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공유하라

by 권태윤

과거, 자살을 통해서야 비로소 ‘상자 속’으로부터 탈출할 수 있었던 한 시간강사의 죽음은, 대학교육의 절반 이상을 감당하고 있으면서도 그에 걸 맞는 대접을 받지 못하고 신음하는 우리사회 시간강사들의 고통스런 현실을 온몸으로 고발한 사건이었습니다. 이 사건 이후 30여년이 지났지만 변한 것은 거의 없습니다.


다시 화가 나는 이유는, 이미 기득권층에 편입된 교수사회의 차가울 정도의 철저한 무관심입니다. 수 만 명이 넘는 자신들의 ‘제자’가 교원자격도 아닌 ‘일용잡급직’ 신분으로 최저생계비도 벌지 못해 생계를 고민할 지경인 상황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그 어떤 교수도 “나의 제자가 이런 부당한 대접을 받으며 고통 받는 현실을 두고 볼 수 없다”며 분노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보지 못했고, 이런 문제를 지적하는 교수들의 글도 본적이 없습니다. ‘이래서야 되겠습니까?’


학문연구에 매달려야 할 시간강사들이 생활고에 신음하며, 마땅히 자신들이 해야 할 교육의 절반이상을 감당해내고 있는 현실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그동안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는 교수들의 ‘의연함’이 참으로 놀라울 따름입니다. 자신들도 그런 고통의 터널을 견뎌왔기에, 마땅히 거쳐야 할 하나의 과정쯤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러나 한때 자신들이 거쳐 온 힘든 길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을 교수집단이, 제자들의 고통을 외면하면서도 이곳저곳에 사회의 모순과 부조리를 지적하는 글을 내놓는 모습은 정의롭지 못합니다.


물론 교수집단은 “왜 교육당국이나 국가가 책임져야 할 부분에 대해 교수집단을 물고 늘어지느냐?”고 항변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일차적으로 오늘의 고통 받는 시간강사 문제는 정부당국과 교육재단이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그러나 그런 식으로 책임을 떠넘긴다고 해서 교수들 자신들이 느껴야 할 양심의 책임마저 면제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수 봉급을 떼어서 배고픈 제자들에게 나눠주길 기대하진 않지만, 최소한 진정한 교원 대접도 받지 못하는 제자들의 고통에 대해 정부의 책임과 대책을 촉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스승이자 선배교육자로서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일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더욱 우리를 우울하게 합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시간강사들의 비겁함을 질타하기만 합니다. “전국에 수 만 명이 있고, 대학교육의 절반이상을 감당하고 있어 뭉치기만 한다면 당장 학사행정을 마비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막강한 집단인데 왜 부당한 대우에 침묵하고만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우리의 교수충원 시스템의 현실을 무시하고 시간강사들의 비겁함만을 물고 늘어지는 무책임한 주장입니다. 교수에게 한번 찍히면 그나마 푼돈 벌이를 할 수 있는 시간강사 자리도 구할 수 없고, 교수가 되는 꿈은 아예 포기하는 것을 각오해야 하는 생존의 선택을 그들에게만 강요하는 것은 너무 가혹합니다.


교수집단에 대해 더욱 실망하고 분노하게 되는 것은 시간강사들의 현실을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는 점 때문만은 아닙니다. 차갑게 외면하는 것이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적지 않는 교수들은 시간강사들의 현실적 문제와 희망을 이용해 이런저런 고통과 부담까지 안겨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교수에 임용되기 위해 재단에 돈을 갖다 바치는 일이야 순전히 시간강사 자신의 선택이라고 쳐도, 교수임용을 위해 학문이 아니라 선물로 교수들의 환심을 사야만 하는 더러운 풍토는 ‘공공의 적’이니만큼 정말 뜯어고쳐야 합니다. 배고픈 제자들에게 생활비를 보테주지는 못할망정 그들의 눈물과 회한이 묻은 돈과 술을 탐내기 까지 한다면, 그런 교수는 이미 교육자가 아니라 교직을 미끼로 한 ‘사기꾼’에 불과할 것입니다.


하도 갑갑하여 AI에게 시간강사 처우에 대해 물어봤습니다. 이렇게 답합니다.


"시간강사의 열악한 처우는 낮은 임금, 고용 불안, 복지 미흡 등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됩니다. 시간강사의 연봉은 1,000만~1,600만 원 수준으로, 전임강사(평균 5,210만 원)와 큰 격차가 있습니다. 강의료 지급 방식도 불안정하며, 방학 중 임금 지급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퇴직금도 일부만 적립됩니다. 대학 구조조정으로 강의가 줄거나 해고 위험이 높아, 심리적 불안이 큽니다. 건강보험, 퇴직금 등 법적 복지 혜택이 미흡하고, 교원으로서의 참정권도 제한됩니다. 강사법은 교원 지위를 부여했으나, 실제로는 비정규직 노동자로 분류되어 처우 개선이 미흡합니다. 시간강사 다수가 30~40대 기혼자로, 생계유지에 어려움을 겪고 투잡을 하는 사례도 많습니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지속되고 있으나, 실질적 변화는 더디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시간강사의 열악한 처우는 임금, 고용, 복지 등 다방면에서 구조적 문제이며, 고등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큽니다."


약자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영화만을 챙기는 부류는 교수집단만이 아닙니다.


유감스럽지만, 우리의 노동계 역시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대기업 노동자들은 노동현실 개선을 위해 투쟁을 밥 먹듯 하지만, 그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몫을 더 챙기기 위한 ‘그들만의 투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 땅에는 대기업 노동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월급 몇 푼 더 올려달라고, 산전산후 휴가니 육아휴직을 달라는 주장도 마치 다른 세상 이야기로 들리는 노동자가 지천에 깔려있습니다.


늘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투쟁한다는 대기업 노동조합이나 대기업 노동자단체에서 상대적 약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나 소규모 영세사업장 노동자들의 고통에 발 벗고 나서는 걸 본 적이 없습니다. 솔직히 다수의 힘으로 자신들의 권익을 위해 투쟁할 수 있는 대기업 노동자는 행복한 노동귀족이라 할 수 있습니다. “아니꼬우면 너도 대기업 노동자가 되라”고 말한다면 더 이상 할 말 없지만, ‘살려 달라’는 목소리마저 내지 못하는 이 땅의 수많은 ‘피라미 노동자’들은 그들을 보면 배가 아픈 것이 사실입니다.


중소규모 업체나, 개인 업체 노동자들의 경우 노동법이나 근로기준법에서 규정하는 노동자로서의 권리는 생각도 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상여금이니 휴가니 퇴직금이니 하는 말은 호사스런 생각일 뿐이고, 그나마 푼돈 같은 월급이나 밀리지 않고 제 날짜에 받으면 복 터진 것으로 여기는 노동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외국인 노동자들의 경우야 더 말해 무엇 할까요. 이런 식으로 열악한 노동조건에서 제 날짜에 월급이 나올까 근심하며 살아가는 노동자들에겐 정기적금도 남의 일이요, 제대로 된 생활설계도 남의 일이지만, 신용불량자가 되는 공포만은 순전히 자신만의 일이 됩니다. 신용불량자가 별건가요? 월급 한두 달 밀려 세금 못 내고 은행이자 못 내면 그게 바로 신용불량자입니다.


강자가 상대적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 사회는 희망이 없는 사회입니다. 상대적 강자가 상대적 약자를 외면하는 ‘권리수호’ 투쟁은 위선입니다. 검찰이 경찰을 우습게 여기고, 의사가 간호사를 우습게 여기고, 교수가 강사를 무시하며, 언론이 약자를 외면하는 사회, 대기업 노동자가 중소기업 노동자, 외국인 노동자를 철저히 외면하는 사회는 이미 제대로 된 사회가 아닙니다. 그런 사회는 ‘분노’라는 시한폭탄을 품고 사는 위험한 사회입니다.


게다가 ‘분노의 시한폭탄’은 폭발시각이 정해져있지 않습니다. 차별과 외면이 극한점에 이르면 분노는 어느 순간 무시무시한 힘으로 폭발해 모두의 손실을 가져옵니다. 노동자가 파업을 일으키면 그것이 결국 기업주는 물론 우리 모두의 손해가 되듯, 상대적 약자가 마침내 분노를 폭발시키면 그 피해 역시 그들만의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것이 됩니다. 상대적 강자의 침묵과 방관은 그래서 상대적 약자들을 더욱 슬프게 합니다. 약자의 아픔을 나의 아픔으로 나눌 줄 아는 상대적 강자의 ‘고통공유’가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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