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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Apr 29. 2022

한나 아렌트 #5 -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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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완독. 내가 빌린 도서관에서 진지한 독자로는 내가 처음이었는지 책 밑에 내가 본 곳까지 책 읽은 티가 확 났다. 그게 하나의 재미였다. 글 자체는 높은 수준의 집중력을 요하는 것이어서 컴퓨터 앞에서 읽거나 했을 때 상당히 어려웠다.


번역이 좀 아쉽다.

대상 독자에 따라 맥락이 설명되지 않은 채 그대로 발화되는 글들도 있었는데, 내 지식의 한계가 아쉬웠다.

책 읽는 습관을 더 들이고 싶다.

서문을 안 읽고 넘어갔다가 중간에서야 서문이 책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준다는 리뷰를 발견하고 부랴부랴 읽었다. 참고하시면 좋을 것 같다.


글로 완성되는 못했으나 인상적이었던 문장을 필사하고 마무리 짓자.





2



0 - 서문(한국외대 교수, 홍원표)


아렌트의 이야기하기는 "개념적 사유와 달리 경험을 정신 속에 재현하는 상상력을 훈련하고, 친밀성과 달리 우정을 촉진하며, 저자와 독자 사이에 확장된 심성을 유지하는 데 기여한다." 이렇듯 이야기하기는 정신적 왕래 또는 교감을 통해 원활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 인간의 삶이 다양하면 다양할수록 삶의 영역을 이동하는 양상은 복잡해질 것이다.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은 등장인물들의 전기로서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았으며 세계에서 어떻게 이동했는가를 이야기하고 있다. '행위'가 노출과 연관된다는 점에서 "공적 세계에서 드러나는 이동과 왕래는 행위의 직접적인 산물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의상 정치적이다."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47p)


아렌트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서 등장인물들의 공적인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러나 로자 룩셈부르크를 제외하면 어느 누구도 정치적으로 활동한 정치적 인물은 없다. 이 저서가 정치적 이야기 형식으로서 일관성을 유지한다면 정치적 언행을 통해 자신들을 노출시키지 않았던 베냐민, 디네센 그리고 자렐 역시 정치적인 삶을 영위했다고 평가되어야 한다. 아렌트는 이들이 어두운 시대에 삶을 영위하고 세계 속에서 활동하면서 자신들을 공개적으로 드러냈기 때문에 이들의 활동이 정치적이었다고 생각했다. (같은 책, 49p)


아렌트는 "등장인물들이 어떻게 살았고 세계 속에서 어떻게 행동했으며 시대의 움직임에 어떻게 영향을 받았는가를 주로 언급하고 있다." 이들은 어두운 시대에 주로 생애를 통해 세계에 관심을 가지면서 세계에 도전한 한계인으로서 삶을 영위했다. (같은 책, 50p)



2장 - 로자 룩셈부르크 (이하 한나 아렌트 저)


언젠가 국제회의 석상에서 조레스가 유창한 연설을 하면서 "로자 룩셈부르크의 오도된 열정을 조롱했다. 그러나 연살을 마친 순간 아무도 그의 연설을 통역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때 로자는 벌떡 일어나 프랑스어에서 독일어로 유창하게 통역하면서 감동적인 연설을 재현했다." (같은 책, 122p)



3장 -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 1958-63년의 교황


그는 언제나 "하루하루"를 사는 데 만족했고 들판의 백합처럼 "한 시간 한 시간"에 만족했으며, 그의 새로운 지위를 위해 "행위의 기본 원칙"―"미래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을 것", "미래를 위한 인간적 준비"를 하지 않을 것, "미래에 대해 대담하게 또는 우연히 남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것"―을 세웠다. (같은 책, 150p)


그는 교황직이라는 장엄한 책임을 맡던 첫날 대단히 걱정했으며, 어느 날에는 심지어 밤에 잠을 이룰 수 없어서 "조반니, 그렇게 걱정할 것이 없단다"라고 새벽까지 스스로 타이른 다음에야 비로소 잠들 수 있엇다고 친구들에게 말했다. 이때 그는 겸손을 제외하고는 다른 무엇을 역설할 수 있었겠는가? (같은 책, 151p)


그는 임종 자리에서도 같은 신념에 따라 가장 숭고한 말을 남겼다. "매일이 태어나기 좋은 날이며 매일이 죽기에 좋은 날이다." (같은 책, 156p)



5장 - 카를 야스퍼스: 세계시민


진리와 소통을 동일한 것으로 보는 철학은 단순한 관조에만 머무는 악명 높은 상아탑을 탈피했다. 사유는 실용적 활동이 아니라 실천적 활동이다. 그것은 사람들 사이의 실천이지 스스로 선택한 고독 속에 이뤄지는 한 개인의 수행은 아니다. 내가 아는 한 야스퍼스는 고독에 대해서 반항한 최초의 유일한 철학자다. 그는 고독을 '유해한' 것이라고 보았으며, 이 한 가지 관점에서 감히 "모든 사유·체험·의미"에 의문을 제기해 왔다. "이것들은 소토오가 어떠한 관계를 지니는 것인가? 이것들은 소통을 돕는 것인가 아니면 방해하는 것인가? 이것들은 고독으로 이끄는 것인가 아니면 소통으로 끌어올리는 것인가?" (같은 책, 179-180p)



7장 - 헤르만 브로흐


우리는 근본적으로 상이한 세 가지 인간 활동, 즉 예술활동·과학활동·정치활동의 원인을 완전히 상이한 재능에 돌린다. 그러나 브로흐는 결코 공개적으로 드러내지 않았지만 항상 끈질기게 지상의 삶에서 인간이 이 세 가지를 하나로 일치시키고 하나가 되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세계에 접근했다. 그는 예술에 대해서는 과학과 같은 강한 설득력을, 과학에 대해서는 "세계의 끊임없는 재창조"를 임무로 하는 예쑬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전체성"을 창출하라고 요구했으며, 아울러 지식으로 충만한 예술과 통찰력을 확보한 지식이 함께 일상의 실천적인 인간활동을 모두 포함시키고 포괄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같은 책, 218-219p)


생산활동과 마찬가지로 도구적 활동은 '활동' 주체가 획득 목적과 생산대상을 완전히 인식할 수 있다는 전제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유일한 문제는 그러한 목적들을 성취할 적절한 수단을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한 전제는 단일한 의지만이 존재하는 세계, 즉 목적이나 목표의 상호 개입이 존재하지 않을 정도로 세계 속에서 활동적 자아 주체들이 충분히 서로 고립될 수 있도록 정리된 세계를 전제하고 있다. 행위의 경우 그 반대가 옳다. 인간 개개인이 자신의 행위를 펼치는 세계에서 목적이나 의도가 원래 의도한 바대로 성취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이 세계를 표상하는 엇갈리고 충돌되는 수많은 의도와 목적은 존재한다. 심지어 이러한 기술(記述), 그리고 모든 활동의 결과적인 실패 속성, 행위의 외면적 무용성은 도구적 활동의 관점에서 실제로 고려되고 목적-수단 범주에서 이해되기 때문에 부적절하게 왜곡된다. 우리는 이러한 범주 내에서 다음과 같은 복음서의 문구에 동의할 수 있을 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행하는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행위를 하는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도구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는 알 수 없으며 인간의 자유를 위한 활동은 인식을 허용하지 않는다. 자유는 인간행위의 절대적인 예측 불가능성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책, 265-266p)


브로흐는 도움이 필요할 때 도움을 주기 위해서는 자신이 어떤 작업이나 활동도 즉각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인정했듯이 그는 문학이 "인식의 절대성에 대한 문학의 의무"를 만족시킬 수 있는 것인가를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에 문학을 포기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같은 책, 269p)



8장 - 발터 베냐민


프루스트는 "작품을 집필하느라고 세상을 제대로 경험하지도 못한 채 죽었다. 그는 무지로 죽었다. ……그는 불을 붙일 줄도 창문을 열 줄도 몰랐기 때문이다." 베냐민도 프루스트처럼 "삶의 조건이 그를 내리누를 때까지도" 그것을 전혀 바꿀 수 없었다. (몽유병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의 서투름은 그를 불운의 한가운데 또는 그런 유의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 곳으로 그를 몰아갔다. 따라서 베냐민은 1939-40년 겨울에 공습의 위험이 다가옴에 다라 보다 안전한 곳을 찾아 파리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물론 파리에 폭탄이 떨어진 적은 없었짐나 베냐민이 피신한 모Meaux는 군대 집결지로서 당시 수개월 동안 전투 없는 전쟁으로 프랑스에서 심각한 위험에 처했던 몇몇 장소들 가운데 하나였다.) (같은 책, 281p)


베냐민은 브레히트 자신의 표현인 "서투른 사유"(das plumpe Denken)를 브레히트와 함께 실행에 옮겼다. 브레히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요한 것은 서투르게 사유하는 법을 배우는 일이다. 서투른 사유, 그것은 위대한 것의 사유다." 그는 설명을 통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덧붙였다. "미세한 것의 애호가를 변증가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조야한 사유가 오히려 변증법적 사유의 중요한 부분을 이룬다. 이들은 이론을 실천으로 전환하는 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사유는 행위로 존재하기 위해서는 서툴러야 한다." (같은 책, 293-294p)


우리는 베냐민의 생애를 어디서 들여다보든 언제나 작은 곱사등이를 만날 것이다. 제3국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부터 작은 곱사등이는 사악한 술책을 부렸으며, 아울러 원고를 읽고 잡지를 편집하는 대가로 베냐민에게 연봉 지불을 약속했던 출판사를 잡지 첫 호도 내지 못한 채 파산케 했다. 그 후 작은 곱사등이는 많은 노력을 들여 매우 진기한 주해를 첨가한 방대한 독일인 편지 모음집의 출판을 허락했다. 『독일인』이라는 제목 아래 "명성 없는 명예, 허식 없는 위대성, 그리고 보수 없는 존엄에 대해서"라는 구절이 있다. 베냐민은 나치 독일에서 데어레트 홀츠(Derlet Holz)라는 익명으로 서명한 선집의 출간을 기대했으나 파산한 스위스 출판사의 지하실에 책이 배포되지 못한 채 사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962년 이 지하실 속에서 출판본이 발견되었지만 신판은 이때 이미 독일에서 출판되었다. (사람들은 역시 잘 되어 갈 일들이 처음에 불쾌한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작은 곱사등이 탓으로 돌리려고 했다. 그 좋은 예는 알렉시스 생-레제[생-종 페르스]의 『원정』Anabase의 번역이다. 베냐민은 이 작품을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루스트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호프만슈탈이 맡긴 일이었기 때문에 이 책의 번역을 마쳤다. 이 번역서는 전후까지 독일에서 출판되지 않았다. 그러나 베냐민은 출판문제 때문에 레제와 접촉했다. 외교관이었던 레제는 전쟁 중 프랑스에서 베냐민의 두 번째 억류를 면제토록 프랑스 정부와 교섭하고 설득할 수 있었다. 이런 일은 극소수의 망명자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었다) 그런 이후에 "수많은 불길한 여파"가 불운의 뒤를 이었다. 그가 스페인 국경에서 비극적 결말을 당하기 이전에 1938년 이후 줄곧 느꼈던 위협은 마지막 불길한 여파였다. 그는 파리에서 생활하는 동안 유일한 "물질적·정신적 지지자"였던 뉴욕의 사회조사연구소가 그를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1939년 4월 날짜의 서신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유럽에 있는 동안 내 입장을 크게 위협했던 상황 때문에 나의 미국 이민은 아마도 불가능할 것 같다." 1938년 11월, 보들레르 연구논문의 첫 번째 출간을 거절하는 아도르노의 편지가 그에게 가한 '타격'은 그때까지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같은 책, 295-296p)


이 시기에 상류층이나 중류층의 자제들은 노동을 하지 않고도 충분한 수입을 확보했다. 베냐민은 파리의 경험을 통해 산보하며 사유하는 산책, 즉 19세기식의 은밀한 거동의 의미를 알게 되었을 때 프랑스 문학에 대한 취향에 자연스럽게 자극을 받았으며, 이로 말미암아 독일의 정상적인 지적 삶으로부터 거의 영원히 멀어지게 되었다. 그는 1927년 호프만슈탈에게 보낸 편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나는 독일에서는 업무를 수행하고 관심사를 쫓느라고 내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었다는 감정을 느꼈지만 프랑스에서는 지로두(Giraudoux), 특별히 아라공과 같이 영향력을 지닌 작가들이 있는데, 내가 창작활동에서 찾는 초현실주의 운동은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이다." 베냐민은 "모스크바 여행"에서 돌아와 공산주의 깃발 아래 문학활동을 추진하기 어렵다는 것을 확신하고 "파리에서의 지위"를 굳히기 시작했다. (8년 전 베냐민은 페기Charles Peguy가 자신을 고무시켰던 "놀랄 만한 친근감"을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어떤 책도 나를 그렇게나 강하게 감동시키지 못했으며 동료의식을 주지는 못했다.") 사실 그는 무엇인가를 굳히는 데 성공하지 못했으며, 성공이 가능한 상황은 아니었다. 전후 파리에서만 외국인들―아마도 프랑스에서 태어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을 오늘날까지 파리에서 부르는 명칭―은 지금까지 '직장'을 얻을 수 없었다. 다른 한편 베냐민은 실제로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았던 위치, 사실 이후까지 있는 그대로 확인되고 분류될 수 없던 위치로 몰렸다. (같은 책, 303-304p)


베냐민은 분명 이러한 직업 선택의 동기를 젊은 시절 프랑스로부터 받은 영향으로 돌렸으며, 자신에게 강한 친근감을 불어넣은 라인강 저편 위대한 이웃 국가의 인접성으로 돌렸다. 그러나 이러한 직업 선택도 실제로 궁핍한 시기와 재정적 고통에 의해 촉진된다는 사실은 훨씬 더 특징적이다. (같은 책, 306p)


이러한 상황은 전쟁 이후 갑자기 바뀌었다. 부르주아 계급의 대다수가 인플레이션으로 궁핍해지고 심지어 파산하기도 했으며,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대학교수직은 기독교로 개종하지 않은 유대인들에게도 개방되었다. 대학교수 자격증 획득을 둘러싼 불행한 이야기는 베냐민이 이러한 변화된 상황에 얼마나 신경을 쓰지 않았는가를, 그리고 그가 모든 재정문제에 대해서 전쟁 이전의 관념에 얼마나 강하게 지배되었는가를 명백하게 보여주고 있다. 베냐민은 처음부터 "공식적인 인정의 증명서"를 통해…… 아버지에게 언동을 신중히 하도록 공식적으로 알리려는 의도로, 그리고 아버지가 사회적 지위에 부응하는 충분한 생계비를 당시 이미 30대에 들어선 아들에게 지급해 주기를 바라는 의도로 대학교수 자격증 획득을 고려했기 때문이다. 그는 이미 공산주의자들과 친밀해졌을 때에도 부모와의 오랜 마찰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이러한 지원을 받을 자격이 있으며 "생계비를 벌기 위해 일하라"는 가족의 요구가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결코 의심한 적이 업었다. 아버지는 아들이 대학교수 자격증을 획득하더라도 매달 보내고 있는 지원금을 늘릴 수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다고 이후 밝혔을 때 베냐민의 모든 계획은 당연하게도 그 기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베냐민은 1930년 부모가 사망할 때까지 부모의 집으로 이사함으로써 생계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으며, 이곳에서 처음으로 가족(아내와 외아들)과 함께 생활하다가 곧 벼거하여 혼자 살았다(그는 1930년까지 이혼하지 않았다). 분명 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해 매우 고통스러워했지만 모든 가능성 속에서 이외의 다른 해결책을 결코 진지하게 고려하지도 않았다. 특이하게도 그는 이러한 만성적인 재정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 몇 년 동안 그의 장서를 계속 확장하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사치스러운 열정을 끊으려는 한 번의 시도―다른 사람들이 도박장을 출입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는 커다란 경매장을 찾았다―와 "긴급한 경우" 장서의 일부를 팔겠다는 결의는 책들을 새롭게 구입함으로써 이러한 결의에 따르는 고통을 없애야 한다는 감정에 압도되어 버렸다. 집안에 재정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베냐민의 증명 가능한 한 번의 시도도 결국 아버지가 "고서점에서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자금"을 그에게 즉시 제공하겠다는 제안으로 곧바로 무산되어 버렸다. 베냐민은 이 일을 유일한 돈벌이로 생각했지만 이로부터 아무런 이득도 얻지 못했다. (같은 책, 307-308p)


어쨌든 베냐민의 경우에 매달 받는 지원금이 유일한 형태의 수입이었으며, 그는 부모가 돌아가신 다음에도 이 수당을 받기 위해 많은 일을 준비하고 노력했다. 즉 그는 시온주의자들이 자신들에게 좋은 도움이 됟나고 생각할 경우 매달 300마르크를 벌고자 히브리어를 연구하려고 준비했고, 온갖 매개적 수사를 사용하여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거래할 다른 방법이 없을 경우 1,000프랑을 벌고자 변증법적으로 생각하려고 준비했다. 궁핍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이후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존경할 만한 가치가 있다. (같은 책, 310-311p)


라루스(Pierre Athanase Larousse)도 문필가로 정의하고 있는 후세의 작가나 문학자(ecriains et litterateurs)와는 달리 이들은 비록 글을 쓰고 출판하는 세계 속에서 살고 있고 무엇보다도 책 속에 묻혀 살고 있었지만 생계유지를 위해 직업적으로 글을 쓰거나 읽으려 하지는 않았다. 전문가나 공무원으로 국가에 봉사하거나 오락이나 교육을 위해 사회에 봉사하는 지식인 계급과 달리 문필가들은 항상 국가와 사회로부터 모두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그들의 물질생활은 집필작업을 통해 얻지 않은 수입에 의하여 보장되며, 그들의 지적 태도는 정치적·사회적으로도 통합되는 것에 대한 단호한 거부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그들은 이러한 이중적 독립에 입각해 우월ㅈ럭인 거드름의 태도를 보였다. 이러한 태도는 인간의 행태에 대한 라 로슈푸코(La Rochefoucauld)의 경멸적인 통찰, 몽테뉴(Michel Eyquem de Montaigne)의 세속적인 지혜, 파스칼 사상의 경구적 성향, 몽테스키외(Charles Louis de Secondat Montesquieu)의 정치적 성찰의 대담성과 공평성 등을 낳게 했다. (같은 책, 311-312p)


그가 시온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오락가락 왔다갔다 했듯이 편지에서 우유뷰단함을 보인 것은 진실로 그의 통렬한 통찰에 기인하는 것 같다. 그는 모든 해결책이 객관적으로 허구적이며, 실재와 어울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자신을 개인적으로 구언의 거짓말(모스크바의 구원이든 예루살렘의 구원이든)로 인도할 것이라고 예리하게 파악했다. (같은 책, 323p)



9장 - 베르톨트 브레히트


그가 동베를린에 사는 동안 집필하여 출판했던 스탈린 송시(頌詩)나 스탈린 범죄에 대한 찬가는 그의 저작집에 빠져 있는데 이것은 어떻게 된 일인가? 그는 자신이 한 일을 알지 못했는가? 그는 잘 알고 있었다. "지난 밤 꿈에서 나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보았다. 마치 문둥이를 가리키듯. 그 손가락들 헤어지고 부러졌더라. '너희들은 아무것도 몰라!' 나는 죄의식에 사로잡혀서 소리쳤다." (같은 책, 351-352p)


죽음을 제외하고 시인이 감내할 수 있는 유일한 의미 있는 형벌은 물론 인간의 생애를 통해 천부적 재능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갑자기 잃어버리는 일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359p)


브레히트는 이 7년 동안 서유럽 관객들로부터 주목을 받으며―실제로 그들의 보호 아래―평화롭게 살면서 활동했지만, 이제는 일찍이 자신이 체험했던 것보다 더 가까이서 지속적으로 전체주의 국가와 접촉하면서 자신의 눈으로 인민들의 고통을 목격했다. 결과는 브레히트가 이 7년 동안 한 편의 희곡도 쓰지 못했고 한 편의 훌륭한 시도 쓰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는 취리히에서 집필을 시작해 아마도 위대한 걸작 희곡들 가운데 하나가 되었을―에릭 벤틀리의 영역본으로 그 편린을 판단할 수밖에 없지만―『잘츠부르크의 죽음의 춤』(Salzburger Totentanz)을 완성하지도 못했다. 브레히트는 자신의 처지를 알았으며 동베를린에서 글을 쓸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보도에 따르면 그는 죽기 얼마 전 덴마크에 집을 샀으며 또한 스위스로 이사할 것을 고려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그보다 더 열망했던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벽에 못을 박지 마라. 웃옷을 의자에 놓아라…… 왜 외국어 문법책을 뒤적이는가? 고국에서 들리는 소식은 모국어로 쓰여 있는데"―그가 병석에 누워 있을 때 계획했던 것은 모두 망명이었다. (같은 책, 362-363p)


1898년에 태어난 브레히트는 이를테면 잃어버린 세 세대 가운데 첫 번째 세대에 속한다. 제1차 세계대전 당시 참호와 전쟁터를 통해 세계에 처음으로 참여한 브레히트 세대의 사람들, 즉 잃어버린 제1세대는 정상적인 삶을 영위하는 데 어울리지 못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잃어버린 세대라는 용어를 만들거나 채택했다. 이 세대를 인간으로 만들어준 정상심리는 공포에 대한 모든 경험의 포기이고, 공포 속에서도 발현되는 동지애였으며, 그들은 자신들의 것을 포기하기보다 이제는 세계뿐만 아니라 자신들에게도 영향을 받지 않는 쪽을 택했다. 이후 등장한 "잃어버린 두 세대"가 결국 첫째 세대를 잇게 되었을 때 모든 나라의 전쟁 참전 용사들에게 공통된 태도는 일종의 시대 흐름이 되었다. 제1세대보다 10년 늦은 1910년경에 태어난 제2세대는 인플레이션, 대량실업, 혁명적 불안에 대한 오히려 인상적인 교훈을 통해서 4년 이상의 살육 이후 남아 있던 모든 것의 불안정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10년 후 1920년대 태어난 제3세대는 나치 강제수용소, 스페인 내란, 또는 모스크바 재판을 통해 세계에 접촉할 기회를 가졌다. 대략 1890년부터 1920년 사이에 태어난 이들 세 그룹은 병사, 망명자, 추방자로서, 또는 저항운동의 일원이자 집단수용소와 학살수용소의 포로로서, 또는 폭탄의 우박 속에 노출되어 있던 시민으로서, 도시의 생존자로서 제2차 세계대전 중 단일집단을 형성할 정도로 상당히 가까운 연령대에 있었다. (같은 책, 364-365p)



그는 그들의 걱정거리에 대해 말한다.

그들은 또한 그에게 질문한다. 그런데 당신 사정은 어떤가?

그리고 그는 웃으면서 사방을 바라보네

잠시 주저하다, 아무 일도 없소.


잠시 동안 매사는 순조롭게 진행된다. 어부들이 그에게 "당신 자신의 일은 어떻습니까"라고 물었을 때 그는 머뭇거리며 웃다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어부들이 다음과 같이 말하는 날이 닥쳐왔다.


어느 날 그들 중 누가 그에게 묻기를,

왜 당신은 우리에게 왔는가?

분위기가 바뀌었음을 알아채자 

그는 서둘러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부들의 분위기가 왜 바뀌었는지를 알게 된다. 그에게 주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는 처음 왔을 때는 환영받았지만 결코 초대를 받지 않았다. 그가 한 일은 그들의 일상 대화를 풍부하게 한 게 다였기 때문이다.


이렇게, 설득하고 반박하면서

그는 그들과 함께 교제했으며

그는 언제나 초대받지 않고 왔다.

그는 역시 존재의 가치가 있었다.


그들이 그에게 더 많은 것을 바랄 때 "그는 쫓겨난 하인처럼 얌전하게 길을 떠날 것이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그림자도, 흔적도 남아 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의 동의와 승낙으로 그보다 빼어난 누군가가 그의 자리를 물려받을 것이다. 진실로 그가 침묵하는 곳에서 누군가가 말하는 것을 막지는 않는다."


제공할 아무것도 갖지 않 자, 정중하게

문으로 나갈 것이다: 해고된 하인

그리고 그의 앞에는 작은 그림자도 있지 않고

의자의 덮게 천에는 오목하게 파인 자리도 없다.


그러나 그는 허락하네, 자신의 자리에서

다른 사람이 풍부하게 표현하는 것을.

실제로 그는 아무것도 거절하지 않고

그가 침묵하는 곳에서 읽는 것을.


이 자화상, 젊은 시인에 대한 브레히트의 생생한 묘사―물론 이것이 참모습이기 때문에―는 후일의 시인을 보여주고 있다. (이상 같은 책, 367-369p)



다시 말하자면 그는 이런 사람으로 보였다. 그는 문제의 핵심을 포착하는 날카롭고, 비이론적이며, 비관조적인 지성을 천부적으로 지녔고, 과묵하며, 자신을 드러내기를 싫어하고, 거리를 유지하면서 부끄러움이 많았으며, 하여튼 자신의 일에는 관심이 없으면서 놀라울 정도로 호기심이 강했다(『서푼짜리 오페라』의 「솔로몬의 노래」에서 자신을 "현명하기를 열망하는 브레히트"라고 스스로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도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해야만 하고, 모든 사람이 침묵할 때 침묵할 수 없으며, 모든 사람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 많이 이야기하지 않으려고 했던 시인이었다. 그는 제1차 세계대전이 발생하던 해에 16세였으며 전쟁이 끝나는 해에 위생병으로 징집되었다. 그때 세계는 그에게 무의미한 살육의 장면으로 비쳤으며 언어는 연설의 성낸 목소리로 울렸다. (같은 책, 378-379p)


그러나 초기의 시작(詩作)에 결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전쟁 그 자체라기보다는 윙거(Ernst Junger)의 『강철의 폭풍』(Stahlgewitter)에서도 묘사하고 있듯이 전쟁으로 나타난 세계였다. 이 세계는 하나의 특성을 갖추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것을 거론하지 않았다. 다만 사르트르(Sartre)만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이를 다음과 같이 정확하게 묘사하고 있다. "도구가 부서져 사용할 수 없고, 계획은 중단되고 노력은 무의미하게 되었을 때 세계는 공허 속에서 궤도 없이 멈추고 어린아이처럼 무섭게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난다." (같은 책, 379p)


브레히트의 눈에 비치듯이 4년간의 파괴는 세계를 말끔히 씻어버렸으며, 그 폭풍은 모든 인간의 흔적, 즉 문화적 대상과 도덕적 가치―확고한 평가깆누 및 도덕적 행위를 위한 견고한 안내 표지뿐만 아니라 확고한 일상적 사유의 표준 등―를 포함하여 사람들이 지킬 수 있었던 모든 것을 휩쓸어 갔다. 세계는 어느덧 창조의 날처럼 순수하고 새롭게 보였다. 요소들의 순수성, 하늘과 땅, 인간과 동물, 생명 자체의 간결성 이외는 아무것도 남아 있는 것 같지 않게 보였다. 따라서 젊은 시인이 사랑했던 것은 생명 그 자체였으며, 사랑은 존재하기 때문에 대지가 부여해야 하는 모든 것이었다. 그리고 전후 세계의 순진하고 소름 끼치는 신선함은 브레히트 초기 시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끔찍한 결백에 반영되고 있다. 그 주인공들은 바로 해적, 모험가, 영아 살해범, "사랑받는 돼지 말쿠스(Malchus)", 부모를 쳐 죽이고 "야생 백합"처럼 살아가는 야콥 아펠뵈크다. (같은 책, 379-380p)



이 서곡의 첫 연과 끝 연을 하나로 합쳐 생각하면 이 연들은 아주 훌륭하다.


바알이 하얀 어머니의 몸속에서 자라날 때

하늘은 그토록 공활하고 조용하며 희미하게 빛나고

어리고 발가벗어 끔찍하게 경이로웠다.

바알은 하늘을 사랑했다. 그가 이 세상에 왔을 때.


바알이 대지의 어두운 품에서 썩어갈 때

하늘은 여전히 공활하고 조용하며 희미하게 빛나고

어리고 발가벗어 끔찍하게 아름다웠다.

바알은 언젠가 그 모습을 사랑했다. 그가 이 세상에 있었을 때. (같은 책, 382-383p)



브레히트의 경우 신과 내세의 부재에 대한 생각은 불안이 아닌 공포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그리고 브레히트는 가톨릭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에 문제의 이러한 측면을 아주 순조롭게 파악했을 것이다. 그는 어떤 것이 천국에 대한 희망과 지옥에 대한 두려움을 갖고 지구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보다 더 좋은가를 분명히 생각했다. 그 자신의 내면에서 종교에 반항하는 것은 의혹도 아니고 욕구도 아니고 자존심이었다. 종교를 격렬하게 부정하고 지구의 신인 바알을 찬미하는 그의 내면에는 거의 폭발적인 감사의 마음이 존재한다. 그가 말하는 바와 같이 생명보다 위대한 것은 존재하지 않으며 그 이상의 어떤 것도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는다. 사람들은 허무주의를 지향하는 당시의 풍조나 그에 대한 반발에서 그러한 감사의 마음을 거의 마주치지 못할 것이다. (같은 책, 387p)


가난한 사람들의 거대한 흐름이 노도처럼 처음으로 유럽의 거리에 흘러넘쳤던 프랑스 혁명 이후에도 브레히트처럼 동정심에서 행동했거나 수치심 때문에 과학적 이론이나 무감각한 웅변술로 그들의 동정심을 숨겼던 혁명가들이 많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의 고통이 어둠 속에 남아 있고 인류의 기억 속에 기록되지도 않았다는 사실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의 상처받은 삶에 덧붙여진 모욕을 이해했던 혁명가들은 소수였다. (같은 책, 393p)


이 연구 앞부분에서 나는 시인에 대해서는 어떤 유의 행동과 자유를, 일상의 사태에서 우리가 서로 인정해 줄 수 없는 범위에까지 인정해 줄 것을 제안한 바 있다. 나는 이런 일이 많은 사람들의 정의감을 다치게 하는 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만약 브레히트가 오늘날가지 우리와 함께 살아 있다면 그가 이러한 예외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했을 것임은 분명하다(내가 앞서 언급한 그의 사후에 간행된 책 『메티:; 전환의 서』에서 그는 악에 빠져버린 "착한 사람"에 대한 심판을 제시하고 있다. 즉 그는 심문을 끝낸 뒤 다음과 같이 말한다. "들으라. 우리는 네가 우리의 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제 너를 벽 앞에 세울 것이다. 그러나 너의 공적과 덕행을 감안할 경우 그 벽은 좋은 벽이 될 것이며, 그리고 우리는 훌륭한 총에서 발사되는 훌륭한 총탄으로 너를 사살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좋은 삽으로 좋은 땅에 너를 묻어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 판단에서도 기준으로 삼고 있는 법 앞의 평등은 절대적인 기준이 아니다. 모든 판단은 용서로 통한다. 모든 판단의 행위는 용서의 행위로 바뀔 수 있다. 판단과 용서는 같은 동전의 다른 양면이다. 그러나 양면은 다른 규칙을 따른다. 법의 존엄성은 우리가 평등하다는 것을 요구한다. 즉 행위를 수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행위만이 중요하다. 반대로 용서행위는 사람을 고려한다. 어떤 용서도 살인이나 절도 자체를 용서하지는 않고 단지 살인자나 절도범을 용서한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지 결코 어떤 소행을 용서하지는 않는다. 이러한 주장은 우리가 사랑만이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우리는 사랑을 하든 하지 않든 사람 자체를 위해 용서를 한다. (같은 책, 407-408p)



11장 - 랜달 자렐


현대 비평가는 "자신이 비평하는 시나 소설이나 희곡을 위해" 존재하지 않고 "시나 소설이 어떻게 구성하는가"를 알고 있는 자신들을 위해 존재한다. 형편없는 작가는 그것들을 바로 구성했다. 이를테면 베이컨 품평회장에 돼지 한 마리가 어슬렁거린다면 "당신은 '돼지는 저리 가라! 네가 베이컨에 대해 무얼 아는가'라고 소리쳤을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자면 세상사람들은 시인을 환영하지 않고, 그의 탁월함에 대해 감사하지도 않으며, "이 세계의 사물을 언어 속에서 보고 느끼고 생기 있게 만든느 태초부터의 힘"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따라서 "시인은 결국 당신들은 나의 시를 읽지 않기 때문에 당신들이 나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라고 말할 때까지 세상사람들은 시인을 '애매해다'고 비난하고 '애매해서' 이해할 수 없다고 불평을 늘어놓는다. 이런 불만들은 모두 일상적인 것이어서 나는 처음에는 그가 왜 이런 문제로 고민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같은 책, 432p)



12장 - 팔순의 마르틴 하이데거


세계 속에 태어났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발생하며 이제 "있는 모든 것에 그득한 의미를 회상하듯이 반응적으로 사유하는" 이러한 열정적 사유는 삶과 마찬가지로 최종 목적―인지 또는 지식―을 가질 수 없다. 삶의 끝은 죽음이지만, 인간은 죽음 자체를 위해 살지는 않는다. 그는 살아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어떤 결과 자체를 위해 사유하지 않는다. 그는 "사유하는, 즉 사색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같은 책, 444p)


사람들은 친숙한 경험을 통해 용이하게 이 지점을 깨닫게 할 수 있다. 우리는 멀리 떨어진 장소에서 사물을 보기 위해 여행을 한다. 우리가 직접적인 인상능력을 더 이상 지니고 있지 않을 때―마치 사물들이 더 이상 현존하지 않을 때에만 의미를 드러내려는 듯이―이 과정에서 우리가 본 사물들은 종종 우연히 회고나 회상 속에서만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가 사유할 때 어디에 있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고 싶다면 이런 관계의 전도―사유는 가까이 있는 것을 제거하고, 즉 가까운 것에서 이탈하고 먼 것을 가까이 끌어들이는―는 결정적이다. (같은 책, 448-449p)


의지의 관점에서 볼 때 사상가들은 단지 외형상 역설로 "나는 비의지를 의지한다"라고 말해야 한다. 우리는 단지 "이를 통해서" 그리고 "우리가 의지를 중단할 때에만" 우리 자신을 "의지가 아닌, 탐구된 사유의 본질에 풀어줄 수 있기 때문이다." (같은 책, 453-454p)



15장 - 위스턴 휴 오든


찬사는 이러한 시행의 핵심어이며, "가능한 모든 세계의 가장 좋은 것"에 대한 찬사―하느님의 창조를 정당화하는 것이 시인(또는 철학자)에게 마치 달려 있기라도 한 듯이―가 아니라 이 지구상의 인간 조건에서 가장 불만족스러운 모든 것에 맞서 이야기하고 상처 부위에서 그 자체의 힘을 빨아들이는 찬사다. 고대 그리스 음유시인들은 자신들이 이야기를 하고 노래를 부를 수 있도록 신들이 인간들을 향해 불행과 악한 것을 이야기한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다. (같은 책, 49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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