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송혜교가 주연을 맡았던 넷플릭스 드라마 <글로리>를 보면서 새삼 들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피해자의 기억은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는 것. 반면 가해자는 아예 잘못에 대한 기억조차 없을 정도로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것입니다. 스스로 ‘피해자’라 칭하는 우리와, 스스로 ‘가해자’가 아니라는 일본의 시선과 입장도 극명하게 다를 것이라고 보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극명한 인식차는 국가 간에만 있는 것도 아닙니니다. 고작 서너 명이 함께 살아가는, 피와 살을 나는 가족 간에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 국민 중 상당수는 “왜 일본은 진정한 사과를 하지 않는가?”라고 묻습니다. 반면 일본 국민 중 상당수는 “일본은 그동안 수십 번 사과를 했는데도 한국은 왜 계속해서 사과를 요구하는가?”라고 되묻습니다. 이 도돌이표 같은 양국 국민의 불편한 질문은 솔로몬왕이 나서도 명쾌한 답변을 내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치 서로 다른 세상에서 묻고 답하는 남녀의 뫼비우스 띠와 같은 대화법처럼, ‘생각’이 근본적으로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의 생각이 다르면 시각도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이 근본적인 한계를 먼저 인정하지 않고서는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은 좋지만, 행동으로 옮기기엔 쉽지 않습니다. 다툼이 심한 부부간의 극한 대립과 갈등을 보면, 수도 없이 대화해도 결국 원점으로 되돌아가는 경우가 다반사입니다. 부부는 서로 자기 이야기만 합니다. 자기변명만 앞세웁니다.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도 맞대꾸할 말귀부터 찾습니다. 자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 아픈 것, 자기 불만만 쏟아냅니다. 나이가 더 먹은 부모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가정이나, 아주 작은 마을 단위에서의 갈등도 깨끗하게 풀어내기란 참으로 어렵습니다.
서로 원수 같은 가해자와 피해자가 골목을 마주하고 산다고 생각해봅시다. 어느 날 피해자가 금전적 보상만 넉넉하게 해주면 자신이 입은 모든 피해를 퉁 치겠다고 제안합니다(일괄합의). 두 집안이 화해조서에 도장을 찍고 적지 않은 합의금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시간이 흐른 뒤 피해자 집안 아이 하나가 가해자 집안에, 자기가 예전에 얻어맞고 돈을 빼앗긴 일은 개별적으로 새로 보상받아야 한다고 나섭니다. 이런 일들이 여러 차례 반복됩니다. 자, 이렇게 되면 어떨까요. 아무리 가해자 집안이라고 해도 울화통이 터지지 않을까요? “더 이상의 사과는 절대로 없다.”고 신경질을 부릴 게 명약관화(明若觀火)입니다.
순전히 일본입장에서만 본다면, 1965년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外相)의 사과(우리 두 나라의 긴 역사는 불행한 시간. 정말로 유감이며 깊게 후회), 1984년 이로히토 일왕(日王)의 사과(우리 사이의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참으로 유감), 1990년 아키히토 일왕의 사과(불행한 기간 동안 당신 국민들이 겪었던 고통을 비추어 볼 때, 가장 큰 유감), 1993년 고노 내각관방장관 담화(의심할 여지 없이, 당시 많은 여성들의 명예와 존엄성에 심한 상처를 입혔던 군 당국의 만행. 위안부 여성들에게 진심어린 사과와 참회), 1998년의 김대중-오부치 선언(식민지 지배로 인해 한국 국민에게 다대(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안겨준 역사적 사실에 대해 통절한 반성과 마음으로부터 사죄), 2001년 고이즈미 총리의 위안부 피해자에게 대한 편지(헤아릴 수 없는 고통스러운 경험을 겪고 치료할 수 없는 신체적, 정신적 부상을 입은 모든 여성들에게 가장 진실한 사과와 참회), 2015년 아베 신조 총리가 일본군 위안부 최종적 종결을 약속한 합의 직후 박근혜 대통령과 전화한 사과(위안부 피해자에게 사죄와 반성의 마음을 표한다) 등 눈에 띄는 것만 여러 차례입니다.
이창위 서울시립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의 책 <토착왜구와 죽창부대의 사이에서>에는 1983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부터 2018년 아키히토 일왕에 이르기까지 53번의 사과를 정리한 표가 실려있습니다. 이렇게 사과한 사실을 제대로 인정하지 않고 계속해서 되풀이하면서 ‘진정성이 없다’고 하면, 일본 쪽에서도 ‘뭘 더 어떻게 하라는 것이냐’고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가장 큰 우리의 약점은 1965년 한일 협정을 통해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배상에 종지부를 찍었다는 사실입니다. 이점을 먼저 인정하지 않으면, 대한민국은 신뢰하기 어려운 나라로 인식될 수밖에 없습니다.
솔직히 ‘진정한 사과’란 없습니다. 사과의 진(眞)과 위(僞)를 과연 누가, 어떻게 판단할 수 있단 말인가요. 눈빛만 보면 알 수 있다고요? 대단합니다. 행동을 보면 알 수 있다고요? 훌륭합니다. 하지만 그런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봅니다. 가슴에 칼을 품고도 입으로는 꿀 같은 말을 쏟아내는 존재가 인간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의 포로로 고통받지 않으려면 스스로 길을 찾아야만 합니다. 일본은 가만히 있는데 왜 우리가 먼저 손을 내미냐고 고집 피울 일이 아닙니다. 어른이 먼저 손을 내미는 법입니다. 하나가 죽고 다른 하나만 살아남아서 살아갈 세상이 아니라면, 먼저 손 내미는 자가 진정한 승자입니다. 더구나 우리는 핵무기로 무장한 가장 위협적이고 현실적인 적(敵)을 머리에 이고 살고 있습니다. 이별에도 타이밍이 중요하듯, 화해에도 타이밍이 중요합니다.
지난 윤석열 정부이후 한일관계가 상당히 변했습니다. K-문화의 영향도 크겠지만, 한일간 국민의 반감도 그만큼 줄었습니다. 그러나 깨지기 쉬운 유리창 같은 상황이라는 것도 사실입니다. 한일간 동맹은 아니더라도 협력관계만큼은 굳건하게 지켜야 합니다. 그게 중국과 러시아, 북한을 눈앞에 둔 우리의 피할 수 없는 운명입니다. 그 때의 타이밍이 적절했던 것 처럼, 지금 정부에서도 여전히 한일간 관계에 많은 공을 들여야 할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