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酒)

by 권태윤

한때 ‘천하제일의 주선(酒仙)이 되고야 말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품었던 적이 있습니다. 그때가 10대였던 것도 같고 20대였던 것도 같고 하여튼 잦은 음주 탓인지 기억은 안 납니다. 주종(酒種)과 주량(酒量)을 가리지 않고 마셨습니다.


언젠가 경북 경산에 사는 ‘탱크로리’란 별명을 지닌 고수(高手)를 만났었습니다. 당시 40대중반이던 그는 자신이 마신 술의 양이 탱크로리 다섯 대 분량 이상은 족히 될 것이라고 매번 껄껄거리며 자랑했습니다. 고작 양으로 자랑하는 자라 그 뒤로는 그를 적수로 여기지 않고 하수(下手) 취급을 했었습니다.


그가 마시는 술을 며칠 지켜본 적이 있는데, 아침 소주 3병, 점심 소주 5병, 저녁 3병 정도를 매일 마셨습니다. 그리 마시고도 매일 새벽 4시경 일어나 해발 473m 성암산(경산에 있는 산)을 맨발로 한 두 시간씩 약 먹은 개처럼 뛰어다녔습니다. 지금껏 평생 그리 살았노라 자랑했습니다. 그가 보여 준 발바닥이 가히 들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당시 그의 음주 비결은 숙취해소에 좋다는 온갖 나무와 풀 등을 다려먹고 즙을 짜서 물처럼 자주 마시는 것이었습니다. 새벽에 두어시간 산을 뛰어다니다 내려와 가마솥에 엄나무, 헛개나무 따위의 각종 나무로 된 약재들을 한 솥 가득 달여서 바가지로 퍼 마셨습니다. 산신령을 자처하던 그가 몇 년 뒤 음주운전을 하다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아마 저승에서도 그는 늘 술에 취해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한때 "언젠가는 이순신장군을 능가하는 ‘음주장군’이 되겠다"며 술자리에서 호기를 부리곤 했었습니다. 그때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 실린 詩를 차용해 건배사 한수를 지어 돌리기도 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 12병의 술이 남아 있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마시면 아직 더 마실 수 있습니다.

비록 술잔은 작다 하나 우리가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술이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살고자 마시면 반드시 죽을 것이요,

죽고자 마시면 반드시 살 것입니다.”


이태원에서 어떤 프랑스 녀석과 폭탄주 대결을 벌이다가 내가 ‘아보트르 상태(avotre sante)’를 외치자 그가 짐짓 놀라며 술값을 자신이 낸 적도 있고, 관광가이드를 하던 20대 후반의 러시아 청년에게 뜻도 모르고 ‘스하로쇼네’, ‘즈다로비에’ 따위의 건배사를 지껄이며 보드카를 마셨던 적도 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술에 취하면 예술영화와 같이 잘 찍히던 필름이 마구 끊겨져 나갔습니다. 한 선배는 나의 이런 상태를 인사불성이 되는 ‘해망(解妄)’이라 나무랐습니다. 술 취하는 단계에는 긴장된 입이 풀리는 해구(解口), 미운 것도 예뻐 보이는 해색(解色), 분통과 원한이 풀리는 해원(解怨) 다음이 해망입니다. 이러다 주신(酒神)은커녕 주정뱅이 신세가 될 수도 있겠다 싶었습니다. 같은 주씨이니 동급이라 여겨야 할까요.


‘탈무드’에도 술 마시는 4가지 단계가 나오는데, 처음 마시기 시작할 때에는 ‘양’같이 온순하고, 조금 더 마시면 ‘사자’처럼 사납게 되고, 더 마시면 ‘원숭이’처럼 춤추거나 노래를 부르며, 더욱 많이 마시면 ‘돼지’처럼 추해진다고 합니다. 술이란 것은 ‘악마가 인간에게 준 선물’이기 때문이라는데 어쨌거나 ‘선물’은 좋은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경상북도 영양 태생인 故 조지훈 시인은 ‘술은 인정(人情)이라’는 수필에서, 주량 뿐 아니라 주도(酒道)를 따져 '급'과 '단'으로 총 18등급을 나누기도 했습니다. 9~1급은 술의 참맛과 참된 깨달음을 모르는 단계입니다. 못 마시거나 혼술, 반주 등이 여기에 해당합니다. 1~9단이 나름 고수라 할 수 있습니다. 애주(愛酒, 1단)부터 주도삼미(酒道三昧)에 빠진 장주(長酒, 5단), 술을 즐기며 마셔도 그만 안 마셔도 그만인 낙주(樂酒, 7단) 등이 포함됩니다. 감히 짐작컨대 한때 저도 5단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아내는 한때 ‘내 인생의 삼보(三樂) 중 술의 낙이 그중 으뜸’이라는 얼토당토 않은 말을 듣더니 “이제 그만 다른 낙을 즐겨보라”며 웃던 기억이 납니다. 주신의 꿈을 포기하고, 새로운 낙을 찾아 은장도 하나 품고 길을 떠나야 할 때가 되어갑니다. '나그네 길에 술잔 얻어먹을 기회가 생기더라도 아홉 잔은 넘기지 않는 ‘구월불가(九越不可)’의 기준은 지켜보리라 새삼 그리 다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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