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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Apr 18. 2022

한나 아렌트 #2 - 레싱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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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장 어두운 시대에도 밝은 빛을 기대할 권리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러한 밝은 빛은 이론이나 개념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확실하면서 깜빡이는 약한 불빛에서 나올 수 있다. 여러 사람들은 자신들의 삶과 저작을 통해 거의 모든 상황에서도 밝은 빛을 밝히고, 지구상에서 그들에게 주어진 수명을 넘어 밝은 빛을 제시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이 책에 그려진 인물 소개의 대체적인 배경이다. 우리처럼 어둠에 길들여져 있는 눈으로서는 그들의 불빛이 촛불인지 타오르는 태양인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그러한 객관적 평가는 후손들에게 안전하게 남길 수 있지만 부차적으로 중요한 문제인 것 같다.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63p)


서문에 쓰여진 것처럼, 한나 아렌트가 빛으로 살아갔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모아둔 책이다. 한나 아렌트 평전 한 권을 읽고, 좋은 사람인 것 같아, 관심이 가는 저작들을 읽어보고자 골랐다. 이 책은 아렌트가 생의 후반부에 저술한 책이다. 후반부에 쓴 다른 책들이 '시민적 불복종', '폭력', '정치' 등을 다룬 것과 달리 직접적으로 사람들을 평하는 글들의 묶음이다. 한나 아렌트가 타인을 평론하는 글들이다보니, 한나 아렌트는 어떤 사람인지 더 직접적으로 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다.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이 들면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과 『라헬 파른하겐』 외에도 『한나 아렌트의 말』, 『전체주의의 기원』 등을 더 읽어볼 생각이다. 그런 기대감을 가지고, 다양한 사람들의 삶도 엿볼 겸 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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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장에서는 이 책을 보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레싱이라는 독일의 극작가에 대해 다룬다. 다만 한나 아렌트 평전을 읽고 나서인지, 아렌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과의 우정을 중요시하고, 그 관계에서 공공영역에 대한 토론을 지속하고 중요하게 생각하는 면에서 특히 둘이 닮았다. 그런 점에서 아렌트가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을 내고 겪었던 우정의 상실에 얼마나 낙담했을지 상상이 가더라.


나 역시도 나랑 잘 맞는 부분이 있어서인지, 번역이 원문을 그대로 따르고 있는데서 오는 문장의 난해함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쉽게 읽어나갔던 것 같다. 물론 "많은 사람의 친구가 되기를 바랐지만 누구의 형제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던(같은 책, 104p) 레싱이 내가 그에게 동질감을 느낀 것을 달가워할지는 의문이다.


우선, 본인이 옳다는 것을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아야 한다는 레싱의 태도가 너무 좋아보였다. 삶을 살면서 그런 태도들을 면전에서 목격한 것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누구나 그럴 것이다. 학창시절, 대학생 시절, 백수 시절 마다, 혹은 선거철이 다가오면, 코로나를 통과하며, 청년 취업난을 통과하며, 한 이슈가 사회적으로 뜨거운 감자가 되면, 내 면전 앞에 혹은 광장에 혹은 인터넷에 쏟아졌던 (어떤 때는 모욕에 가까운) 공격적인 언사들. 그런 논쟁들은 항상 공격성과 함께 도착적으로 피/아를 구분지으려 했기에, 나는 그곳이 내 자리가 아니라고 느꼈다. 그래서 레싱의 이 말은 지나치게 용감한 게 아닌가 싶을 지경이었다.


인간사회는 결코 "해악을 줄이기보다 증대시키는 데 더 많이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피해를 받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자신의 틀 속에 복종시키려는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같은 책, 100p)


그리고 그런 피/아 구분에 대한 도착은 사람의 취향에 따라 웹사이트를 추천해주고, 다음 볼 동영상을 자동으로 만들어주는 AI 시스템이 구축되면서 더 심해지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이제 사람들은 본인이 좋아하는 커뮤니티 1-2군데에만 접속한다. 적으로 식별된 타커뮤니티는 조롱의 대상으로 극히 일부의 내용만이 걸러져 소식을 듣는다. 아래(파트 2)에 있는 필사(89p)는 그런 모습이 "정신적 망명"으로 묘사된 풍경과 비슷한 것이 있을까 싶어 적었다. 물론 "정신적 망명"에 대해 이 이상으로 한나 아렌트가 분석하지는 않았기에, 급히 동치하는 것은 맥락적 오류가 있을 수 있어 보인다.


여하튼, 그런 레싱이었기에 이야기를 중요시하고, 자신의 말들이 결론보다는 사유를 촉발시키기를 원했다. 분명 엄청나게 호전적이었으며 논쟁을 즐기기까지 했다는 레싱과 내 성향이 일치하지는 않는 것 같지만, "어떤 철학이나 경구 또는 분석이 아무리 심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의미의 강렬함과 풍부함에서는 적절하게 서술된 이야기와 비교할 수가 없"다는(같은 책, 93p) 그의 말에 나는 충분히 고개가 끄덕여진다. 철학이나 분석이 자신만만하게 단호한 태도를 취할수록 숨 쉴 공간을 찾기란 더 어려워진다고 느낀다. 반면 적절하게, 때로는 생략해가면서까지 서술된 이야기는, 구체적인 자연 속에서 자유롭게 숨을 들이키는 것과 같다. 내 손과 눈이 훨씬 더 많이 가는 책의 종류가 문학보다는 비문학임에도, 그렇게 느낀다.


과거는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최선책은 과거의 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감내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것"(같은 책, 90p)이라는 통찰도 마음에 닿았다. 나도 한때는 '힘든 과거로부터의 완전한 극복'을 바랐지만, 지내면 지낼수록 과거를 극복하는 것은 없고 과거와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그 과거가 이따금 나에게 말을 걸 때 나는 어떻게 응대할 것인지를 생각하고 시도해보는 시간만이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시간이 극복되지 못했기에 나쁘다고 생각되지도 않는다. 누구에게 무엇이 진실이든, 그렇게 믿는 편이 나에게는 더 맞았다. 물론 책에는 언급된 '과거'가 거시적 역사적 의미에서만 언급한 것인지 개인의 역사에도 적용되는 것인지 맥락이 분명치 않지만, 내게는 개인적으로도 의미가 있는 구절 같았다.


우정을 친밀함보다는 공공영역의 인간화로 재해석한 부분, 동정심이 고대에는 현대와 전연 다른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부분, 우정에 대한 고대의 또 다른 해석 등 더 흥미로운 부분들이 많았지만 더 언급할 정도로 내게 어떤 생각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했다. 그런 부분들은 파트 2에 필사해놓기만 하는 것으로 하고, 여기서 글을 마무리 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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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야기하는 난제들을 꼭 풀어야만 한다는 의무에 구속받지 않는다. 나의 이념들이 독자들의 자율적인 사유를 불러일으킬 재료를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들은 언제나 어느 정도는 분리되어 있거나 심지어 서로 모순된 것같이 보일 수도 있다." 그(레싱)는 강제력이나 증거로 누군가 자신을 강요하거나 자신이 다른 사람을 강요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73p)


사유의 결과는 사유가 스스로 제기한 과제의 최종적 해결을 의미할 수 있는 한, 그는 결과에 대한 욕구를 분명히 비난했습니다. 즉 그의 사유는 진리를 향한 탐구가 아니었습니다. 사유과정의 결과인 모든 진리는 필연적으로 사유의 이동을 중단시키기 때문입니다. 레싱이 세상에 유포시킨 인식의 효모는 결론을 전달하기 위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들에게 독립적인 사유를 하도록 자극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같은 책, 75p)


양쪽 모두 동정심을 아주 자연스러운 것, 말하자면 공포와 마찬가지로 인간이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정심에 대한 평가에 이르게 되면 고대인들이 근대인들의 동정심에 대한 높은 평가에 전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했다는 점은 아주 인상적입니다. 고대인들은 우리가 저항할 수 없어서 공포심과 똑같이 우리를 압도할 수 있는 동정의 순수한 감정적 본질을 명백하게 인식했기 때문에 그들은 가장 동정적인 사람이나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모두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불릴 자격을 갖지 못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두 감정은 완전히 수동적이기 때문에 어떤 행위도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동정과 두려움을 함께 논의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마치 우리 내면에서 스스로 공포를 일으켰듯이 동정을 두려움으로 환원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일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마치 두려움에서 스스로 동정만을 느꼈듯이 두려움을 동정으로 환원하는 것은 전적으로 잘못일 것입니다. 우리는 (키케로의 『투스쿨룸 대화』 제3권 21에서) 스토아학파가 동정과 선망을 동일한 것으로 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더욱 놀라게 됩니다. "다른 사람의 불행으로 괴로워하는 사람은 또한 다른 사람의 행운에도 괴로워하기 때문입니다." 키케로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제기할 때(같은 책 제4권, 56) 문제의 핵심에 상당히 접근하고 있습니다. "할 수 있다면 도움을 주는 것이 낫지 연민은 무슨 소용입니까? 또는 우리는 연민이 없다면 너그러울 수 없습니까?" 바꾸어 말한다면 인간은 다른 사람들의 고통을 목격했을 때 자극을 받지 않고 사실상 강요당하지 않는다면 인간답게 행동할 수 없을 만큼 아주 비열합니까?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82-84p)


한편, "정신적 망명"은 독일 국내에 있으면서 마치 더 이상 조국에 속해 있지 않아서 망명자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다른 한편, "정신적 망명"은 그들이 실제로 망명하지 않으면서도 내면의 영역, 사유와 감정의 비가시적 영역으로 이탈했다는 것을 함축했습니다. 세계로부터 내면의 영역으로 이탈하는 이러한 유형의 망명이 제3제국의 멸망과 함께 끝났다고 상상하는 것이 잘못이듯이 그러한 망명이 독일에서만 있었다고 상상하는 것도 잘못일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어두웠던 그 시대에 독일 내외에는 외형상 견디기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여 세계와 그 공공영역으로부터 내면의 삶으로 이동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당위적으로 존재하거나" 한때 존재했던 가상세계를 선호하여 현실세계를 그저 무시하려는 유혹은 특별히 강렬했습니다. (같은 책, 89p)


이러한 상황은 과거를 아직도 "극복하지 못했다"라는 틀에 박힌 표현을 통해서 명백히 나타나 있으며, 먼저 해야 할 일은 과거를 '극복하는' 일이라는 신념 속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결코 어떠한 과거를 극복할 수 없으며, 히틀로 독일의 과거를 분명히 극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달성할 수 있는 최선책은 과거의 진상을 정확히 이해하고 감내하는 것이며, 그리고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같은 책, 90p)


어떤 철학이나 경구 또는 분석이 아무리 심오한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의미의 강렬함과 풍부함에서는 적절하게 서술된 이야기와 비교할 수가 없습니다. (같은 책, 93p)


잘 알려진 바와 같이 고대인들은 친구가 없는 삶이란 실제로 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이러한 견해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우리가 불행할 때에는 친구의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생각을 거의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로 그들은 함께 기쁨을 나눌 만한 친구가 없다면 행복이나 행운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우리가 불행할 때에만 누가 참된 친구인가를 알게 된다는 격언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타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러한 증거로 확인하지 않더라도 참된 친구로 생각하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주저하지 않고 행복을 보여주고 기쁨을 함께 나눌 사람들입니다. (같은 책, 96p)


그는 사람들이 세상사를 논할 때 제기되는 무수한 의견에 대해 즐거움을 느꼈습니다. 진짜 반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대화의 종언을 의미하며 우정과 인간성의 종언을 의미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근거에서 그는 때때로 사람들을 명명할 때 그들이 '유한한 신들'의 종족에 속한다는 것에 대해 만족했습니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따르면 인간사회는 결코 "해악을 줄이기보다 증대시키는 데 더 많이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피해를 받는 게 아니라 "모든 사람들의 사고방식을 자신의 틀 속에 복종시키려는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피해를 입습니다." (같은 책, 99-100p)


그러나 레싱은 옛날, 적어도 파르메니데스와 플라톤 이후 철학자들을 괴롭혀 온 바로 그 문제, 즉 진리란 언급되는 순간 곧 다수 의견들 가운데 하나로 변형되고 반박되며 다시 정식화되고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논의되는 하나의 주제로 격하된다는 것을 기뻐했습니다. 레싱의 위대성은 인간세계 안에서 유일한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이론적 통찰에 있을 뿐만 아니라 유일한 진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인간들이 존재하는 한, 이들 사이에 끊임없는 대화가 계속될 것이라는 점을 즐겁게 받아들인 데 있습니다. 유일한 절대적 진리가 존재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모든 논쟁의 종식이었을 것입니다. 독일어권 내에서 모든 논쟁의 원조였고 스승이었던 레싱은 논쟁 속에서 안락함을 느꼈고, 그 속에서 언제나 최대의 명석함과 명확성을 발휘했습니다. 그리고 이 논쟁의 종식은 곧 인간성의 종언을 의미했습니다. (같은 책, 101p)


오늘날 자신이 진리를 갖고 있다고 믿는 사람을 만나기란 드물지요. 대신 우리는 자신이 옳다고 믿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마주치게 됩니다. 이 차이는 명백합니다. 진리문제는 레싱의 시대에 여전히 철학과 종교문제였습니다만, 우리가 관심을 갖고 있는 옳음 문제는 과학의 틀에서 발생하며 언제나 과학 지향적인 사고의 형태에 의해 결정됩니다. 저는 이를 언급하는 과정에서 사유 양식의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좋은 것인지 나쁜 것인지를 무시하려 합니다. 18세기 사람들이 진리 문제에 매료되었듯이 한 주장의 특별히 과학적인 측면을 전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사람들도 과학적 옳음에 매료되는 것은 단순한 사실입니다. 아주 이상하게도 현대인들은 자신들이 과학자들의 태도로 매료된 것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습니다. 과학자들은 실제로 과학적으로 행동하는 한 그들의 '진실'이 결코 최종적이지 않고 끊임없이 살아 있는 탐구를 통해 수정된다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습니다. (같은 책, 102p)


진리 소유와 옳음이란 두 개념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두 개념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전자를 택하는 사람이든 후자를 택하는 사람이든 이들은 일반적으로 갈들이 일어나는 경우 인간성이나 우정을 위해서 자신들의 입장을 희생시킬 용의를 갖고 있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런 행위를 한다는 것이 더 높은 단계의 의무, '객관성'을 유지할 의무를 침해하는 일이라고 실제로 믿고 있습니다.설령 그들이 우연하게도 그러한 희생을 치렀을 경우라 하더라도 그들은 의식적으로 행동한 결과라고 생각지 않지만, 자신의 인간성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느끼거나 심지어는 죄책감마저 갖게 됩니다. (같은 책, 102-103p)


레싱 역시 "어두운 시대"를 이미 살았으며, 그 자신의 독자적인 유형에 따라 어두움에 의해 압도되었습니다. 우리는 그러한 시대에 사람들이 서로 가까워지려 하고 공공영역만 밝히는 빛과 조명의 대체물을 친근함의 온기 속에서 찾고자 얼마나 강력하게 욕구하고 있는가를 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들이 논쟁을 피하려고 가능한 한 대립을 불러일으키지 않는 사람과 관계를 지니려 함을 뜻하는 말입니다. 레싱과 같은 성찰을 하는 사람은 그러한 시대와 제한된 세계 속에서는 존재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사람들이 서로 따뜻해지기 위하여 가까워지게 되면 그들은 레싱으로부터는 멀어져 가는 존재가 됩니다. 호전적일 만큼 논쟁적이었던 레싱은 고독도 참기 어려웠지만, 모든 차이를 말살하려는 형재애와 같은 과도한 친근함도 참기 어려운 것이었습니다. 그는 결코 논쟁을 벌였던 상대방과 사이가 나빠지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만 세계의 사건과 그 속의 사물에 대해서 끊임없이 이야기함으로써 세계를 인간화하려는 데 관심을 두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의 친구가 되기를 바랐지만 누구의 형제가 되기를 바라지는 않았습니다. (같은 책, 103-104p)


모든 사람 스스로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바를 말하게 하라.

그리고 진리 그 자체는 신에게 맡겨라!

(「하인리히 라이마루스에게 보낸 레싱의 편지」(1778년 4월 6일), 『전집』 제18권, 269쪽)

(한나 아렌트, 『어두운 시대의 사람들』, 106p에서 재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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