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구름에 달 가듯이? - 4
다음날 숙소 주인에게서 버스 티켓을 받았다. 나는 카운터 옆에 붙어있는 여행자를 위한 작은 서가에 둥지를 틀고 앉아 종일 만화책을 읽었다. 번역된 일본 만화가 많았는데 주로 케케묵은 추억의 만화(슬램덩크나 원피스 등)였다.
저녁쯤 되니, 볼만 한 만화책도 바닥났다. 그래서 이번에는 태국과 관련된 책자를 뒤졌다. 가이드북 두어 권을 찾긴 했는데, 모두 발행 연도가 1990년대다. 딱 1990년대 스타일(왠지 정겹다)로 촬영된 가이드북 사진들만 훑어보다가 도로 책장에 꽂았다. 셋째 날은 기다란 바게트 샌드위치를 사서 씹고 다니며 산책을 하거나 사원을 들렀다.
그렇게 떠나는 날이 되었다. 체크아웃 후, 8시 30분 즈음 숙소 앞에 도착한 픽업트럭에 올라타니, 먼저 타고 있던 여행자들이 인사를 건넨다. 승객 중 한 명인 런던 출신의 피터는 강한 코크니 악센트로 카오산의 쏭크란에 대한 경험담과 올해 축제에 대한 기대에 대해 가는 내내 줄기차게 떠들었다.
라오스와 태국을 잇는 우정의 다리에 도착한 건 오후 6시쯤이었다. 에어컨 온도가 몹시 낮아 얼어 죽기 일보직전이었다. 나는 할렐루야를 외치며 냉큼 버스에서 내렸다. 뒤따라 내린 피터가 출입국 관리소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가리키며 말했다.
"얼른 하고 떠납시다."
나는 여권을 쥔 채 순서를 기다렸다. 생각보다 차례는 금방 돌아왔다. 조그만 창구 앞에 선 나는 안쪽의 관리소 직원에게 여권을 건넸다. 그가 여권을 팔락팔락 넘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러더니 다시 거꾸로 훑는다. 그러기를 두어 번? 아무 생각 없이 창구 앞에 서있던 나는 미묘하게 변하는 직원의 표정을 보고 어쩐지 등골이 서늘해졌다. 결국 그가 날 보며 물었다.
"입국 도장을 어디다 찍은 거죠?"
입국 도장? 뭔 소리야. 입국 도장이 없다니?
"비자 위에 찍혀 있을 텐데요. 여기요."
나는 비자에 찍힌 도장을 손가락으로 짚었다. 직원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건 영사가 찍은 발급 확인 도장이고요.”
순간 발밑으로 피가 쑥 빠져나간다. 직원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일단 들어오세요."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뒷사람들에게서 웅성임이 인다. 나는 바싹 마른 입술에 침을 묻혀가며 직원을 따라 관리소 사무실로 들어섰다.
관리소 사무실 안은 아무 특징이 없어서 오히려 철저히 사무실 소파 다운 소파와 철제 데스크가 여럿 놓여 있다. TV 앞에 옹기종기 앉아 쏭크란 뉴스를 보며 맥주를 마시던 직원들의 시선이 일제히 내게 쏠렸다.
직원이 날 안내한 곳은 관리소장의 사무실이었다. 관리소장이 날 향해 강한 동남아 억양의 영어로 뭐라고 말했는데, 너무 당황해서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그가 재차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입국한 겁니까?"
"보텐에서요."
"그곳에서 입국 도장을 안 받은 거 같은데."
내 여권을 꼼꼼히 훑어본 소장의 말을 듣자, 당시의 일이 주마등처럼 머리를 스친다. 라오스와 중국의 육로 국경 중 한 곳인 보텐의 허름한 출입국사무소…… 마치 낡은 공사장 외벽에 벽돌을 대충 쌓아 회칠을 한 것처럼 보이던 그곳으로 우글우글 몰려들던 입국자들……
출입국 사무소라 함은 국제공항이나 항구의 여객터미널, 유럽을 횡단하는 유럽 열차 내부의 약식 여권 검사밖에 경험한 적 없는 내게 그곳은 그야말로 혼돈의 도가니였다.
출입국 관리소가 그렇게나 시장 바닥 같아질 수 있다는(실은 그보다 더했지만) 사실은 그때 처음 알았다. 더욱이 에어컨은커녕 선풍기도 넉넉히 구비되지 않은 건물 속에서 찜통더위에 시달리다 혼미한 정신으로 여권을 내밀자, 받아 든 직원은 그걸로 뭔가 하는 것 같더니 내게 출입국카드와 함께 다시 현지어인 듯한 말로 무어라 하며 돌려줬었다.
여기까지 떠올렸을 때 깨달았다. 당시 나는 당연히 여권에 도장을 찍고 돌려주었으리라 생각하고 그냥 버스에 올라타 버렸다는 걸. 그가 내게 했던 현지어 몇 마디가 워낙 짧아 그리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실은 아마 대단히 중요했을 내용이라는 것도(이 글을 쓰는 현재까지도 그 내용이 정확히 무엇이었을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이건 진짜 큰일이다. 체코에서 독일로 넘어갈 때 숙소에 여권을 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챘고, 결국 출입국 관리소의 유치장에 갇혔다던 친구(결국 다시 독일로 돌려보내 졌다) 이야기가 불쑥 떠오르며 눈앞이 아득해진다.
하지만 그 고작 수 초의 찰나, 두뇌가 풀 스피드로 회전한다. 절대로 이대로 철장 안에 갇힐 순 없다! 무슨 일을 당할 줄 알고! 그렇다면 대체 어떻게 이 난관을 헤쳐나가지?
어떻게 헤쳐나가긴. 우겨야지.
마음을 정한 나는 한껏 뻔뻔해지기로 했다. 어차피 비자 없이 들어온 것도 아니고, 내 여권에는 체류 일수를 보장하는 비자(사실 관광비자가 허락하는 최대 일수까지 머물렀기 때문에, 하루만 더 늦었으면 명실상부한 불법체류자가 됐을 것이다)가 떡하니 붙어 있다. 그래서 그것만 믿고 가보기로 한다.
돛데기 시장이나 다름없어 밀입국자가 매일 한 다스쯤 나와도 전혀 이상할 것 같지 않던 보텐의 사정을 부디 이 관리소장이 알고 있길 바라며……
나는 얼빠 져 있던 얼굴을 다리미가 지나간 자리처럼 반듯이 폈다. 그리고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무고하고 무해한 피해자의 얼굴을 해 보였다.
"그럴 리가요. 저는 그때 분명 직원에게 여권과 입국 카드를 줬는걸요."
"정말입니까? 확실히, 직원에게 여권을 줬어요?"
소장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이제 몹시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다. (죄송합니다. 보텐의 그 직원분.)
"당연하죠. 직원의 손에 넘겨주고, 그 뒤에 받았어요. 비자도 다 받아놨는데 여권을 안 줄 이유가 없잖아요.”
여권에 붙은 반짝반짝한 내 관광비자(말 그대로 진짜 반짝반짝하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라오스의 관광비자는 굉장히 화려하다)를 뚫어지게 보던 소장의 표정이 살짝 풀어진다.
"그럼 대체 왜 도장이 안 찍혔을까?”
“글쎄요??”
속은 바작바작 타들어가고 있었지만, 최대한 순진해 보일(?) 얼굴로 되물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여권에 도장 찍기가 제 직업은 아니잖아요."
‘실은 이쪽이야말로 곤란하다’는 분위기를 풀풀 풍기며 어깨를 으쓱했다. (진짜로 진짜로 죄송합니다, 직원분……) 그러자 소장의 표정이 완전히 풀리더니, 이번에는 무척이나 미안해한다.
내 딴에는 태어나서 해 본 가장 큰 스케일의 거짓말이라 양심이 난리가 났다. 그렇지만 내 양심 좀 편하자고 유치장 신세를 질 순 없다.
"저, 지금 큰일 난 거예요?"
나는 의자에 앉은 채로 빤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왕이면 눈가가 촉촉해 보이길 바라면서. 그런 내 시선을 받은 소장이 문득 다가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실패인가?! 이대로 유치장에 갇히고 마나?
"밖에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어요."
"네에?"
겁에 질려 그만 목소리가 갈라진다. 하지만 소장은 TV로 쏭크란 생중계를 보고 있던 직원들에게 나를 인계하더니 말했다.
"제가 해결해오지요!"
그렇게 말하곤 쓱 자리를 비운다. 직원들 사이에 덩그마니 남겨진 나는 어리둥절했다. 그때 직원들이 유쾌하게 웃으며 접이식 의자를 가져와 나를 앉혔다.
"걱정 말아요. 아가씨는 여기서 맥주나 마시고 있어요.”
한 직원이 캔으로 된 비어라오를 손에 쥐어준다. 맥주가 손에 쥐어지자, 물색없이 긴장이 확 풀린다. 그런 날 본 직원들이 안심하라는 듯 씩 웃는다.
"건배합시다, 건배!"
우람한 덩치의 직원이 호탕하게 외친다. 그러자 다른 직원들의 맥주 캔이 한꺼번에 공중에서 부딪힌다.
"건배!"
옆 사람 두엇이 내 캔에 자신의 맥주캔을 부딪혀온다. 그래서 얼떨결에 나도 건배에 가세했다. 캉, 하고 캔끼리 부딪히는 소리가 경쾌하다. 그것을 시작으로, 나 때문에 잠시 끊겼던 사무실의 작은 맥주 파티가 재개된다.
소장을 기다리는 동안, 직원들은 내 맥주가 떨어지지 않도록 신경 써주었다. 안주거리도 자꾸 이쪽으로 밀어준다. 주는 대로 먹고 마시던 나는 생각난 것이 있어, 배낭을 뒤적여 뭔가를 꺼냈다. 싫다는 데도 엄마가 기어이 쑤셔 넣으신 홍삼 절편 세트다. 물론 나는 여태 입도 대지 않았다.
달달하고 먹기 좋은 홍삼세트를 개봉하고서 한국의 대표적인 건강식품이라고 설명했다. 직원 두엇이 바로 알아보고 주변인들에게 자세히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뭔가 싶어 들여다보던 직원들이 순간 우르르 달려들어 너 나할 것 없이 하나씩 가져가 뜯는다. 그때였다. 라오스 비자 위에 'used' 도장이 찍힌 여권을 든 소장이 돌아왔다. 그는 개운한 미소로 내게 여권을 되돌려주었다.
"정말 너무 감사합니다."
소장은 ‘노 프라블럼’이라고 대꾸했다. 한 직원이 물병을 집어 들며 말했다.
“네팔까지 간다고 했지요?"
"네."
"축복해 드리지요. 이건 우리식 축복을 비는 인사입니다.”
그는 내 머리 위로 물을 조금씩 흘려보내며 외었다.
"사바이디 피마이."
다른 사람들도 잇따라 "사바이디 피마이." 축복을 빈다.
사바이디 피마이.
여신의 축복을 기원하는 라오스의 새해인사.
이상하게도, 하마터면 유치장에 갇힐 뻔한 이곳에서 한국을 떠나온 후 가장 평온한 마음이 든다. 한국에서도 흔히 나누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라는 인사가 정말로 가슴에 스미는 것은 처음이다.
저들의 기원대로 앞으로의 나의 여정 어디에든 신의 축복이 깃들 것만 같다(이미 불법체류자가 될 뻔한 상태를 면한 것부터가 축복이긴 하다).
사무실을 나오는 내 품엔 6개들이 맥주 번들이 3팩이나 들려 있었다. 관리소 출입구 앞에는 뜻밖의 인물이 날 기다리고 있었다. 피터였다.
그는 맥주 번들을 품에 앉고 나오는 날 보고 황당한 얼굴을 했다.
"뭔가 잘못된 거 아니었어요? 그런 줄 알고 다들 걱정하고 있는데……"
나는 그에게 번들 하나를 건넸다.
“일단 버스로 갑시다."
얼떨떨한 얼굴이던 그는 맥주를 받자 곧 아무래도 좋다는 표정이 됐다. 버스로 돌아가니, 승객들 모두가 목을 쭉 뺀 채 나를 보고 있었다.
전부 착석한 걸 보니, 나 때문에 버스가 출발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미안한 마음으로 선물 받은 맥주를 주변 좌석에 앉은 승객들에게 하나씩 돌렸다. 피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무슨 일이냐고 묻길래, 간단히 자초지종을 설명하자 모두 놀라는 눈치다. 피터가 날 럭키걸이라 부르자, 승객들까지 나를 럭키걸이라 불러댔다.
버스는 곧 출발했다.
(또) 한국을 떠나오기 까지, 나는 제법 여러 일을 전전했다.
중2 때부터 작가가 되고 싶다는 포부를 품었지만, 작가의 꿈을 가진 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 일이 쉽게 풀릴 리 없었다. 도중에 한눈도 여러 번 팔았다.
독립영화 촬영장에서 연출부와 촬영팀 일을 하기도 했으며, 생활비를 벌기 위해 방송국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다. 그것도 여의치 않을 때에는 평범한 이런저런 아르바이트(식당 서빙 혹은 피시방 알바 등등)를 하기도 했고, 심지어 관광버스를 타고서 해외 단체관광객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사진을 찍어서 파는 일도 했다.
그러면서 오만 인간 군상을 만났다. 업계에서 나름 유명한 영화인들과 술자리를 하기도 했고, 그러다가 아빠보다 나이 많은 남성에게 대가성 교제를 제안당하고 진저리를 치기도 했다.
쥐뿔도 없으면서 으스대는 인간과 부딪치고, 능력은 뛰어난데 저 밖에 모르는 이기심 덩어리와 싸우기도 했다. 좋은 이는 드물었다. 말이 통하고 뜻까지 맞는 사람은 가뭄에 나는 콩보다 더 귀했다. 그렇게 이십 대 중반을 지나고 있었다.
애초에 대학 진학의 의지가 없었지만, 부모님 성화에 못 이겨 스물 하나에 억지로 들어간 대학은 2년도 채 못 다니고 도중에 때려치웠다. 정신적인 한계에 물리거든 몸이 고된 아르바이트로 경비를 모아 도망치듯 한국 밖으로 배낭여행을 떠났다.
부모님은 왜 그렇게 유난을 떠느냐며 내가 적당히 현실과 타협하길 원했다. 그럴수록 나는 청개구리처럼 더 버티며 나 밖에 모른다는 비난을 꿀꺽꿀꺽 삼켰다. 딱히 명확히 대안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쓰고 또 쓰고, 두드리고 또 두드려볼 뿐.
하나 다행인 점은, 나는 실패에 제법 무던한 편이라는 것. 그러니 될 때까지 해보면 어떻게든 될 거다 라는 것이 20대 중반까지의 내 태도였다.
그리고 내내 그럴 수 있을 줄 알았다.
무엇에든 임계점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조용하지만 반드시 찾아온다.
나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처음에는 소설 이외의 다른 형태를 몰라 소설을 썼고, 그러다가 시나리오라는 장르를 알게 되어 그 분야로 파고들었다. 장르는 아무래도 좋았다. 내가 가진 이야깃거리를 가장 잘 소화할 수 있기만 하다면.
하지만 쓰기는 쓸수록 어렵고 언어는 다룰수록 복잡 미묘해졌다. 꿈은 다가가려는 만큼 멀어지고, 이쪽이 간절히 원하는 그 이상으로 차갑게 등을 돌리는 것 같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실체가 없는 환영을 좇아 바닥 없는 수렁을 헤매는 것만 같았다.
더욱이 현실은 어떤 트랙에서든 달리기를 멈추지 않을 것을 끊임없이 종용했다. 집에만 틀어박혀 글을 쓰고 싶었으나, 생계를 생각하면 결코 그럴 수 없었다. 원하는 일에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으니, 다른 뭔가라도 해서(그러니까 돈을 버는 데에는 지장이 없음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내 존재를 증명하려는 압박에 시달렸다.
욕망과 가난 모두 능숙히 감당하기에 나는 많이 서툴렀다. 생활비는 항상 빠듯했다. 집필 시간이 보장되어야 하니 아르바이트에만 매달릴 순 없었다고, 부모님께 손 벌리지 않고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달이 얼마 되지 않았다.
부모님은 돈을 보내며 아무 말씀 없으셨지만, 그 침묵이야말로 가장 존재감이 컸다. 자립할 능력도 없으면서 꿈을 좇는 자신에 대한 환멸은 알게 모르게 내 안에서 점점 부피를 늘려나갔다. 나 자신 외에는 믿을 구석이 없는 나에게 이것은 너무나도 두려운 위협이었다.
그러다가 끝내 임계점을 넘는 순간이 찾아왔다. 희망과 절망을 전부 닮은 모습으로.
본분을 잊으면 끝이라는 절박함에 쫓겨 완성한 장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는 제법 권위 있는 공모전 최종심까지 올랐지만 결국 떨어졌다. 내 작품이 최종심에 올랐다는 메일을 받았을 때 원하던 꿈의 고지까지 딱 한 걸음 남았다며 한껏 부풀었던 마음은 빠르게 쪼그라들었다.
당선됐을 경우 받은 상금으로 당분간 글쓰기에만 몰두하겠다고, 다음 작품은 이런 걸 쓰겠노라 생각해두었던 모든 계획은 고스란히 물거품이 됐다. 어두컴컴하고 가파르고 끝이 어딘지도 모르겠는 그 계단을 다시 처음부터 올라야 한다는 생각이 들자, 온몸에서 힘이 탁 놓였다.
무엇이든 여기서 더 해나갈 힘이 사라졌다. 그것이 작년 연말의 일이었고, 나는 지독하게 무기력해졌다. 일어나긴커녕 씻기조차 싫었다. 심지어 독감 예방주사를 맞지 않아도 생전 걸리지 않던 유행성 독감과 급성 인후염에 걸렸다. 성대 아래쪽이 숨을 쉴 때마다 사포로 문질러지는 것처럼 따갑고 쓰라렸다.
타고난 건강체라 수년간 문턱 한 번 밟아본 적 없던 병원 입원실 침대에 누워 링거를 맞는 순간, 나는 내가 완전히 지쳤음을 인정했다. 인정이 있은 후에는 지병처럼 도지던 나의 또 다른 욕구가 맹렬히 고개를 들었다.
바로, 떠나기 병이.
네팔행은 그렇게 결정됐다. 한국에 있기는 싫었다. 나를 모르고, 모국어가 통하지 않아 누군가 나의 언어를 알아들을 수도, 내가 타인의 언어를 알아들을 필요도 없는… 그러면서 동시에 한 달 생활비는 크게 고민하지 않아도 되는 어딘가로 떠나 있고 싶었다.
그 전 배낭여행은 길어야 2달을 넘기지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배낭여행이 아닌 체류에 방점을 찍었다. 그래서 관광비자 연장만으로 최장 기간 머물 수 있는 곳 중, 앞에서 말한 조건에 부합하면서 끌리는 곳을 찾다가 발견한 곳이 네팔이었다.
그렇게 네팔행을 떠올린 지 2달 여 만에,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여행 목적지 후보에 둔 적 없던 라오스를 떠나 방콕으로 향하는 버스에 앉아있었다.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초등학교 입학 준비물이었던 스케치북 뒷장에, 아빠가 내 이름과 함께 휘갈겼던 박목월 시인의 '나그네'.
아빠는 어째서 그 시를 쓰셨던 걸까? 그 시를 갓 초등학교 입학하는 첫딸의 스케치북 뒷장에 쓰실 때에는 어떤 마음이셨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