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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Apr 27. 2022

한나 아렌트 #4 - 발데마르 구리안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10장

1


한나 아렌트는 우정을 정말이지 중요시했구나, 라는 생각을 다시금 들게 한다. 아래에 써둔 파트 2('타인의 삶' 매거진 글들의 파트 2는 필사를 위한 공간이다)의 첫 번째 필사는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10장을 시작하는 문단이다.


나에게는 특별히 그(그리고 한나 아렌트)가 생각하는 '이야기'의 관점이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특히나 매거진 '타인의 삶'을 시작하면서 가졌던 문제의식과 닿아 있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아, 그런 부분들을 짧게 인용해두었다. 나는 어떤 사람의 어떤 면을 비추고 싶어하는가? '대단하다'는 말은 어떤 경우에 붙여야 하는 말인가? 누구를 존경하는가? 한 사람의 삶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만들고 활동하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생산하거나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으로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매번 작업하고 성취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성과의 여전히 소진되지 않으며 소진될 수 없는 근원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성과를 넘어 그 자체의 본질을 유지하고 그 성과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으며 제한되지 않는 상태로 있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가장 위대한 특권이라는 것을 종종 잊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즐겁게 이러한 특권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자신들이 행한 것을 자신들과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지성이나 일 또는 재능을 과시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 그러한 주목할 만한 결과는 진정 그러한 동일화의 산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가 아무리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태도는 불가피하게 위대성의 특별한 인간적 특성, 수행된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함을 상실한다. 재능의 위대성과 인간의 더 큰 위대성 사이의 투쟁이 매우 격렬한 예술작품에서도 진정한 위대성은 우리가 접촉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산물의 배후에서 더 위대하고 신비스럽게 있는 존재를 감지하는 곳에서만 나타난다. 작품 자체가 그 배후에 있는 인간을 지시하는 것이며 그 인간의 본질은 그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에 따라 고갈되어 버리거나 완전히 표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10장, 419-420p)


그것은 한 번 보고 두 번 봐도 공통점이 없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다만 운이 나빴거나 별난 재주 때문에 자신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고, 가장 존경할 만한 존경심의 기준마저 반드시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체계적으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책, 420p)


구리안은 언제나 그들의 친구가 되었으며 그들을 인생의 끝까지 무분별하고 천박한 동정심과는 다른 열정으로 쫓아갔다. 그를 매료시킨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드라마 그 자체였으며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듣는 것이었으며, 그는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그런 게 삶이고, 그런 게 삶이라고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는 삶이 그 자체의 이야기, 일상적 슬픈 결과를 지니면서도 나쁜 결말의 연속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뽑아서 쓰는 사람들에게 깊고 성실한 존경의 마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이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려 하지 않았듯 아무런 연민의 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행한 유일한 것(물론 그가 할 수 있었던 도움은 별도로 하고)은 그의 힘이 미치는 한 사회가 불행이라는 상처에 덧붙이는 굴욕의 모욕을 벗기기 위해서 그들을 의도적으로 사회에 나가게끔 했고 그의 다른 친구들과 사귀게 되었다. (같은 책, 424p)



발데마르 구리안에 관심이 가고, 브런치 글을 쓰기엔『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 나온 내용만으로는 뭔가 부족하다 싶었다. 조금 더 읽고 브런치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에 그에 관한 저작이나 그가 직접 쓴 책을 검색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 『바이마르의 세기』라는 책에서 그나마 그의 인격주의적 민주주의에 대해 다루고 있었지만 직접 책을 보니 한나 아렌트의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에서 바라보는 발데마르 구리안과는 너무 다른 관점이고 무엇보다 내가 관심이 가지 않아 적당히 읽고 말았다. 혹여나 영어로 된 자료가 있나 싶어 검색해봐도 돈을 내고 보아야 하는 논문들이 너무 많았다. 한동안은 만날 일이 거의 없지 싶어, 발데마르 구리안에 대한 것들을 이 정도로만 해서 브런치에 올려두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논문은 왜 돈을 내고 봐야 하는 걸까?



(인정받기 위해 논문을 출판하고 알려야 하는 연구자, 연구자의 논문을 팔아서 먹고 살아야 하는 출판사, 그리고 그 연구 논문에 접근해야 하는 연구자 및 일반인 등이 얽힌 일인 것 같다. 자세한 것들은 아래 링크 참조


[김우재의 보통과학자]과학 논문도 변해야 한다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33647

"논문 열람비용 장벽 없앤다"…'오픈 엑세스 코리아' 시동 https://www.hellodd.com/news/articleView.html?idxno=32586

돈 없어 논문 못 본다고? '사이허브'로 오라 https://www.bloter.net/newsView/blt201607190001

[Business] 과학출판계 화두 ‘오픈 사이언스’ http://www.economyinsight.co.kr/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3101

[야! 한국 사회] ‘학술 시장’의 부패 / 김우재 https://www.hani.co.kr/arti/opinion/column/854519.html

[김우재의 보통과학자] 맬서스의 학위공장, 그리고 과학기술인협회 https://www.dongascience.com/news.php?idx=3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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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구리안(Waldemar Gurian, 1903-54)은 친구가 많았으며 그 많은 사람들의 친구였다. 그들 가운데 남자도 여자도 성직자도 평신도도 있었으며 많은 나라의 사람들, 실제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우정은 이 세상에서 그를 안락하게 해준 것이었으며, 그는 나라와 언어, 사회적 배경과 무관하게 친구가 존재하는 곳이면 어디서든 편안함을 느꼈다. 그는 자신의 병세가 깊어짐을 알고 마지막 유럽 여행길에 오르는데, 그의 말대로 그것은 "죽기 전 친구들한테 고별인사를 하러 가기 위한" 것이었다. 그는 유럽에서 돌아와 뉴욕에서 며칠 머물면서도 같은 일을 되풀이했으며, 공포나 자기 연민, 감상의 흔적도 없이 의식적이고도 체계적이게 치렀다. 일생을 통해서 극도로 당혹감을 느낀 경우를 제외하고는 결코 개인적 감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구리안은 당혹감을 느끼거나 드러내지 않은 채 일종의 비인격적인 방법으로 개인적 감정을 표현했다. 죽음은 그에게 매우 친숙했던 것임이 틀림없다.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10장, 411-412p)


나는 구리안이 어린 시절에 겪었던 세 가지 단절, 즉 가정의 해체, 모국 및 모국어와의 단절, 가톨릭으로의 개종을 포함한 사회 환경의 완전한 변화(그는 종교적 갈등을 경험하기에는 아직 어렸을 뿐만 아니라 개종 전에 다른 종교 교육을 거의 받지 않았다)가 과연 그의 인격 형성에 얼마나 깊은 상처를 남겼는지를 자세히 모른다. 또한, 나는 이러한 단절이 그의 인격의 별스러움을 설명하는 데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앞서 설명한 몇 가지 사항을 통해 그가 그러한 상처를 입었다고 하더라도 성실함을 통해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있는 본질적 요소에 충실함으로써 상처를 분명히 치유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같은 책, 414-415p)


그의 기억은 어떤 사물이나 어떤 사람도 방치하도록 허용하지 않기라도 하듯이 잊히지 않고 무엇인가에 사로잡힌 듯한 특성을 지녔다. 그의 기억은 객관적 성공을 위한 주요 수단들 가운데 하나가 된 곳에서 학문이나 학식에 필요한 능력보다 더 큰 의미를 지녔다. 그의 학식은 오히려 다른 형태로 나타난 충실성의 거대한 능력일 뿐이었다. 그는 이러한 충실성 때문에 도움을 필요로 하는 친구들뿐만 아니라 결코 만나 보지 못했으며 보고 싶지 않았다 하더라도 친구들이 죽은 뒤 그 자식들을 무조건적으로 도와주었다. 마찬가지로 그는 이러한 충실성 때문에 모든 작가들을 만날 수 없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자신의 관심을 불러일으켰거나 자신에게 충족감을 주는 모든 저자들의 저작들을 읽었다. (같은 책, 415p)


그의 호기심은 학자나 전문가의 흔히 생명력 없는 그런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의 호기심을 자극한 것은 엄격히 말해 인간세계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즉 평범한 소문, 하잘것없는 이야기, 매일매일 읽어야 하는 수많은 신문뿐만 아니라 정치·문학·철학과 신학이었다. (같은 책, 418p)


우리가 인위적인 사물세계에서 그렇게 편안하게 이동하는 데 익숙하다는 그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는 만들고 활동하는 것을 우리 자신과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모든 사람들이 생산하거나 성취할 수 있는 어떤 것보다 훨씬 더 본질적으로 항구적으로 존재하는 것, 즉 매번 작업하고 성취한 이후에도 지속적인 성과의 여전히 소진되지 않으며 소진될 수 없는 근원으로 존재할 뿐만 아니라 모든 성과를 넘어 그 자체의 본질을 유지하고 그 성과에 의해 영향을 받지 않으며 제한되지 않는 상태로 있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가장 위대한 특권이라는 것을 종종 잊고 있다. 우리는 어떻게 사람들은 일상적으로 즐겁게 이러한 특권을 잃어버리고 있으며 자신들이 행한 것을 자신들과 완전히 동일시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지성이나 일 또는 재능을 과시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 그러한 주목할 만한 결과는 진정 그러한 동일화의 산물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가 아무리 인상적이라고 하더라도 이러한 태도는 불가피하게 위대성의 특별한 인간적 특성, 수행된 어떤 것보다 더 위대함을 상실한다. 재능의 위대성과 인간의 더 큰 위대성 사이의 투쟁이 매우 격렬한 예술작품에서도 진정한 위대성은 우리가 접촉할 수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산물의 배후에서 더 위대하고 신비스럽게 있는 존재를 감지하는 곳에서만 나타난다. 작품 자체가 그 배후에 있는 인간을 지시하는 것이며 그 인간의 본질은 그가 어떤 힘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그것에 따라 고갈되어 버리거나 완전히 표현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같은 책, 419-420p)


이렇듯 위대성의 특별한 인간적 특성, 실존 자체의 수준, 강도, 깊이, 열정성은 예의적일 정도로 그에게 알려졌다. 구리안은 자기 자신을 세계에서 가장 자연스러운 것으로 소유하려 했기 때문에 어떤 지위나 업적에 관계없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서 탐색할 수 있는 전문가였다. 그는 이러한 일을 하는 데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다. 또한 이것은 그의 궁극적 판단기준이 되었으며, 그는 이러한 기준을 선호하여 세속적 성공의 매우 피상적인 척도뿐만 아니라 다른 한편 완전히 알려져 있는 정당한 객관적 기준도 무시했다. 한 사람이 성질과 적합성에 관해 잘못되지 않은 감각을 지녔다고 말할 때 그것은 예사롭게 들리는 말 같기도 하고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들리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러한 감각을 소유하고 그것을 보다 쉽게 인식할 수 있고 받아들일 수 있는 가치로 바꾸지 않겠다고 선택한 흔치 않은 경우에도 그러한 감각은 확실히 그들을 멀리―사회의 인습과 기존의 기준을 훨씬 넘어서―끌고 가서 그들을 물체의 벽이나 객관적 평가의 지지로도 막을 수 없는 위험한 인생으로 곧장 몰고 가버린다. 그것은 한 번 보고 두 번 봐도 공통점이 없는 사람과 친구가 되는 것을 의미하며, 다만 운이 나빴거나 별난 재주 때문에 자신을 충분히 발휘하지 못한 사람들을 끊임없이 발견하는 것을 의미하고, 가장 존경할 만한 존경심의 기준마저 반드시 의식적이지는 않지만 체계적으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많은 사람들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많은 반대 때문에 다치기 쉬우며 잘못된 오해를 부르기 쉬운 일종의 삶으로 이끌어 간다. (같은 책, 420p)


문제는 당혹스러운 상황이 최상의 용기 있는 노력으로 인간이 자유롭게 보여줄 수 있는 무방비상태의 자아를 각광 속으로 끌어들인다는 점이다. 당혹은 그의 인생에서 커다란 역할을 했다(그는 이것을 두려워했을 뿐만 아니라 이것에 매력을 느끼기도 했다). (같은 책, 423p)


굴욕은 당혹의 극단적인 것이다. 빼앗긴 사람들, 학대받는 사람들, 또는 삶과 세상 사람들이 심하게 대우했던 사람들, 부당하게 취급된 사람들에 대한 진정한 열정은 구리안의 내면에 사실 인습과 권력에 대한 반항의 충동과 결합되고 밀접하게 연계되었다. 일상적으로는 지성과 정신적 창조를 보는 일에 매력을 느꼈던 구리안은 이런 경우에서는 자신의 다른 모든 기반을 잊어버리고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공포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방식을 벗어나 이들을 만났다. 구리안은 언제나 그들의 친구가 되었으며 그들을 인생의 끝까지 무분별하고 천박한 동정심과는 다른 열정으로 쫓아갔다. 그를 매료시킨 것은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드라마 그 자체였으며 무언가 새로운 정보를 듣는 것이었으며, 그는 끊임없이 되풀이해서 그런 게 삶이고, 그런 게 삶이라고 자신에게 되뇌었다. 그는 삶이 그 자체의 이야기, 일상적 슬픈 결과를 지니면서도 나쁜 결말의 연속처럼 보이는 이야기를 뽑아서 쓰는 사람들에게 깊고 성실한 존경의 마음을 보였다. 그리고 그는 이 사람들에게 연민의 정을 보내려 하지 않았듯 아무런 연민의 정도 보이지 않았다. 그가 행한 유일한 것(물론 그가 할 수 있었던 도움은 별도로 하고)은 그의 힘이 미치는 한 사회가 불행이라는 상처에 덧붙이는 굴욕의 모욕을 벗기기 위해서 그들을 의도적으로 사회에 나가게끔 했고 그의 다른 친구들과 사귀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삶과 세계의 극적인 현실은 빼앗긴 사람들, 쫓겨난 사람들의 무리 밖에서는 완성될 수도 없고 전개될 수도 없는 것이다. (같은 책, 424p)


그는 개신교와 가톨릭의 가르침 덕택에 세계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지 못하는 세계 속의 이방인으로서, 동시에 현실주의자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했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다. 그는 세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종하는 것은 그의 경우 쉬웠을 것이다. 모든 가능성 속에서 보다 큰 유혹, 어떤 이상주의로 도피하려는 것은 그에게서 더욱 쉬운 일이었을 것이다. 그의 정신적 실존 전체는 결코 맹종하거나 도피하지 않는 결단 위에 수립된 것이었다. 이것은 용기 위에 수립된 것이라는 것과 같은 말일 뿐이다. 그는 언제나 이방인이었으며 그가 올 때마다 그는 마치 지금 어딘지 모르는 곳에 도착한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세상을 떠나자 그의 친구들은 자신의 가족 한 사람이 떠나가 버린듯 슬퍼했다. 그는 우리 모두가 해야 할 일을 달성했다. 그는 자신의 집을 이 세계 속에 세웠으며 우정을 통해 이 지상에서 편안함을 누렸다. (같은 책, 42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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