 독일어를 한바탕 쏟았다.
“어디의 어느 놈이야?”
이야기를 듣는 캣의 코에서 콧김이 씩씩이다.
“두 번 다시 그놈 물건을 못 쓰게 만들어주지 그랬어! 나 같으면 반은 죽였다!”
그녀의 발언을 설득력 있게 뒷받침해주는 캣의 훤칠한 장신이 부럽다.
샘이 말했다.
“여기 남자들이 서양 여성보다는 동양여성을 더 쉽게 보는 것 같더라. 서양 여성은 저쪽보다 키가 더 큰 사람도 많고, 그 자리에서 바로 욕부터 날리지만, 동양여성은 그런 일을 당하면 자리를 피해버리는 쪽을 택하는 일이 많으니까.”
샘은 그날의 나를 보기라도 한 사람 같다.
“어디야? 당장 가자! 내가 아주 작살내버릴게.”
캣이 씩씩거리며 말한다. 때마침 내 아침식사를 가져온 마두가 잔뜩 흥분한 캣을 보고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캣은 입을 막을 새도 없이 이야기를 줄줄 털어놨다.
이야기를 다 들은 마두도 화를 내며 캣과 같은 질문을 했다.
“그 옷가게가 어디죠?”
캣도 눈에서 광선을 뿜으며 날 쳐다본다. 난 당황해서 손을 내저었다.
“됐어요. 그 일은 더 들쑤시고 싶지 않아요. 이미 며칠 지난 일이고.”
“이대로 넘어가면 그놈이 또 그럴지도 모르잖아!”
“그 가게엔 두 번 다시 안 갈 거야.”
“너 말고 또 다른 여성에게 말이야! 이렇게 미지근하니까 당하는 거라고.”
캣이 혀를 찬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놈의 얼굴은 절대로 또 보고 싶지 않다. 이다음에 비슷한 일을 당하면 이젠 다른 대응을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게 지금은 아니다. 게다가 캣이 더 화를 내서 이쪽은 오히려 마음이 말랑말랑 해졌다.
“또 그런 일이 있으면 참지 마. 혼자가 무서우면 꼭 나한테 말하고.”
“알겠어. 그렇게 말해줘서 고마워, 캣.”
그제야 캣은 날 놓아주었다. 그러고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지, “지금 서점에 갈 건데, 같이 갈래?”라고 권하는 캣과 숙소를 나섰다.
그러고 보니 꼬박 나흘 만의 외출이다.
어릴 적엔 한 시간 가는 것이 한 세월이더니, 이젠 하루가 한 시간 같고, 한 달은 하루처럼 흐른다. 그렇게, 내가 카트만두에 온 지도 10여 일 가까이 지났다.
나는 별 계획 없이, 끼니때가 되면 식사를 하고 숙소의 여행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거나 책을 읽었다. 그게 질리면 밖으로 나가 타멜과 로컬 지역 구석구석을 쏘다녔다. 이곳에서의 체류 생활이 익숙해지니, 문득 여행 초의 일들이 떠올랐다. 중국에 갓 발 디뎠을 때만 해도 어쩔 줄 몰라 허둥거리기만 했는데, 어느새 이렇게나 여유가 생겼다. 그러기까지는 꽤나 마음고생을 했지만.
단기간에 생활환경이 휙휙 바뀌는 장기여행은 포기가 쉽지 않은 익숙함에 대한 도전이다. 익숙함의 중력은 정말 묵직해서, 영원히 정체하고 싶은 나의 게으르고 약한 일면을 자꾸 그리로 기울게 했다. 그러나 한국에서 멀어지고 싶다는 욕구도 제법 끈질겼다. 어찌나 끈질긴지, 어느 순간 나를 ‘낯섦’ 자체에 익숙해지게 만들 정도였으니까.
그렇다 해도, 타멜의 아수라장은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자욱한 매연과 흙먼지는 들이마실 때마다 새삼스럽게 괴로워서 도저히 참을 만 해지지 않았다. 차선과 인도의 구분을 바라는 건 사치였다. 아니, 애초에 보행자 도로를 조성하지 않은 곳이 태반이니 차선이라고 있을 리가.
길에는 사람과 자동차를 비롯하여 릭샤, 자전거, 수레, 소, 닭, 개, 고양이, 주먹 만 한 크기의 바퀴벌레까지 저 알아서 눈치껏 길을 내며 돌아다닌다. 오죽하면 현지인 중에서도 타멜의 혼란에 넌더리를 내는 사람들이 있을까.
나는 메인도로 중앙의 서점에서 책을 뒤적거리다가, 거리의 소음 때문에 집중을 못하고 결국 밖을 내다보았다. 슬슬 이 생활도 질린다. 예정대로라면 앞으로 10여 일을 더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만 짐을 싸서 포카라로 떠나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숙소로 돌아오니, 로비는 점심을 먹는 여행자들로 북적북적하다. 이들과도 한 달 가까이 얼굴을 맞대다 보니 이제는 식구처럼 가까워져 자주 같이 어울렸다. 몇몇과는 아침이나 점심을 함께 먹거나, 밤에 모여 앉아 TV에서 방영하는 인도 영화를 보며 맥주를 마셨다. 가장 가까워진 사람은 단연 캣이다.
“어디 다녀와?”
마두에게 또 부탁을 받았는지, 리셉션에 앉아서 책을 읽던 캣이 키를 주며 묻는다.
“서점에. 마두는 어디 가고 네가 앉아 있어?”
“세탁물 가지러.”
“아아. 베이커리에서 조각 케이크 좀 사 왔어. 같이 먹자.”
“좋지.”
요즘 타멜의 베이커리에서 내가 사 오는 케이크들은 대부분 이 친구들을 위한 것이다.
“꺄! 버터스카치 케이크!”
어느새 샘과 롤라가 와락 달려들어 포크를 쥔다.
롤라는 동남아계 프랑스인 혼혈로 이곳에 도착한 뒤 일주일 만에 얼굴을 텄다. 그녀는 바로 옆 게스트하우스에서 머물고 있는데 식사는 꼭 여기서 먹었다. 가든 하우스의 식사는 싸고 양 많고 맛있기로 정평이 나 있어서 젊은 여행자들에게 무척 인기가 좋다.
“맛 괜찮네. 어느 베이커리?”
롤라가 프랑스 억양이 강한 영어로 빠르게 묻는다.
“타멜에서 쭉 내려가다 보면 촉(Chwak) 지나서 바로 보여. 너도 알 거야. 저녁 8시 30분 넘으면 남은 빵들 50% 할인해서 파는 곳.”
“타멜 촉에도 하나 있던데. 거기 말고, 지나서?”
“응.”
“나도 가볼래!”
롤라는 어머니가 베트남인이지만, 태어나서 쭉 자라온 곳은 파리인 파리지엥이다.
“파리에 와본 적이 있다고?”
“스물한 살 때 한번. 배낭여행 도중이라 스치듯 잠깐 있었어.”
“뭐 하면서 지냈는데?”
“몽마르트르나 샹젤리제 주변을 쏘다녔지. 루브르나 오르셰 미술관도 가고. 그땐 그런 거 하려고 파리에 간 거니까. 에펠탑은 마지막 날에 갔었어.”
한참 파리에서의 이야기를 하는데, 마침 마두가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이제 막 세탁을 마친 옷들이 수북이 쌓여있었다.
“재인. 옷 가져가요.”
물 빠진 청바지에 딱 달라붙는 흰색 티셔츠가 트레이드마크인 그는 한결같이 친절하고 다정하며 무해하다.
“언제나 고마워요.”
“별말씀을.”
사람 좋게 웃던 마두가 뭔가 생각난 듯 말했다.
“참. 내일 즐거운 소식이 있을 거예요.”
“소식? 무슨?”
“비밀이에요.”
그렇게 말한 마두는 윙크를 하더니 숙소 대청소를 감독해야 한다며 자리를 떴다.
즐거운 소식?
난 잠시 혹했지만 곧 그 이야기를 잊어버렸다. 드디어 리셉션 카운터에서 벗어난 캣이 “오늘 저녁, 재즈 클럽에 안 갈래?”라고 청해 온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