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라게 Aug 14. 2022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13. 메세타의 나비 - 1




새벽녘, 날 깨운 사람은 이수다. 침대 2층에서 자던 나는 부스스 눈을 떴다. 새벽마다 일어나 걷기 시작한 지가 며칠 째더라? 내내 올빼미 인간으로 살던 내가 뜬금없이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반강제로 미라클 모닝을 실천 중이라니. 생각만 해도 눈 뜨기 전부터 피로가 몰려온다. 


“신부님은?”

“밖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알았어.”


양치질만 간신히 하고 얼굴에 물만 몇 방울 튕겨준 후  배낭을 멨다. 아침에 5분이라도 더 자려고 오늘 입을 옷은 미리 입은 채로 잤다. 어제 걸으면서 입고 세탁한 옷이지만, 이곳은 볕이 좋은 날씨라 순식간에 마른다. 천만다행이다.  


“오늘은 어디까지 가죠?”


밖에서 신발 끈을 죄고 있던 신부님에게 물었다. 신부님은 “혼타나스Hontanas까지 가보죠.”라고 답했다. 


“거기까지 거리가 얼만데요?”

“20km 조금 넘을 겁니다, 아마도.”


20km라……. 20km면 그럭저럭 걸을 만하겠다. 그래도 우선 어느 지역들을 거쳐 가는지 정도는 알고 싶어서 가방 안의 지도를 찾았다. 그러나 요 며칠 새 볼 필요가 없었던 지도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다. 워낙 일행이 많아 아무 사람이나 붙들고 물어보면 끝이었으므로 내버려 두었더니 결국 잊어버린 모양이다.


“지도가 없어졌어요.”

“괜찮아요. 내가 가지고 있으니까.”


전혀 괜찮지 않다. 나는 조만간 헤어질 생각이니까. 그러나 자꾸만 그런 마음이 드는 나를 두 사람에게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아직은 없다. 그래서 일단은 입을 다문 채 신부님과 이수를 따라나섰다. 막 알베르게 현관을 나서던 신부님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이제부터 메세타로군요.”


메세타는 산티아고 순례길 중에서 특히 걷기 힘든 구간으로 악명 높다. 길이 험해서라기보다는 사람의 인내를 시험에 들게 만들어서 그렇다나. 별명도 있다.


명상의 길. 


대체 어떤 길이길래, 이런 거창한 별명이 붙게 된 걸까? 





오늘 여정인 혼타나스까지는 그럭저럭 걸을 만 했다. 그러나 혼타나스의 수도원 알베르게에 머무르는 동안 그다음 여정을 의논하며 나는 견딜 수 없는 마음이 돼버렸다. 


내가 씻으러 간 사이, 내일 일정에 대해 이미 논의를 마친 신부님이 목적지에 대해서 통보하다시피 해온 것이다. 거리가 얼마냐고 묻자, “알고 가는 게 편하겠어요, 아님 모르고 가는 게 편하겠어요? 어차피 갈 거.” 란다. 


‘뭐지, 지금 이거?’ 싶었다. 어이도 없고, 우습기도 하다. 나는 오기가 돋아 “그래도 알고 갈래요. 그래야 각오라도 할 거 아녜요.” 랬더니, 신부님은 “25km 조금 넘을 겁니다.”라고 대답했다. 어제 분명 20km 이상은 걷지 않을 거라던 약속을 따로 받아낸지라, 그만 버럭 큰 소리가 나왔다. 


“앞으로 20km 이상은 걷지 않을 거라면서요!”


동시에 이수가 말했다.


“25km? 내일 32km 아니었어요?”


순간 짧은 정적이 흘렀다. 신부님은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해 먹지…….’라는 표정이고, 이수는 뒤늦게 ‘아차!’하는 얼굴이다. 나는 아예 입을 다물었다.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새벽 3시가 넘자, 아예 밖으로 나와 수도원 마당과 방을 서성거렸다. 신부님과 이수는 낮게 코를 골며 깊은 잠에 빠져있다.


결국 아무런 결론도 내지 못한 채 4시를 넘겨서야 잠이 들었다.  그마저도 선잠이어서 1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새벽에 출발하는 순례자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가위에 눌린 듯 옴짝달싹 못한 채 어서 다시 조용해지길 기다리고만 있었다. 잠시 후, 이수가 다가와 내 어깨를 살짝 흔들었다. 


“누나, 일어나요. 출발할 시간이야.”


나는 끙끙대며 돌아누웠다. 


“먼저 가. 나 새벽 4시 넘어서 잠들었어.”


간신히 대꾸하자, 이수에게서 당황하는 기척이 전해진다. 그는 신부님과 무어라고 말을 하더니, 침대에 눕는다. 좀 더 자려는 걸까? 

두 사람을 먼저 보내 놓고 느긋하게 걸으며 목적지인 캐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rion de los condes까지의 길 중간쯤에서 멈춰 자연스럽게 헤어질까 했는데, 도로 자다니……. 그러나 그 이상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다시 까무룩 잠이 들어 버린 것이다. 


새벽 5시가 넘었을 때, 이수가 또 나를 깨우러 왔다. 그즈음 겨우 깊은 잠을 자던 나는 7시쯤 출발할 테니 먼저 가라고 비몽사몽 간에 대답했던 것 같다. 이수 바로 곁에 있었던 건지, 신부님의 목소리가 뒤이어 들렸다. 


“많이 피곤한가 봅니다. 우리 먼저 출발합시다.”


그렇게 두 사람이 나를 두고 짐을 챙겨 나서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렸다. 내 침대 곁을 지나던 신부님이 내게 “그럼, 무사히.”라고 당부하는 읊조림도 들었다. 



비로소 눈을 떠 완전히 잠에서 깼을 때, 해는 이미 중천이었다. 이토록 늦은 시각에 출발하는 건 생장을 떠나던 날을 제외하곤 처음이다. 역시 옆자리의 두 침대는 텅 비어있다. 신부님의 침대 위에는 신부님 대신 다른 무언가가 놓여 있다. 가서 보니, 어제오늘 분의 식량으로 다 함께 샀던 빵 한 봉투와 물이다.  


빵 봉투는 꽉 채워져 있다. 이걸 다 내게 주고 갔다면 그들에게 남은 식량은 부르고스에서 사고 남은 바케트 조각과 참치 통조림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러 나를 위해 남기고 갔나 보다. 나는 아리송한 죄책감에 휩싸여 선뜻 그것들을 배낭에 담지 못했다. 


배낭을 메고 방을 나오자 텅 빈 수도원의 서늘한 기운이 스며든다. 모두들 이미 나가고 없다. 나처럼 느긋이 출발하는 한 명의 순례자가 앞장서고 있다. 나는 그녀를 뒤따라 수도원을 나섰다. 


바로 옆에서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며 걷던 사람들이 없자, 비로소 오롯이 홀로 되었다는 실감이 난다.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내게는 지도도 없다. 그야말로 노란 화살표만을 나침반 삼아 가야 한다. 


한껏 홀가분하면서도 가벼운 상실감이 문득 느껴졌다. 어쩐지 발바닥이 아픈 것 같아,  걷기를 멈추고 잠시 멈춰 서서 러닝화를 벗었다. 어느새 생긴 걸까? 네 번째와 세 번째 발가락 사이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매거진의 이전글 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