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 더 로드 On the Road #세계여행기

2. 라피스 라즐리 - 4

by 소라게

아델은 상하이에 거주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다. 유럽계 광고 회사에서 일하며, 대학에서는 순수 회화를 전공했다.

우리는 아침 식사를 함께 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작 주문한 식사는 까맣게 잊고서, 대화에 열중했다. 어찌나 열중했는지, 그새 점심 먹을 시간이 된 줄도 몰랐다. 내가 여행을 떠난 뒤로 누군가와 이토록 오래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럼 회사를 한 달이나 쉬고 여행을 왔어?”

“전에 다니던 회사는 그만두고, 이직하면서 한 달 여유가 생겼거든.”

“그럼 이직하는 회사가 그 외국계?”

“전에 다니던 회사도 외국계야. 그때는 오너가 뉴질랜드 인이었는데 이번엔 영국인이야.”


모국어가 아닌 언어로 대화하지만 위화감이 전혀 없다. 어휘가 부족하건 부족하지 않건, 문장이 완벽하건 완벽하지 않건, 우린 서로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를 명확히 전달하고 있다. 엉터리 영어로 내뱉은 어설픈 농담도 잘 통한다.


“오늘 만났는데 10년은 알고 지낸 사이 같으다.”


불교 사원에서 승려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봉사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캣이 우릴 보더니 말한다. 나와 아델은 마주 보고 씩 웃었다.


“그런데 아델은 나이가 어떻게 돼?”


아델이 빙긋 웃는다.


“맞춰봐.”


나와 캣은 고민했다.


“그냥 봐선 재인이랑 비슷한 또래 같은데.”

“재인은 몇 살인데?”

“나? 난 스물여섯.”

“설마! 내가 그렇게 어려 보여?”


아델이 놀라 되묻는다. 그러나 이쪽이야말로 놀랍다. 대체 몇 살이기에 저런 반응이지?


“나 서른셋인데.”

“…….”

“…….”

“그 얼굴로 서른셋이라고?! 거짓말!”


동감이다. 캣이 해쓱해져 중얼거린다.


“동양인들 나이는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아니, 아델이 유난한 게 아닐까. 난 놀라움을 뒤로하고 화제를 바꾸어 물었다.


“한 달 쭉 카트만두에 머물러? 아님 트래킹?”

“트래킹은 시간 여유가 없어서 힘들고. 정말 가고 싶었던 곳은 포카라야. 여기서 일주일 뒤에 포카라로 가서 보름 정도 지낼 생각이야.”


포카라라고? 깜짝 반갑다!


“나도 포카라로 갈 예정인데. 같이 안 갈래? 괜찮다면 숙소를 함께 잡아서 써도 좋을 거야. 숙박비가 절약되니까 그만큼 다른 것도 더 할 수 있을 테고.”


들떠서 조잘거리자, 아델도 “괜찮다.”라며 냉큼 제안을 수락한다.




카트만두에서의 일주일 간, 아델은 하루도 빠짐없이 밖을 나다녔다. 나야 어지간히 돌아다닌 뒤라서 숙소에서 그녀의 들고남을 지켜만 보았다.

아델은 사진에도 조예가 깊었다. 늘 수동 카메라를 지니고 다녔는데, 그 점이 캣과 통했는지, 둘은 종종 정원이나 로비에서 카메라 이야기를 하거나 각자가 찍은 사진을 보여주기도 했다. 나는 그들의 이야기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었으므로 옆에서 음악을 듣거나 책을 읽었다. 이따금 그들 곁에서 글을 쓰곤 했는데, 그럴 때면 캣과 아델은 모니터에 떠오른 한글을 유심히 보더니 장난감 블록이나 암호 같다며 재미있어했다.


포카라로 출발하기 3일 전, 나와 아델은 마두를 통해 투어리스트 버스를 예약했다. 저렴한 로컬버스를 탈까 했지만 여행자들이 입을 모아 말렸다. 포카라와 카트만두를 잇는 계곡 도로는 숱한 버스 전복 사고로 악명 높았다. 운전사들의 곡예 운전도 한몫 하지만, 열악한 교통 환경과 있으나마 나한 교통법규가 더 문제라면서.


“휴가 왔다가 송장 돼서 돌아가고 싶진 않아.”


아델의 진심 어린 우려에, 나는 망설임을 접었다.


“오늘 나랑 같이 쇼핑해주지 않을래? 점심 살게.”


출발 전날, 로비 책장에서 발견한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 일주>를 발견하고 오랜만에 읽던 내게 아델이 청했다. 나는 두 말 않고 아델을 따라나섰다.

아델은 포카라로 가기 전에 미리 선물과 기념품을 사두어야 한다고 했다. 포카라에서 돌아온 날 즉시 귀국 비행기를 타야 하기 때문에 쇼핑할 시간이 없단다.


타멜은 여전했다. 혼란하고 정신 사납고, 흙먼지에 뒤덮인 총천연색의 향연이다. 나는 도로 곳곳 움푹 파인 구덩이에 고인 시궁창을 밟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자꾸만 우릴 붙드는 릭샤꾼을 열심히 뿌리쳤다. 그 와중에 아델의 질문에 답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갓 도착했을 때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처음엔 누군가와 부딪히거나 뭔가에 치이지 않고 걷는 데에만 집중하느라고 대화는 언감생심, 주변도 제대로 구경할 수 없었다.


“뭘 살 건데?”

“음……, 엽서랑 파시미어 숄, 목걸이, 체스 세트. 이 정도.”


엽서가 기념품의 국제 대명사라면, 파시미어는 타멜 기념품의 고유명사다. 보석 상점도 여기저기 널려 있으니, 목걸이 역시 그렇다 치자. 그런데 체스? 이건 좀 뜻밖이다.


“아델은 체스도 둬?”

“아니. 내 게 아냐.”


문득 감이 잡힌다.


“남자 친구 줄 거야?”


실쭉 웃으며 묻자, 아델은 수줍게 웃었다.


“뭐…… 그렇다고 칠게.”

“남자 친구 줄 거 맞고만. 그런데 취미가 고상하다. 체스 세트를 선물 받고 싶대?”


아델은 고개를 저었다.


“취미가 아니라, 직업이야.”

“직업?”

“응. 체스 플레이어거든. 지금은 은퇴했지만.”


체스 플레이어? 프로 바둑기사라고 말했어도 놀라울 판이다. 중국인인 아델과 체스 플레이어, 체스는 서양장기, 게다가 은퇴한 체스 플레이어… … 들었던 단어들이 착착 이어 붙여 이해되지 않고 머리에서 따로 논다. 아니, 그런데 남자 친구 나이가 어떻길래 체스에서 은퇴했다는 걸까?


“재인, 저거 어때?”


남자 친구 나이를 물으려던 찰나, 기념품 숍을 지나가던 아델이 뭔가를 발견하고 나를 휙 끈다. 그녀가 가리킨 것은 진열대에 늘어놓은 체스 세트다.


“우와. 전부 직접 깎은 건가 봐.”

“그러게. 멋지다.”


체스 세트를 보자마자 나는 단번에 마음을 빼앗겼다. 체스 세트는 정말 아름다웠다. 사람 손이 직접 닿은 물건들 특유의 거친 단면, 섬세한 불규칙함까지도.

나이트와 퀸, 킹의 장식은 특히 화려하다. 진열대엔 다섯 가지의 체스 세트가 있는데 각각의 디자인이 전부 다르다. 나와 아델은 체스 세트에 홀딱 반해서 쇼윈도에 코를 박고 떠날 줄 몰랐다. 그때 길게 드리운 파시미어 천들로 입구가 가려져 있던 가게에서 나이 지긋한 노인이 나왔다.

장사꾼이라기보다는, 사서나 대학교수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처럼 온후하고 인자한 인상이다.


“마음에 들거든 들어와서 봐요.”


노인이 말했다. 부드러운 음성을 듣자니 두 발이 스르륵 가게 안으로 움직였다. 이게 장사 수완이라면 천재적이다.

할아버지는 카운터 뒤의 선반에서 체스 세트를 꺼내왔다. 그가 꺼낸 것은 3종류였는데, 그중의 하나가 조금 전 밖에서 홀딱 반했던 세트다. 아델은 체스의 장기들을 하나하나 꼼꼼히 살피며 황홀해했다.


“역시 이게 제일 멋져.”


세트들을 모두 살펴본 아델이 말한다. 나도 같은 생각이다.


“미스터. 이 세트, 얼마예요?”


아델이 묻자, 할아버지는 세트를 들어 요리조리 살펴보더니, 계산기에 숫자를 찍는다. 숫자를 확인한 아델과 나는 숨을 죽였다.


“1,500루피…….”

“……그래도 생각보다 싼데.”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그간 타멜의 물가를 경험한 바, 수제에다 이만한 완성도라면 2천 루피 이상 간다 해도 무리는 아니다. 이런 물건을 한국에서 팔았다면 10만 원은 훌쩍 넘길 것이다.

아델은 고심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단 다른 곳도 좀 돌아보고 오던지. 여긴 정찰제가 아니니까 더 싼 가격에 파는 곳도 있을 거야.”

“그럼 더 둘러보고 오자. 다시 올게요.”


우리는 노인에게 인사하고 가게를 나왔다. 사실 그렇게 나오면 우릴 붙잡고 가격을 깎으려 들 줄 알았는데, 노인은 그러지도 않고 나가는 우리를 여상이 배웅했다. 내심 실은 그 값이 제 값이었던 걸까 싶어졌다. 그리고 이러한 나의 짐작은 맞아떨어졌다. 우린 여러 군데의 가게를 돌아다녔지만, 어느 곳에서도 같은 체스를 찾을 수 없었다. 가격은 더 황당했다. 처음 봤던 세트보다 훨씬 품질 떨어지는 세트를 두고 3천 루피 가까이 부르는 곳이 태반이다. 결국 우리는 다시 노인의 가게로 돌아가 처음 가격에 체스 세트를 샀다.




인파와 흥정에 지친 우리는 카페로 피신했다. 시원한 맥주를 마시며 체스 말을 하나씩 꺼내 만져보았다. 투박한 감촉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룩 하나의 머리 부분이 살짝 깨졌지만, 그런 흠마저도 멋스럽다.

맥주를 다 비우고 나서는 서점에 들러 엽서를 잔뜩 샀다. 나는 진열된 엽서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은 전부 한 장씩 골랐다. 다 고르고 나니까 무려 스무 장이 넘는다.


“웬 엽서를 그렇게 많이 사?”

“친구들한테 보낼 거. 여행 나오기 전에 약속했거든. 국제우편 보내주기로.”

“친구들이 많나 봐.”

“가족 포함이야.”

“아하.”


마지막으로 간 곳은 귀금속 가게다. 이 역시도 몇 군데를 순회했는데, 우리가 결정한 곳은 마지막으로 들어간 골목의 아주 작은 가게다. 가격이 저렴해서라기 보다는 카운터에서 루페로 목걸이의 보석을 감정 중인 가게 주인의 얼굴이 가장 진지해서다. 우릴 흘끗 건너다보는 남자의 차분한 시선에서 단단한 자부심이 느껴졌달까. 더 솔직히 말하면, 관광객들에게 질린 표정으로 사려면 사고 말려면 말아라, 하는 투여서 혹했다.


가게 안엔 주인과 그의 딸로 보이는 젊은 여자가 앉아 있다. 아델도 여기가 마음에 드는 듯, 진열대의 액세서리들을 유심히 본다. 보석에 관심이 없는 나는 대강 가게 안을 둘러보다가 문득 어떤 것에 시선이 꽂혔다. 가게 주인 손 밑의 진열대에 놓인 새파란 목걸이다. 자잘하게 조각내어 세공한 암청색 보석이 겹겹이 이어져 체인을 이룬다. 탁한 유색 광물인데도 푸름의 농도가 지나쳐 차라리 투명하다.


“라피스 라즐리.”


머리 위에서 들린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주인이 이번엔 루페 너머로 날 보고 있다.


“네?”

“그 보석 이름이 라피스 라즐리요.”

“아…….”


라피스 라즐리. 보석의 이름을 나직이 입안에서 굴려본다. 어쩐지 마법을 거는 주문 같은 이름이다. 그리고 어딘지 귀에 익다. 어디서 들었던 걸까?

보석은 바닥을 알 수 없는 심해의 색이다. 터키석과 자수정, 그리고 은을 세공한 펜던트 양옆으로 시린 빛을 뿜는 라피스 라즐리 장식 줄이 거미줄처럼 산개한다. 비교적 밝은 채도의 색들이 어우러진 화려한 펜던트 덕분에 라피스 라즐리가 한층 고아해진다.


“재인, 뭘 보고 있…, 맙소사!”


다가온 아델이 목걸이를 보고 탄성을 터뜨린다.


그래, 그 맘 나도 알지.


우린 한참 동안 숨을 죽인 채 그 목걸이만 탐욕스럽게 쳐다보았다.


“무슨 보석 색깔이 어떻게 이래?”

“라피스 라즐리라는 보석이래.”

“아저씨. 이 목걸이, 해봐도 될까요?”


주인은 목걸이를 꺼내 아델의 목에 걸어주었다. 목걸이는 칼라스와 체커의 중간 정도 형태다. 여러 겹으로 이루어진 푸른 장식 줄이 아델의 목 밑부분부터 쇄골 윗부분까지를 덮는다. 아델의 옷이 수수해서 그런지, 목 위에 얹힌 목걸이의 존재감은 엄청났다. 화려함에 압도된 아델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집에만 모셔놔도 상관없어!”라며 마음을 정했다.


아델이 목걸이 값을 놓고 흥정하는 동안, 나는 또 다른 라피스 라즐리를 찾아 진열대를 누볐다. 우릴 지켜보던 점원 아가씨가 다가와 여러 종류의 라피스 라즐리를 보여주었다.


“이렇게 녹색이 강한 것은 한 등급 아래죠. 그리고 이런 것들은 터키석에 착색을 시킨 것이고요.”


아가씨의 말대로 진짜 라피스 라즐리의 푸른색엔 그 어떤 교묘한 속임수도 범접할 수 없는 기품이 있었다.


“혹시 라피스 라즐리로 만든 귀걸이도 있나요?”

“물론이죠.”


점원이 보여준 것은 귓불 밑으로 보석이 내려오는 이어 드롭이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런 것 말고 귓불에 딱 붙는 제일 단순한 걸로요.”

“음. 잠시 만요.”


아가씨는 조금 고민하더니, 두 종류의 귀걸이를 가져왔다. 두 개 모두 내가 원하는 디자인이다. 그러나 그중 하나는 색이 옅고, 내가 원하는 아주 짙은 색이다. 고민은 없었다. 나는 주저 없이 색이 더 깊은 쪽을 골라 귀에 찼다. 아델도 값을 치르고 포장한 목걸이를 들고 다가왔다.


“뭐 샀어?”

“귀걸이.”


나는 아델에게 귀를 보여주었다. 아델은 너무 예쁘다며 탄성을 질렀다.

만족스러운 쇼핑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서야, 나는 가물가물하며 영 떠오르지 않던 이름을 기억해 냈다.


“라퓨타!”


라퓨타는 걸리버 여행기에 등장하는 하늘을 떠다니는 도시 이름이다. 그러나 라피스 라즐리가 등장하는 곳은 걸리버 여행기가 아닌, 이 소설을 모티브로 제작된 미야자키 하야오의 애니메이션 ‘천공의 성 라퓨타’다. 라피스 라즐리는 ‘천공의 성 라퓨타’를 날게 하는 광물이다. 여주인공은 멸망한 고대 라퓨타 왕국의 유일한 후계자로 그녀가 가진 라피스 라즐리 비행석은 해적을 비롯하여 온갖 악의 무리를 끌어들인다. 하지만 결국 주인공들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이끄는 것도 이 광물이다.


고등학생이었을 적, 미야자키 하야오의 세계를 처음 접했을 때의 전율을 잊지 못한다. 그 경험은 내 세계를 떠받치는 주요 축의 하나로 자리 잡았다. 성인이 되어서도 하야오의 작품을 전담한 지브리 스튜디오의 감수성은 여전히 내게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최근 장편 애니메이션 시나리오 집필에 빠져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평소 일본 애니메이션을 즐기는 편이 아니면서, 하야오의 세계만큼은 문화적 경계를 무의미하게 만들 정도로 독보적이다.


나는 문득 귓불에 자리한 나의 라피스 라즐리를 만져보았다. 내 신체 일부에 속하여 요요히 빛나는 푸름은 바다를 닮기도 하늘을 닮기도 했다. 이 귀걸이를 한 채로라면, 어느 날 불쑥 내가 어떤 낯선 땅의 하늘을 나는 채로 눈을 뜬다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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