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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Mar 16. 2022

잠을 잘 못 잔 날이면, 그냥 웃었다

불면의 기억과 불안

눈을 뜨니 천장이 하얗다. 여긴, 내 집이 아니구나. 기억이 나지 않는 꿈을 꾸다 눈이 떠졌다. 기분이 좋지 않다. 눈이 떠진 걸 보니 아침식사가 준비될 시간이 가까웠을까. 보고타에 있는 은혜네 민박집 사장님은 8시가 되면 2층 식당에 한식을 차려두고 민박집 사람들을 불러 모으신다. 침대 맡을 더듬어 핸드폰 시계를 켜니 시간은 새벽 1시였다. 여행을 온 뒤로 잠에서 자주 깬다. 기분 나쁘게 선잠이 드는 적도 많다. 나는 다시 한숨을 쉬고 눈을 감아본다.     


여행을 시작하며 무서운 것이 여럿 있었다. 가장 큰 두려움 중 하나는, 내가 또 다시 불안에 휩싸이면 어쩌나, 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군대를 다니며 힘겨운 일이 있었고 일병 3호봉 즈음부터 전역할 때까지 불안과 함께 살아야 했다. 매일같이 헛구역질을 하며 출근했고, 심했던 시기에는 일주일 내내 잠을 거의 못 잔 적도 있었다. 그 상태가 지속되다보니 나중에는 불안해질까봐 불안했다. 밤마다 잠을 못 잘까 두려웠다. 게임 같은 것들에 의존했다. 불안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죽을 것 같을 때에는 가족들을 붙잡고 감정을 토했다. 때로는 어떻게든 내가 붙잡고 의지할 수 있는 책 구절들을 필사했다. 필사적으로 적었다.

군대를 전역하고서도 상흔은 계속되었다. 다행히 학교에서 심리 상담을 하며 만난 상담사분과 너무 잘 맞아서, 점점 호전되었다. 친구들과 이야기하며 불안을 어떻게 대해야할지 나름의 생각을 정리했다. 하지만 그래도 무서운 건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그때와 같은 극도의 불안에 휩싸이면, 한국어도 통하지 않는 타지에서 나는 괜찮을까.

게다가 나는 2010년에 태국을 한 달 정도 여행한 뒤로 단 한 번도 혼자 여행을 가본 적이 없었다. 내 인생 해외여행도 그때의 태국이 유일했다. 내 주변 친구들 모두가 취직을 향해 나아가는 와중에 나는 아무런 답도 내리지 못하고 떠나왔다. 내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대답은 내리지 못한 채 떠나왔다. 그것도 흉흉한 소문이 떠도는 남미로. 나를 둘러싼 모든 조건들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때문에 다시 불안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지, 하는 두려움은 여행 초기의 나와 계속 함께했다.

그래서 사장님이 안내해준 방을 처음 봤을 때, 나는 덜컥했다. 밖으로 난 창이 없었다. 방은 예상보다 좁았다. 침대가 방 한 쪽을 큼지막하게 차지하고 있고, 머리맡에는 자그마한 서랍이 있었다. 침대 발치에는 적당한 크기의 옷장이 있었다. 바닥 조금 빈 곳에 가방을 두고 몇 가지 짐을 펼쳐두면 방에 여유가 많지 않았다. 군대 시절, 문이 닫히면 답답해서 잠을 이루기 어려워 한동안 계속 방문을 열고 잠을 잤다. 그런 기억이 나를 두렵게 했다.     


“식사하세요~”     


민박집 사장님의 목소리가 민박집의 아침을 연다. 나는 비로소 아침이 왔다는 것을 실감하며 눈을 뜬다. 사람들이 2층 식당으로 모여든다. 여기서 유학하는 학생이나 일적인 이유로 장기간 투숙하는 분들은 대개 말끔한 얼굴로 3층에서 내려온다. 여행객들은 뜨는 것조차 버거워 보이는 무거운 눈을 하고, 2층 방에서 나와 식당에 모인다. 난 여행객이었지만, 자주 선잠에서 깼고 기분이 좋지 않은 꿈들이 나를 깨웠으므로 대개 아침에는 이미 깨어 있었다.


“적응 잘 한 거 같네, 아침에 잘 일어나고.”

“그러게요. 저는 한국에서 여기 왔을 때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밥 먹기도 어려웠는데.”     


박사님과 차장님이 나를 보며 한 마디씩 거든다. 두 분은 민박집에 오래 계셨던 분들이다. 박사님은 아는 게 많고 콜롬비아 회사에서 자문 역할을 하고 계셔서 박사님이라고 불렸다. 차장님은 XX은행 파견 직원으로 콜롬비아에 와계신데, 직함을 따서 차장님이라고 불렸다. 용기를 북돋아주시려는 것이었는지 자주 그런 말들로 나를 추켜세워 주셨다. 좋은 분들이었다. 그때마다 나는, 그러게요, 밥이 맛있어서 식욕이 돋네요, 라는 말만 하고는 그냥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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