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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라게 Jul 30.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2. 마법의 밤 - 4



걷는 동안 자꾸 신부님의 새 등산화에 시선이 간다. 걱정이다. 과연 저걸 신고 잘 걸을 수 있을까. 발과 신이 서로에게 길들여지려면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까?


중국집은 아직 문을 열기 전이다. 굳게 닫힌 유리문에는 오픈 타임과 클로징 타임을 적은 A4용지 한 장이 붙어 있다. 오후의 오픈 시간까지는 한 시간 반 정도 남아있다. 우린 숙소에서 마실 와인과 안주, 내일 걷다가 먹을 식량을 산 다음 중국집 옆의 펍에서 맥주를 마셨다.


중국집이 문 여는 순간만 노리고 있었으니, 식당의 오늘 첫 손님은 당연히 우리다. 우린 착석하기 바쁘게 마음껏 코스 요리를 주문했다. 테이블 하나 가득 차려진 요리는 기름지고 훌륭하다. 매운 탕면에선 제법 한국식 짬뽕 맛이 난다. 다들 말을 잊고 먹기 바쁘다.


30분 만에 코스를 몽땅 해치운 우린 이번엔 와인 타령을 하며 식당을 나왔다. 부른 배를 꺼트리며 부르고스 시내를 어슬렁거리다가 알베르게로 돌아갔다. 그리고 알베르게 인근 공원 벤치에 와인을 벌여놓고 앉았다. 소등 시간까지 1시간도 채 남지 않았다. 가지고 온 와인은 총 3병이니, 내일 짐을 늘이지 않기 위해서(…)라도 40여 분 안에 이것들을 모두 없애야(?) 한다. 우린 가까이 있던 다이앤과 자넷을 불러 잔을 쥐어주었고, 첫 잔은 원샷으로 넘겼다.


“와인을 무슨 맥주처럼 원샷하고 그래요.”


다이앤이 피식피식 웃는다.


“아무렴 어때요. 마시고 좋으면 그만이죠.”


신부님이 말했다.


“난 내일 버스로 리온에 가요.”


다이앤의 말에, 우리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다.


“왜요? 완주하지 않으십니까?”


신부님이 묻자, 다이앤은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그럴 생각이었는데, 솔직히 지금 컨디션이 엉망이에요. 들떠서 무리를 했는지 무릎에 심각한 이상이 생겼거든요.”

“그럼 자넷은요?”

“난 계속 걸을 생각이에요.”


난 오랜 친구 사이라는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다이앤은 운동으로 다져진 호리호리한 체형이고, 자넷은 키가 작고 체격이 큰 편이라 두 사람 중에서 무릎이 망가지는 사람이 나온다면 분명 자넷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편견이었나. 시원시원하게 걷던 다이앤이 먼저 포기를 선언할 줄은 몰랐다.


“부디 몸조리 잘하시고, 또 만나면 좋겠군요.”


신부님의 말에 다이앤이 한쪽 눈을 찡긋 했다.


“혹시 알아요? 여러분이 더 힘내면 산티아고에서 또 만날 수 있을지.”

“그럴까요?”


신부님은 기분 좋게 하하 웃었지만, 나는 조금도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하루 20km~30km를 걷는 지금도 벅찬데, 이보다 더 걷는다고? 차라리 날 죽여라. 이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갑자기 숨통을 죄어오는 것 같다. 그렇게 혼자만 심경이 복잡해져 있는데, 자넷이 물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셋이서 걷는 거죠?”

“그렇죠. 이왕 왔으니 끝까지 함께 가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나는 그만 입을 떡 벌렸다.  적당히 때를 봐서 내일부터 따로 가겠다는 말을 하려고 했는데, 그 말을 꺼냈다간 분위기가 오묘해지게 생겼다. 이수는 어떤 생각이려나 싶어 그쪽을 보았지만,  녀석은 아무 생각 없는 얼굴로 멀뚱히 와인잔만 들이켜고 있다.


이제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을 수도 없고, 그렇다고 함께 하하호호할 기분도 아니어서 적당한 핑계를 대고 자리를 피했다. 마치 구세주처럼 저만치 바오와 당이 보였던 것이다.


두 사람에게 나누어 줄 와인과 과일을 챙겨 다가갔다. 바오는 당의 발에 생긴 물집을 치료하는 중이다. 그녀는 나를 보자마자 저녁은 먹었는지부터 챙긴다. 말수가 적은 당은 살짝 고갯짓으로만 인사를 건넨다.


“이거 선물.”


바오에게 포도를 내밀자, 그는 엉거주춤 포도를 받아 들었다.


“잘 먹을게.”


나는 당의 옆 의자에 털썩 앉았다. 그리곤 당의 발을 살피며 세심하게 이것저것 묻는 바오의 옆얼굴을 본다. 둘은 참 잘 어울리는 커플이다.


“아까 너희 쪽이 시끌벅적하던데. 또 파티해?”


저녁마다 와인을 마시는 우리는 순례자들로부터 밤마다 파티를 벌인다는 오해(…)를 사고 있는 중이다. 아니라는 내 대답에도 바오는 썩 믿지 않는 낯으로 물집 치료에 다시 집중했다.


조곤조곤 대화하는 차분한 커플 옆에 앉은 채로, 나는 고민했다. 역시 여기까지다. 어떻게 해서든 내일부터 혼자 걸을 방법을 궁리해야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문득 우리가 앉은 벤치 옆으로 젊은 금발의 남자가 와서 앉는다. 손에는 어쿠스틱 기타가 들려있다. 그는 우리 쪽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로 기타 줄을 몇 번 튕기더니 곧 굵고 활기찬 음성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슬그머니 그의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았다. 바오와 당도, 알베르게의 모두가 그에게 귀를 기울인다.


눈을 감고 노래를 하던 남자의 곡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박수가 터진다. 남자가 눈을 떴다.


“노래가 굉장히 좋아요. 누구의 노래예요?”

“마음에 들어요? 제가 직접 지었습니다.”


직접 지었다고?


“뮤지션?”

“Yes.”


그는 한쪽 눈을 찡긋하더니, 내게 악수를 청한다.


“난 제이슨이라고 해요. 캐나다인이죠. 그쪽은?”

“재인. 한국인이에요. 그런데 정말 직접 쓴 곡이에요?”

“네.”


그가 대답했을 때다.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온 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산티아고를 걸으며 언젠가부터 간혹 얼굴을 보았던 동양인 남자다. 내 또래이거나 더 어려 보였고, 일본인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겼다(이런 건 딱 꼬집어 설명하기 어려운 감 같은 건데, 대체로 맞더라).  우리 쪽에는 토마스 신부님도 계시고 해서 한 번 즈음 말을 걸었을 법 한데, 어쩐지 혼자 있고 싶어 하는 눈치라 인사를 주고받진 않았더랬다.


“난 히로키라고 해요. 일본인이고요. 옆에 앉아도 될까요?”


제이슨이 고개를 끄덕이자, 히로키는 벤치 대신 공원 잔디에 주저앉았다. 바오와 당, 저쪽에서 와인을 거덜 내던 신부님과 이수, 자넷과 다이앤도 다가왔다. 이곳저곳에서 각자의 시간을 보내던 순례자들 역시 슬그머니 거리를 좁힌다. 각자 다른 먼 땅에서 온 여행자들이 밤의 사막 한가운데 누군가 지핀 모닥불을 발견하고 모여든 것처럼.


제이슨은 두서넛 개의 자작곡을 연달아 연주한다. 그의 음악은 생기가 넘쳤다. 삶을 즐기는 이들 특유의 유쾌함이 배어 있다고 할까. 그의 목소리는 울림이 풍부하고 힘이 있다.

연주를 듣던 히로키가 제이슨에게 묻는다.


“잠시 기타를 빌려도 될까요?”


제이슨은 흔쾌히 기타를 넘겨준다.


“물론이죠.”


제이슨에게서 기타를 받아 안은 히로키가 몇 줄 튕겨본다. 그리곤 우리에게 묻는다.


“신청곡.”


나와 제이슨은 서로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문득 한 곡이 떠올렸다.


“렛 잇 비 Let it be.”

“……오케이.”


히로키가 기타 줄을 튕기며 연주와 노래를 시작한다.


힘든 시기가 와도, 마음이 무너진 사람들의 세상에 모두가 뿔뿔이 떨어져 있을 지라도, 구름 낀 밤하늘에도 한 줄기 빛은 있고 그 빛은 내일까지 우릴 비출 것이며 결국 답은 있을 테니 부디 순리대로 두라는 읊조림에 가까운 가사가 그의 입을 통해 흘러나온다.


도통 세월을 타지 않는 이 명곡의 가사는 잔잔한 물결이 되어 우리 귓전에서 일렁인다. 나는 눈을 감아 보았다. 그리고 고요한 황혼 녘 해변에 앉아있는 나를 떠올린다. 보드라운 흰모래에 발가락을 묻고, 이따금 다리를 적시는 잔잔한 파도를 매만지며 수평선 너머 붉게 지는 석양을 바라본다.


문득 고개를 돌린 해변 곳곳에는 나와 같은 길을 걷는 순례자들이 있다. 어떤 이는 그곳에서 일기를 쓰고, 어떤 이는 사랑하는 연인을 떠올리며, 어떤 이는 반평생을 넘긴 자신의 지난날들을 되돌아본다. 그런 우리 모두는 함께 동쪽 땅 위의 어딘가에서 떠오를 내일의 태양을 숨죽여 기다리고 있다.


소등 시간이 되어 알베르게의 불이 모두 꺼질 때까지 히로키와 제이슨의 노래는 이어졌다. 나는 그들의 곁에 앉아 무언가가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그 어떤 것도 끝나지 않기를 소망하며. 부르고스의 밤이 한없이 깊어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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