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2. 라피스 라즐리 - 1

by 소라게

비행기 창 아래로, 히말라야가 우뚝 가라앉아있다. 기내식으로 나온 달밧을 우물거리다가 수저질이 멈췄다. 옆자리에 타고 있던 외국인이 “Excuse me.”하며 내 자리의 창으로 쑥 몸을 내밀더니 연신 카메라 셔터를 누른다.


강한 인도 억양의 영어로 히말라야의 위치를 안내하는 기장의 기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외국인이 반쯤 가린 창 너머의 히말라야는 흐릿하다. 만년설로 뒤덮인 봉우리는 뿌연 구름에 가려 실루엣만 어른거린다. 그다지 좋은 날씨는 아니다. 그래도 히말라야 구경에 여념이 없는 외국인은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한다. 연신 감탄사를 터뜨리는 그의 눈이 아이처럼 반짝인다.


솔직히 나는 히말라야고 뭐고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라오스를 벗어나 태국을 여행하는 내내 시달린 더위며, 쏭크란 축제에 휘말려 석회 가루를 뒤집어쓰고 다닌 일이며, 하루를 꼬박 방콕 공항의 불편한 벤치에서 보낸 다음이라 그저 피곤하기만 했다.


그로부터 20여 분 뒤, 로열 네팔 항공기는 카트만두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승객의 대부분은 인도인이어서 카트만두가 아닌 델리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긴 행렬을 따라 비행장에 내렸다. 붉은 벽돌로 낮게 지은 카트만두 공항은 어딘지 폐공장을 연상시켰다.

비행장에서 공항 청사까지는 셔틀버스를 탔다. 나를 포함한 외국인은 몇 되지 않았고, 극동아 출신의 여성 여행자는 달랑 나 하나다. 그래서인지 사람들의 시선이 따갑다.


나는 시골의 시외버스정류장 같은 공항 구석에 우두커니 멈춰 서서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공항 내부에는 ATM기가 없었다(내가 못 찾았을 수도 있지만). 30일짜리 비자를 취득하기엔 주머니에 남은 달러가 모자라다. 별 수 없다. 국제공항이라니까 당연히 ATM기 가 사방에 깔렸을 줄 알고 방콕에서 미리 돈을 인출해오지 않은 내 실수다. 이대로라면 라오스에 이어 또다시 밀입국자가 될 판이다.

방콕으로 되돌아가지 않으려면 어떡해야 할까. 방콕까지의 비행기 값도 문제지만 당장 돌아가는 비행기가 있기나 할까. 그보다 여기까지 와서 돌아가는 건 너무 웃기잖아.


"Any Problem?"


우두커니 서있는 날 발견한 공항 직원이 무전기를 쥔 채 다가와 묻는다.


"공항에 ATM기가 있나요?"

“ATM기요?”


직원은 ATM이라는 용어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래서 한참 사정을 설명하고 있자니, 그가 말한다.


“M카드가 있으면 그걸로 환전소에서 돈을 환전할 수 있습니다."

“내 카드는 V 밖에 없는데요?”

"노 프로블럼. 그럼 일단 트리플 비자를 발급할 수 있도록 도와주겠어요. ATM기라는 것은 아마 카트만두 시내로 들어가면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시내에서 돈을 인출하고, 3일 내에 이민국 사무소에 가서 여행 비자 신청을 하면 될 겁니다."


트리플 비자? 순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가이드북 한 구석에서 읽은 내용이 떠오른다. 네팔에서는 무료로 3일간 유효한 트리플 비자를 발급받을 수 있다.

나는 냉큼 고개를 끄덕였다. 남자는 나를 데리고 입국관리 데스크로 데려갔다.


“이 아가씨에게 트리플 비자를 발급해줘."


데스크에 앉아있던 젊은 청년은 몇 분 만에 여권에 트리플 비자 스티커를 붙이고 도장을 꽝 찍어 건네주었다. 나는 그들에게 거듭거듭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공항을 빠져나왔다.


공항 밖의 호객꾼들을 가까스로 떨쳐내고, 방콕에서 예약한 숙소의 픽업 택시 기사를 찾았다. 그는 무척 쾌활한 남자로, 숙소까지 가는 동안 한국에서 노동자로 일하는 네팔 사람들이 많다는 이야기를 시작하더니 언젠가 저도 가보고 싶다는 소망으로 끝을 맺었다. 뉴스에서 간간이 접하던 한국의 외국인 노동자 처우 실태가 떠올라, 난 어떤 말도 보탤 수 없어 잠자코 듣기만 했다.




숙소는 파크나졸 거리에 있었다. 파크나졸은 중심도로인 타멜 거리의 서쪽에 골목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이어져 있다. 숙소의 이름은 카트만두 가든 하우스였고, 도보로만 갈 수 있는 좁은 골목에 숨어 있다. 택시는 골목 입구에 정차했다.


골목은 좁고 한적한 평범한 주택가다. 안쪽으로 들어오자 바깥의 소음은 씻은 듯 사라진다. 포장이 엉성한 길에 하얗게 마른 개똥들이 여기저기 널려있다. 듬성듬성 털 빠진 개가 터덜터덜 뒤를 따라온다. 숙소는 골목 끝에서 갈라지는 샛길 오른쪽에 있었다. 길목에도 서너 채의 게스트하우스가 있어서, 나는 몇 번이나 간판을 확인했다.


가든 하우스의 입구는 높은 철제문이다. 잠겨 있지는 않다. 따라오던 개가 먼저 철문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간다. 몇 개 되지 않은 계단을 밟아 아래로 내려가니, 아늑한 정원이 나온다. 목재 테이블이 서너 개 놓여 있고, 정원은 건물 뒤까지 이어진다.


로비로 이어지는 계단 옆엔 작은 돌 불상과 소담한 연못이 있다. 연못에는 수련 몇 송이가 피었다. 나는 정원과 연못을 지나 데스크가 있는 1층 로비로 들어갔다.


로비는 리셉션 겸, 부설 식당과 독서와 TV를 즐길 수 있는 휴게실이다. 내부는 아기자기하다. 벽에는 수를 놓은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고, 장식용 방석과 쿠션이 놓인 테이블과 의자는 대체로 라탄 재질이다. 입구 옆의 벽면에는 이곳을 거쳐간 여행자들의 폴라로이드 사진이 수십 장 붙어 있다.


리셉션 데스크를 겸한 책장에는 여행자들이 놓고 가거나, 게스트하우스에서 직접 수집한 것으로 보이는 책들이 꽂혀 있다. 정원을 바라보는 벽은 전체가 접이식 유리문으로 어디든 열고 닫을 수 있다. 햇빛이 가득 들어오는 고요한 이곳이, 단번에 마음에 든다.


“뭘 도와드릴까요?”


리셉션의 청년은 내 또래의 젊은 네팔리다.


"어제 웹사이트로 예약한 사람인데요."

"이름이……?"


이름을 대자, 그는 예약 명부를 훑어보곤 빙긋 웃는다.


"따라오시죠. 저는 마두라고 합니다."


나는 앞장선 마두의 뒤를 따랐다.

마두가 나를 데려간 곳은 3층 객실이다. 건물이 높은 지대에 있기도 하지만, 카트만두 시내에 고층 건물이 거의 없어서, 객실 옆의 발코니에 서있는 것만으로 시내의 전경이 훤히 내다보인다. 객실은 깨끗한 더블베드와 작은 원목 테이블, 너른 창과 화장실이 옵션이다.

나는 마두에게 물었다.


"장기 체류할 건데, 객실 할인이 가능한가요?"


마두는 어깨를 으쓱했다.


"얼마나 머물 예정인가요?"

"한 달이요.”


마두는 곰곰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고, 우린 악수했다.


“당분간 잘 부탁해요.”

“저야말로.”







여장을 풀면서 가장 먼저 세탁부터 맡겼다. 카트만두는 전기와 물 사정이 좋지 않으니, 객실에서의 빨래는 삼가 달라고 미리 언질을 받았다. 나는 세탁물을 죄다 모아 봉투에 담아 마두에게 맡겼다(라오스와 태국을 여행하며 입었던 여름옷들은 태국을 떠나기 전에 미리 처분했다). 그러고 나니 갈아입을 옷은 달랑 한 벌뿐이다.


샤워 후, 화장실 거울에 나를 비춰봤다. 입고 있는 옷은 민소매 셔츠에 반바지다. 민소매라……. 이대로 나가도 될까? 네팔에서 여행자들이 조심해야 할 규정이 뭐였더라? 사원에 갈 때는 긴팔과 긴 바지를 착용해야 하며, 평소에도 지나친 노출은 삼가라고 했던 것 같다. 그럼 민소매는 지나친 노출인 걸까? 아닌 걸까?


사실 고민해봤자, 달리 입을 옷도 없긴 하다. 일단 이대로 나가서 분위기를 본 다음, 필요하다면 여기서 입을 옷을 사자.


마음을 정하고 숙소를 나와 큰 도로 건너편의 상점들 골목 사이를 쭉 통과했다. 마사지 숍과 구멍가게, 간이식당, 기념품 가게, 게스트하우스 등이 늘어선 골목을 빠져나오니 곧바로 타멜Thamel이 시작된다.


완연히 시끄러워진 경적소리, 가게에서 흘러나오는 낯선 음악들, 차선이 있긴 한 걸까 싶은 도로와 북적거리는 이국의 얼굴들, 그만큼이나 다양한 색감으로 펄럭이며 허공을 가득 메운 만국기…….


빛, 색, 냄새, 사람, 동물, 차와 각양각색의 건물들. 여기는 온갖 것이 뒤섞인 아수라장이다. 도로변 곳곳의 불법 복제 CD 숍에서 광광 울리는 ‘옴마니 반메 홈’은 릭샤꾼과 장사꾼 흥정의 요란한 배경음악이 된다. 소똥, 개똥, 벌레의 시체와 그 밖의 기타 등등이 짓이겨진 거리를 걷자니 혼이 쏙 빠진다.


릭샤꾼들이 “마담, 릭샤?”라며 묻고 지나가고, 호기심에 찬 현지인들은 공연히 말을 걸어온다. 그들은 온갖 언어에 능했는데, 내가 알아들은 것만도 7개 국어다.

나마스떼, 곤니찌와., 헬로, 니하오, 구텐 탁, 봉수아, 안녕하세요……


타멜의 메인도로를 끝에서 끝까지 걸었다. 어지럽게 뻗은 골목 탐험은 후일의 즐거움으로 남겨두었다. 밤 10시가 가까워오니 피곤이 어깨를 내리찍는다. 어서 옷을 사고 돌아가야겠다 싶어, 마침 눈에 띈 옷가게로 들어섰다.


가게 주인은 보이지 않는다. 나는 주인이 나타나길 기다리며 옷을 구경했다. 그렇게 한참이나 옷들을 뒤적거리는데, 가게 안쪽에서 주인으로 보이는 남자가 나온다. 콧수염을 길러 나이를 짐작하기 어려운 땅딸막한 그는, 어딘지 인도인 같은 느낌이 더 강하다.


“나마스떼.”

“옷이 몇 벌 필요한데요.”

“마음껏 골라보세요.”


먼저 골라둔 서너 벌을 들고 거울 앞에 섰다. 대충 몸에 대보고 맞으면 살 생각이었다. 그런데 막상 대봐도 잘 모르겠다. 옷에 달린 사이즈 태그들이 상품 정보와는 아주 상관이 없어 보였다. 아동복인가 싶을 만큼 터무니없이 작은 옷들이 성인복 사이에 버젓이 끼어있으니까. 하지만 가게에 탈의실은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입고 있는 민소매 원피스 위에 첫 번째 옷을 겹쳐 입었다. 그것 역시 푸른색 민소매 원피스로 허리와 치마 아랫단, 가슴과 복부에 아름다운 무늬가 수놓아져 있다. 사이즈도, 맵시도 꼭 맞다. 주인은 500루피를 불렀지만 250루피로 깎았다. 그다음 옷은 보라색 판초. 일교차가 큰 곳이라 이런 옷이 한 벌쯤은 필요할 것 같다. 그다음은 티셔츠, 그다음은 치마.


“도와드릴까요?”


새로운 셔츠를 집어 든 내게 남자가 묻는다. 나는 의아했다. 굳이 남의 도움이 필요한 정도로 까다로운 옷이 아닌데? 단추가 있긴 하지만 앞에 달려서 혼자 얼마든지 입을 수 있다.

그러나 호의를 거절하기가 좀 그래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그의 도움으로 옷을 입으면서 자꾸만 이상한 느낌이 든다. 드러난 팔을 스치는 그의 손끝이 께름칙하다. 무어라 딱 잘라 말하기 어려운 불쾌감이 스멀스멀 차오른다.


이건 성추행인가?

나는 지금 추행을 당하고 있나?


나는 그가 알아채지 못하도록 살짝 물러나며 곁눈으로 밖을 살폈다. 거리는 텅 비어 있다. 방금 전만 해도 문을 열었던 주변 상점 대부분이 셔터를 내렸다. 언제 이렇게 거리가 어두워졌지? 옷을 고르느라 어지간히도 정신이 팔렸던 건가. 그때다. 남자가 벌려둔 거리를 불쑥 좁히며 다가선다.


그는 “단추 채워드릴게요.” 라더니 거절할 틈도 없이 가슴께의 단추를 직접 잠그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손끝이 가슴에 닿았을 때, 나는 확실한 이게 대체 뭐하는 짓거린지 확실히 답을 내릴 수 있었다.


“됐어요! 내가 해요.”


멀찍이 물러서 재빨리 단추를 채웠다. 당장 여길 나가고 싶다. 그러나 가게 탁자에는 내가 입어본 옷들이 수북이 쌓여 있다. 저렇게 헤집어 놓고서 아무것도 사지 않고 나갔다간 왠지 더 큰일이 벌어질 것 같다.

그럼 어떡하지? 갑작스러운 혼란으로 머리가 어지럽다. 이제 거리에는 사람이 거의 없다. 어둠에 잠기기 시작한 타멜이 거대한 아귀를 벌린 공포로 다가온다. 내가 여기서 소리치면 도와주러 올 사람은 대부분 주변 상인들일 텐데, 여기 사람들이니 이 남자와 잘 아는 사이겠지.


일이 더 잘못되면 어쩌지? 내겐 몸을 지킬만한 무기나 기술도 없는데. 여기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어떻게든 이 자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빠져나가는 것뿐이다. 나는 옷 무더기에서 집히는 대로 대충 골라 가격을 물었다.


“얼마죠?”


남자가 노골적으로 아쉬운 표정을 짓는다.


“아직 입어보지 않은 옷들이 있잖아요.”

“됐어요. 이걸로 충분해요.”

“잠깐만요. 이건 정말 마음에 들 겁니다. 한 벌만 더 입어 봐요.”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내가 고르지도 않은 옷더미를 뒤적인 놈이 옷 한 벌을 쥐고 돌아와 내민다. 그걸 보자 피가 싹 빠지는 느낌이다. 옷은 가슴과 등이 확 파이고, 안쪽이 비치는 손바닥만 한 새빨간 터틀넥 탑이다. 안 입는 니만 못해서, 대체 이런 옷을 왜 만든 건지 싶어질 정도다. 그리고 옷도 옷인데, 대체 뭐지, 이놈은? 이렇게까지 뻔하다고?


미친놈, 너나 실컷 입어라.


난 지갑에서 1000루피 지폐를 꺼내 탁자에 올려놓았다. 흥정은 생각지도 않는다. 이곳에서 천 루피면 결코 적은 돈이 아니라 생각하니 기분이 한층 더 더럽지만, 그래도 내 안전은 돈으로 따질 수 없다. 그 와중에도 남자는 계산기를 두드리며 자꾸만 옆으로 달라붙는다.


당장 사타구니를 차 버릴까? 그런데 가뜩이나 운동치인 내가 급소를 비껴서 엉뚱한 곳을 찼다간 공연히 화만 돋우는 거 아닐까?


온갖 가정과 분노와 불안으로 혼미한 채, 계산을 마치자마자 거스름돈은 세보지도 않고 가게를 빠져나왔다. 남자가 가게 앞까지 배웅을 나온 것 같았는데, 당연히 쳐다보지도 않고 그대로 타멜 거리를 벗어났다.


기막힌 일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주머니에 대강 쑤셔 넣은 잔돈을 제대로 넣으려고 지갑을 꺼내서 열어본 순간 헛웃음이 터졌다. 지갑 속에는 달랑 10루피짜리 지폐만 몇 장 남아있었다. 100루피 이상은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내가 당황한 사이 잠시 옆에 놔두었던 지갑에서 그 쓰레기가 그새 돈을 훔쳐간 것이다.


이거야 고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네팔에 오기로 한 결정한 나, 과연 잘한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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