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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Jun 13. 2022

그들이 세상을 떠나는 방법

초와 고추

1


초에 불을 붙인다. 양초가 자기 몸을 태운다. 굳어진 채 미끌미끌하고 단단했던 양초가 자기 몸을 녹이기 시작한다. 불이 점령한 심지 바로 아래부분부터 작은 웅덩이가 생기면서 불을 지핀다. 웅덩이에 비친 불빛이 밝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양초의 다른 부분에도 땀이 송골송골 맺힌다. 그런 땀방울 하나하나가 모여들어 양초위 전체가 호수를 이루기 시작한다. 곧이어 양초가 전부 녹으면 양초 안은 전부 호수가 된다. 양초를 감싸던 포장지 속이 훤히 내비친다.


초를 켜두고 시간을 오래 보내면 어느새 양초는 거의 다 사라져있다. 때때로 양초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초 한 가운데 허연 불빛만 덩그러니 남아 심지를 태우고 있었다. 신기해서 불을 껐다가 다시 붙여보아도 심지는 탔다. 빛나기 위해 태워야 할 양초는 다 떠나갔는데 어디서 그 힘을 밀어올리고 있었을까. 내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태우며 빛나던 심지는 제 힘을 다해갈 때가 되어서야 서서히 불을 꺼트렸다.


나는 잘 준비를 할 때도 가끔 양초를 켰다. 내가 눈을 감는 것보다 더 먼저 양초가 꺼진 적은 거의 없었다. 자고 일어나서 책상 쪽을 쳐다보면 양초는 꺼져 있었다. 방 안에는 어느새 초가 남긴 향으로 가득했다. 그 향을 간직하고 싶어 부러 환기를 안 하면 그 향이 두고두고 방안을 훤히 밝혔다.



2


고추에 물을 주기 어려워지면 고추는 제일 먼저 잎을 말린다. 잎이 노래진다. 말라가는 잎을 만지자면 이미 생명이 반쯤 떠난 것 같다. 하지만 고추는 마지막 힘을 다 짜올려서 그 어느 때보다 단단하고 통통한 고추를 맺어냈다. 다 시들시들해진 이파리 사이로 젊음을 뽐내는 고추의 싱싱함은 고추나무의 마지막 의지였다. 그 의지를 따도, 따도, 몇 번이고 그 의지를 땅 위로 밀어올렸다. 겨울이 찾아오고 바깥이 차가워지고 땅이 얼음처럼 단단해지면 고추는 그제서야 제 몸에서 잎을 떨어내고 몸도 노란빛으로 죽음을 맞이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매달린 마지막 고추들은 파릇파릇했다.


나는 그렇게 여러 번을 더 수확한 고추들을 모아 큰 대접에 담아두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으나 고추들은 단단했고, 짱딸막했다. 어금니로 고추를 씹으면 그 강도가 피망보다 더 했다. 단단함 만큼 신 맛을 냈다. 분명 따온 이후 오랜 시간을 바깥에 두었는데, 오래 살아있었다. 마트 고추였으면 이미 10번은 넘게 짓물렀을 시간을 대접 속에서 그 고추들이 버텨냈다. 나는 수확한 고추들을 다음해가 다가올 때까지 두고두고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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