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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Apr 23. 2022

한나 아렌트 #3 - 이자크 디네센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1


이자크 디네센. 한나 아렌트의 책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6장에 나온 사람이다. 전에 글을 쓴 레싱과 마찬가지로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다. 오히려 2장의 로자 룩셈부르크, 4장과 5장의 카를 야스퍼스는 들어본 사람들이었지만, 텍스트가 너무 난해해서 그들의 삶에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적당히 에둘러 읽으며 6장에 이르러 이자크 디네센을 만났다. 누군가 해서 찾아보니 국내에 책 몇 권이 번역된 소설가였다. 그녀의 자전적 소설이라 할 수 있는 『아웃 오브 아프리카』(영화화 되기도 했다)는 필명 '이자크 디네센'이 아닌 본명 '카렌 블릭센'으로 국내에 소개되어 있다. 두 이름은 같은 작가를 가리키니 참고하면 좋다.


내가 그녀의 삶에 매료된 것은 아마도 요즘의 우리가 믿고 신봉하는 '준비되어 미리 만들어진 삶'과는 다른 궤적을 그려온 사람이어서인 듯하다.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삶과 연인을 잃어버린 슬픔이 계기가 되어 작가가 되었"(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193p). 그녀의 나이 50세가 다 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그녀는 20세 때 몇 편의 단편소설을 출간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문학에 더 발을 들이지 않았다. "작가가 되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무엇에 빠져드는 것을 직관적으로 두려워했다."(같은 책, 192p) 그 뒤에 그녀는 27세가 되어 부유한 덴마크 상류 귀족 집안의 한 남성과 결혼하게 된다. 그런데 한나 아렌트의 관점에서 이는 아버지의 영향이다.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가 10살 때 자살한다. 그리고 그 아버지에게는 오랫동안 사모했던 "공주"가 있었다. 그 공주는 20살의 나이로 죽었던 그의 사촌형제였다. "그 결과 딸의 가장 큰 열망은 아버지의 친척 가운데 이 사촌 집안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이자크 디네센은 그 상류 귀족 집안의 청년을 좋아했지만, 그 청년이 그녀에게 마음이 없자 그 청년의 쌍둥이 동생과 결혼하게 된다. "이 사건은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고뇌와 경악을 불러일으켰다."(이상 같은 책, 211p)


"이해하기 어려운 결혼 사건"(같은 책, 211p)은 심지어 그녀에게 성병을 가져다준다. 디네센의 비서에 의하면 그녀는 "병이라는 무서운 강적에 대해 장렬하게 투쟁하느라고" "여생을 소진했"(이상 같은 책, 198p)다. 그리 좋지 못했던 결혼생활은 남편과의 이혼으로 끝난다. 물론 그녀는 "남편의 이름과 작위를 계속 유지했다." 이자크 디네센의 전기를 쓴 작가에 의하면 그녀는 '남작 부인'이라고 지칭되는 것에 만족했던 것 같다. 이혼을 끝으로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꾸렸던 삶, 가정, 그리고 또다른 연인마저 모두 잃는다. "비탄과 비애와 추억 이외에 수중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완전히 실패하여 룽스테드룬트에 있는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녀는 이런 경우를 당하지 않았을 때 기대할 수 없었던 작가가 되었으며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이상 같은 책, 196p)


한 편의 영화 같으면서도, 자세히 살펴보면 아주 긴 호흡으로 흘러갔던 그녀의 인생을 두고 '역시 인생은 모른다'는 상투적인 맺음말로 끝내고 싶지 않다. 그저 직관적으로 무엇엔가 빠지는 것을 두려워했던 그녀에 대해서, "여생을 소진한다"는 단어까지 동원해야 했던 성병에 대해 그녀는 어떤 생각이었는지에 대해서, 그럼에도 남편의 이름과 작위는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지에 대해서, 어렸을 때 그녀의 아버지의 영향으로 했던 결혼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본다. 그녀는 자신의 많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다. "어느 누구도 분명히 그녀의 삶을 제대로 이야기할 수 없었다."(같은 책, 199p) 그녀에게는 다만 "신은 농담을 좋아한다"(같은 책, 193p)는 말이 여생의 좌우명이었다고 아렌트는 말한다.


그래도 우리는 그녀가 남긴 조언을 몇 가지 확인할 수는 있는데, 그 중 흥미로웠던 인용문들을 여기에 그대로 옮긴다. 원문 자체로 생각할 거리들이 많아 보여서 그녀의 말을 그대로 인용해보고 싶었다.


"여러분은 상상력 속에서 삶을 반복하지 않은 채 결코 완전히 살아 있지는 못하며, '상상력 결핍'은 사람들의 '존재'를 방해한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야기꾼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젊은이에게 충고하는 바와 같이 "이야기에 충실하라", "변함없이 이야기에 충실하라"는 말은 인생에 충실하라는 것을 의미하며, 허구를 만들지 말고 인생이 당신에게 주는 것을 수용하면서 그것을 상기시키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즉 그것을 상상 속에서 반복함으로써 무언가 그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같은 책, 195p) "그녀는 이야기 덕분에 사랑을 하게 되었고, 불행이 몰아닥친 이후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모든 슬픔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말로 할 수 있을 경우 여러분은 모든 고통을 참을 수 있다." 이야기는 일련의 견디기 어려운 사건 자체의 의미를 드러낸다."(같은 책, 208p) "이야기하기는 진정 자신을 정의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은 채 의미를 드러내며,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그대로 승인하고 화해한다." (같은 책, 210p)


난 이런 그녀의 이야기(어떻게 보면 그녀는 디네센일 수도 아렌트일 수도 있다)를 마주하고, 한 친구와의 일이 떠올랐다. 우리는 힘들었던 때의 이야기를 서로 나누다가, 그 시기를 돌파했던 힘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친구는 그 힘들을 보고, 역경 앞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향을 '선택해서' 그걸 밀고 나아가는 것 같다고 얘기했다. 나는 힘들던 시기에 먼저 앞서갔던 사람들의 말(당시에는 믿기 어려웠지만, 고통을 부정적으로만 보지 않던 그 말들)을 믿기로 '결정했던' 순간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그리고 지금 아렌트의 글을 보니 그 '결정'이 나도 모르게 나에게 이야기를 만들 힘을 주었던 것 같다. 물론 그것은 벌어진 일을 "정의하는 과오를 범"했던 것일 수 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런 것들이 옅어진 것 같다. 이를테면, '나를 힘들게 했던 사람이 악인이었다'라는 정의, '그 일은 나를 힘들게 했으므로 너무 좋지 않았다'는 정의, 그런 것들이 시간이 갈수록 옅어지는 것 같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그대로 승인하고 화해한다"(이상 같은 책, 210p)고 했던 이야기하기 방식일까?


상술한 것처럼, 그녀(이자크 디네센)는 자신에 관해 많은 것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늘 쓴 모든 것들이 나의 혹은 한나 아렌트의 오독일 수도 있다. 나는 그저 오늘도 그녀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볼 따름이다.




2


그녀는 스무 살이 되었을 때 몇 편의 단편소설을 써서 출판함으로써 문학에 정진하라고 격려를 받았지만 곧이어 이를 단념했다. 그녀는 "작가가 되려고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으며, 무엇에 빠져드는 것을 직관적으로 두려워했다." 그리고 인생의 한정된 역할을 무단히 부과하는 모든 직업은 그녀가 삶 자체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현시키는 데 방해가 되는 올가미였을 것이다. 그녀는 40대 후반에 이르러서 직업적으로 글을 쓰기 시작해 거의 50세가 되어 최초의 작품인 『일곱 개의 고딕 이야기』(Seven Gothic Tales)를 출간했다.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192p)


그녀는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삶과 연인을 잃어버린 슬픔이 계기가 되어 작가가 되었고, 이를테면 제2의 인생을 일종의 농담으로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서 "신은 농담을 좋아한다"라는 말은 그녀의 여생에서 좌우명이 되었다. (그녀는 이런 좌우명에 따라 살기를 좋아했으며, "항해하는 것은 필요하지만 생존하는 것은 필요 없다"라는 좌우명으로 시작하여 나중에는 데니스 핀치-해턴Denys Finch-Hatton의 말 "나는 대답하고 설명하겠다"라는 말을 인용했다) (같은 책, 193p)


사실 그녀는 작가가 되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글을 쓰겠다는 어떤 야망이나 특별한 충동을 느끼지 못했다.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수행했던 약간의 저술활동에 대해서는 잊어도 될 만하다. 이러한 저술활동은 완전히 "가뭄이 들었을 때" 농장에 대한 온갖 걱정을 없애주는 역할만 했을 뿐이며, 다른 할 일이 없을 때 권태로움을 달래주는 역할을 했을 뿐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번쯤 그녀는 "돈을 마련하기 위해 소설을 창작했다"고 한다. 그녀는 『천사 같은 복수자들』(The Angelic Avengers)로 약간의 돈을 벌기는 했지만 결과는 '처참했다.' 결국 그녀는 "생계비를 벌어야 했으며,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요리하고…… 글 쓰는 일뿐이었으므로"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는 친구들을 기쁘게 하고자 파리에서, 그리고 나중에는 아프리카에서 요리를 배웠고, 친구들과 원주민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이야기하는 법을 혼자서 배웠다. "만약 그녀가 아프리카에서 계속 살았다면 결코 작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나는 이야기꾼일 뿐이고, 나의 관심을 끄는 것은 이야기와 이야기 방식뿐이기" 때문이다. 그녀가 가장 필요로 한 것은 인생과 세계, 온갖 종류의 세계나 환경이었다. 세계는 언급되기를 기다리는 이야기, 사건, 갑작스런 사고, 기묘한 사건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디네센의 말을 빌린다면 그것들을 이야기하지 않는 까닭은 상상력의 결핍 때문이다. 부연하면 여러분은 어쨌든 우연히 발생한 것을 상상하고 그것을 상상 속에서 되풀이할 경우에만 이야기를 알 것이며, 여러분은 이야기를 계속할 인내력을 가질 경우에면 이야기를 잘 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녀는 생애를 통해 이야기하기를 행했다. 그러나 그녀는 예술가가 되고자 이러한 일을 행하지 않았으며, 더구나 자신의 소설에서 만나게 되는 현명하고 노련한 전문적인 작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고자 이러한 일을 행하지도 않았다. 여러분은 상상력 속에서 삶을 반복하지 않은 채 결코 완전히 살아 있지는 못하며, '상상력 결핍'은 사람들의 '존재'를 방해한다. 그녀의 작품에 등장하는 이야기꾼들 가운데 한 사람이 젊은이에게 충고하는 바와 같이 "이야기에 충실하라", "변함없이 이야기에 충실하라"는 말은 인생에 충실하라는 것을 의미하며, 허구를 만들지 말고 인생이 당신에게 주는 것을 수용하면서 그것을 상기시키고 깊이 생각함으로써, 즉 그것을 상상 속에서 반복함으로써 무언가 그것이 가치 있는 것으로 보이게 하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완전히 살아 있다는 의미에서 산다는 것은 일찍이 그녀의 목적이고 욕구였으며, 끝까지 그러했다. "나의 삶이여! 그대가 나를 축복할 때까지 나는 그대를 놓지 않겠소. 나를 축복해 줄 때 그대를 놓아주리다." 이야기하기의 보상은 놓아줄 수 있다는 것이다. "이야기꾼이 이야기에 충실할 때 침묵은 결국 말을 하게 된다. 이야기가 배제되어 온 곳에서 침묵은 공허함일 뿐이다. 그러나 충실한 사람들인 우리는 결정적인 말을 해버렸을 때 침묵의 소리를 들을 것이다." (같은 책, 194-195p)


결정적인 말은 분명 기교를 필요로 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이야기는 삶의 일부일 뿐만 아니라 본래부터 예술이 될 수 있다.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도 필요하며,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천박한 삶으로부터 어느 정도 거리를 두어야 할 필요도 있다. 그러나 천부적인 예술가는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러한 것을 잘 처리할 수 있다. 어쨌든 그녀의 경우에는 삶과 작가로서의 여생을 구별하는 명확한 선이 있다. 그녀가 자신의 삶을 이루었던 것, 즉 아프리카에서 꾸렸던 가정과 연인을 잃어버리고 비탄과 비애와 추억 이외에 수중에 아무것도 쥐지 못한 채 완전히 실패하여 룽스테드룬트에 있는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녀는 이런 경우를 당하지 않았을 때 기대할 수 없었던 작가가 되었으며 '성공한 사람'이 되었다. "신은 농담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리스인들이 잘 알고 있듯 신의 농담은 잔혹한 것이다. 그 후 그녀가 이룬 것은 당시 문학계에서 독특한 것이었으며, 19세기의 어떤 작가와도 비견할 만한 것들이었다. (같은 책, 195-196p)


그녀는 "자신에게 성병이라는 유산을 남긴" 남편과 이혼한 이후에도 (전기 작가가 제안한 바와 같이 남작 부인으로 불리는 것에 대한 만족감 때문에) 남편의 이름과 작위를 계속 유지했다. 이 때문에 그녀는 평생 후유증으로 고생했다. 그녀의 병력은 실제로 상당한 관심을 끌 만하다. 디네센의 비서는 "디네센이 눈사태를 저지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처럼…… 병이라는 무서운 강적에 대해 장렬하게 투쟁하느라고 얼마나 여생을 소진했는가"에 대해 술회하고 있다. (같은 책, 198p)


디네센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천일야화』를 높이 평가했는데, 『천일야화』는 단순한 이야기로만 그치는 게 아니라 세 명의 사내아이를 낳았다. "농장에 찾아와 '이야기가 있느냐'고 묻는" 그녀의 애인은 "밤새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는 취미를 즐겼던" 아라비아 왕과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핀치-해턴과 그의 친구 콜(Berkeley Cole)은 제1차 세계대전이 만들어낸 젊은 세대에 속했다. 그들은 인습을 준수하면서 일상 업무를 수행하거나 자신들을 비굴하게 만드는 사회 속에서 출세를 쫓거나 자신의 역할을 수행하는 그런 일들을 하기에는 영원히 어울리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 세대에 속하는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혁명가가 되어 미래의 꿈나라 속에서 살았으며, 또 다른 일부는 반대로 지난날의 꿈나라를 선택해서 "그들의 세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세계"인 양 생활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이 이 세기에 속해 있지 않다"는 기본적인 확신을 공유하고 있었다. (정치 언어로 표현하자면 자유주의가 세계의 '진보'에 대한 희망과 더불어 세계 자체의 수용을 의미하는 한, 우리는 그들이 반자유주의자라고 말하게 된다. 역사가들은 부르주아지의 세계에 대한 보수적 비판과 혁명적 비판이 어느 정도까지 일치하고 있는가를 알고 있다.) 어쨌든 그들은 정착하여 가정을 갖기보다 오히려 자의적 행위에 대가를 지불하려는 '추방자'나 '도망자'가 되기를 바랐다. 핀치-해턴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왔다가는 떠나버렸으며, 결혼 따위에 묶여 지낸다는 것을 추호도 생각해 보지 않았다. 정열의 불꽃 말고는 어느 것도 그를 묶어두거나 유혹할 수 없었다. 시간의 경과와 불가피한 반복 때문에, 그리고 서로 너무나 잘 알아서 모든 이야기를 이미 들었기 때문에 정열의 불꽃이 꺼지는 것을 막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새로운 불꽃을 만드는 데 전력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녀는 세헤라자데 못지 않게 즐거움거리를 열심히 찾았고, 즐거움의 중단이 자신의 죽음과 다를 바 없다고 강하게 의식했다. (같은 책, 201-202p)


그녀는 이야기 덕분에 사랑을 하게 되었고, 불행이 몰아닥친 이후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었다. "모든 슬픔을 이야기로 만들거나 이에 대한 이야기를 말로 할 수 있을 경우 여러분은 모든 고통을 참을 수 있다." 이야기는 일련의 견디기 어려운 사건 자체의 의미를 드러낸다. 진정한 믿음의 분위기이기도 한 "소리 없이 완전히 포용하는 동의의 분위기" ―장례식에서 가장 가까운 친척이 드리는 히브리어 기도가 단지 "기분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소서"라고 표현하듯이 디네센의 하인이 핀치-해턴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신은 거룩하다"고 응답했다―는 이야기에서 나타난다. 사건은 상상력의 반복을 통해 그녀의 표현대로 "운명"이 되어 왔기 때문이다. (같은 책, 208p)


자신과 자기 운명을 일치시키는 것은 삶이 우리에게 부여되었다는 사실을 가치 있게 해주는 유일한 열망이다. 우리는 이것을 자존심이라고 부르는데, 사람들을 구분하는 진정한 경계선은 "자신의 운명을 사랑할" 줄 아는가 또는 "사람들이 오늘의 명언에서…… 그렇게 인정하는 것을 성공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운명 앞에서 떨고 있음은 무리가 아니다." 그녀의 모든 이야기들은 사실 "운명의 일화들"이어서 우리가 결국 어떻게 판단을 내릴 특권을 가지게 되는가를 반복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달리 표현한다면 이것들은 "지성을 갖춘 사람에게 이르는 두 가지 사유과정 가운데 어떤 한 가지를 어떻게 추구할 것인가…… 언급하고 있다. 신은 세계와 바다 그리고 사막, 말, 바람, 여자, 호박(琥珀), 물고기, 술을 창조한다는 것을 무슨 의미라고 생각했는가?" (같은 책, 209p)


이야기하기는 진정 자신을 정의하는 과오를 범하지 않은 채 의미를 드러내며, 실제로 존재하는 사물을 그대로 승인하고 화해한다. (같은 책, 210p)


열 살 때 맞은 아버지의 죽음은 그녀가 경험한 첫 번째 슬픔이었다. 그녀는 그 후 아버지가 자살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으며, 이 사실은 그녀가 잊을 수 없었던 첫 번째 충격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인생에서 연출하려 했던 이야기는 사실상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의 속편이었음을 의미한다. 아버지의 이야기는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요정 이야기의 공주"에 대한 것이었는데, 그는 이 공주를 결혼 전부터 알아왔지만 그 공주는 20세에 갑자기 죽는다. 아버지는 딸에게 이 이야기를 전해 주었고, 그녀의 숙모는 훗날 아버지가 이 잃어버린 슬픔으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었고 그 슬픔 때문에 결국 자살했다고 이후 언급했다. 뒷날 그 소녀는 바로 아버지의 사촌형제였음이 밝혀졌다. 그 결과 딸의 가장 큰 열망은 아버지의 친척 가운데 이 사촌 집안의 일원이 되는 것이었다. 이 집안은 덴마크에서 상류 귀족이었으며, 게다가 그녀의 언니가 진술한 대로 그녀 자신의 주변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들이었다. 그 가문의 한 사람, 죽은 소녀의 사촌이 그녀의 친구가 되었으며, "그녀가 흔히 쓰는 처음으로 영원히 사랑에 빠졌을 때"도 그 상대는 그녀의 또 다른 조카인 한스 브릭센이었다. 그러나 그 청년은 그녀에게 관심을 보여주지 않았는데, 그녀는 그때 이미 27세의 나이로 모든 것을 충분히 잘 알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청년의 쌍둥이 형제와 결혼을 결정했으며―이 사건은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고뇌와 경악을 불러일으켰다―그와 함께 아프리카로 떠나기로 결정했다. 그때는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이었다. 그 후 일어난 일들은 자질구레한 것들이어서 그것을 소재로 해서 이야기를 구성하거나 말로 할 수는 없다. (그녀는 전쟁 직후에 별거해서 1923년에 이혼하게 된다.) (같은 책, 210-211p)


그렇다면 이게 이야기가 되겠는가? 내가 아는 한 그녀는 이 이해하기 어려운 결혼 사건에 대해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에게 명백한 교훈이 되었던 젊은 시절의 어리석은 행동, 즉 이야기를 현실화하고 이야기가 알려지기를 끈기 있게 기다리는 대신 미리 생각한 양식에 따라 삶에 개입하며, 허구를 만들고, 이에 따라 삶을 영위하는 것과 달리 상상 속에서 반복하는 "과오들"에 대한 몇 가지 꾸민 이야기를 쓰고 있다. (같은 책, 211-212p)


따라서 젊은 시절의 인생이 그녀에게 가르쳐 준 것은 다음과 같다. 사람들은 인생에 대해 이야기하고 시를 쓰면서도 인생을 시적으로 영위할 수 없고, (괴테가 한 것처럼) 인생을 예술작품인 듯이 영위할 수 없으며, '생각'의 현실화를 위해 인생을 사용할 수 없다. 인생은 '본질'을 품고 있다(그 밖에 무엇을 포함시킬 것인가?). 회상과 상상을 통한 반복은 이 본질을 해독하여 "만능의 비약"을 여러분에게 전달할 수도 있다. 그래서 결국 여러분은 여기서 무언가를 '만들어내고' 이야기를 구성하는 특권을 지니게 된다. 그러나 삶 자체는 본질도 아니고 만능의 비약도 아니다. 만약 여러분이 인생을 그런 것으로 생각한다면 인생은 여러분을 희롱할 뿐이다. 걸작처럼 드문 숭고한 열정에 몸을 던질 각오를 했던 것(비록 늦기는 했지만 그녀가 핀치-해턴을 만난 것은 그녀 나이 30대 중반이었다)은 삶의 쓰라린 희롱이라는 체험이었다. 이야기하기는 결국 그녀를 현명하게 만들었지만 그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생각했던 '마녀'나 '요정' 또는 '예언자'는 결코 아니었다. 지혜는 늙음의 미덕이며, 그것은 어린 시절 현명하지도 신중하지도 않았던 사람들에게만 나타나는 것 같다. (같은 책, 215-216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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