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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새 May 18. 2022

한나 아렌트 #7 - 원체험, 이론들, 슬픔들

켄 크림슈타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리뷰

(책 읽고 든 단상에 대한 메모와 비슷합니다, 불친절할 수 있습니다)


ㄱ. 원체험


'원체험'이라는 말이 있다. 한 사람의 몸과 마음에 깊은 흔적을 남겨 살아가며 계속 그에 구애받게 되는 체험을 말한다. '트라우마'라는 단어와 비슷하다. '원체험'도 주로 좋은 체험보다는 사회적 통념상 나쁜 경험에 가져다 붙이는 경우가 많다. 다만 '트라우마'는 수동성의 이미지, 즉 그 체험으로 인해 어떤 것을 못하게 되거나 어찌할 바를 모르게 되는 느낌이 강하다. '원체험'은 한 사람이 그 체험을 한 이후로 많은 부분이 바뀌고, 심지어는 그 체험을 바탕으로 창작활동을 이어나가기도 하는 능동성의 이미지가 있다. 그래서 나는 '트라우마'라는 말보다는 '원체험'이란 말을 좀 더 좋아한다.


이 책은 한나 아렌트가 살아온 삶을 조망해볼 수 있었던 좋은 만화책이다. 그리고 나는 여기서 한나 아렌트가 경험한 몇 번의 원체험에 시선이 많이 갔다. (물론 그녀가 '원체험'이라는 개념적 정의를 좋아할지는 모르겠다) 내 생각에 그녀에게 있어서 원체험이라고 불릴만한 경험은 2-4가지 정도가 있는 것 같은데, 그녀가 이런 원체험들을 자기 방식대로 소화해내는 걸 보는 게 흥미로웠다.


첫 번째는 그녀가 아주 어릴 때의 일로, 아빠가 돌아가셨던 일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나라 나이로는 대략 초등학교 고학년에서 중학교 저학년 사이의 일이었던 것 같다. 한나 아렌트의 아버지는 그녀가 아직 이해하기 어려웠던 성병으로 인해 죽었다. 그녀는 엄마에게 칸트 책을 읽어보겠다고 한다. 답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갖고서. 심지어 그녀는 칸트 책을 모두 섭렵했던 14세가 되어서도 답이 찾아지지 않는 일들이 생기자 칸트가 읽었던 책을 모두 읽기로 결심한다.


둘째는 그녀가 '공포감 조성'을 이유로 체포당했다 풀려났던 사건이다. 그녀의 어머니와 함께 체포되었다가 어머니는 풀려나고 그녀도 좀 더 긴 시간이 지난 후에 풀려날 수 있었다. 그녀는 체포에서 풀려나자마자 어머니에게 지금 당장 독일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이 즈음부터 그녀는 자신의 정체성(유대인)에 가해지는 위협들에 대해서 자신 나름대로의 대처를 해나가기 시작한다. 이 이후 그녀는 유대인 아이들 이주를 보조하는 일, 수용소에서의 탈출, 프랑스에서의 도주, 미국에서의 불법체류 등에 결단력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마도 인생에 있어서 자신만의 기준과 그에 대한 시도들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가 아니었나 싶다.


셋째는 1943년 서방 세계에 처음으로 강제수용소가 있다는 사실이 알려졌던 때인 것 같다. 그녀는 "심연의 문이 열렸다"(켄 크림슈타인,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 169p)고 표현했다. 그녀는 그 심연을 이해하기 위해 활발히 탐구하고 발견한 것을 발표한다. 『전체주의의 기원』, 『인간의 조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 모두 이 시기에 나왔다.


마지막으로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이후 그녀에게 쏟아진 비난들일 것 같다. 많이 표현되지는 않지만 그녀는 슬픔을 부여잡고 떳떳하게 앞으로 나아갔던 것 같다. 우정을 그리도 중요시했던 한나 아렌트인 만큼 수많은 친구들의 배신이 뼈아팠을 것은 불보듯 뻔하다. 아마도 두 번째 남편 블뤼허와의 관계 속에서, 그리고 그가 죽은 후에는(이 죽음은 한나 아렌트에게 큰 충격이었다고 다른 책에서 봤지만 여기서는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았다) 스스로 한 발 한 발 딛어가며 살았던 것 같다. 그 나날들에 대해서 이 책에서는 자세히 다뤄지진 않았다.



ㄴ. 악의 평범성, 그 외


한나 아렌트 책을 보면서 최근에는 그녀에 관련된 유튜브 영상들도 찾아보았다. 주로 한나 아렌트라고 치면 나오는 것들을 보았는데, 대부분이 '악의 평범성'에 대한 것을 다루는 것들이었다. 대부분 악의 평범성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하고 꼭 '우리도 돌아보아야 하지 않나'라고 화두만 던지고 끝나는 것들이었다. 왜 거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지는 않는 걸까.


이를테면 예전에 대학교 수업에서 최근 영화들을 분석하며 부쩍 "그게 내 일이야"라는 대사가 많아졌다고 말했었다. 이게 내 일이니까 하는 거지, 더 무슨 설명이 필요하느냐는 뜻의 대사였다. 그리고 그런 대사들이 명대사 반열에 오르기도 한다고 했다. 교수님은 '일을 바라보는 시선이 많이 바뀐 것 같다' 정도로 얘기했던 것 같지만, 그런 현상에 우리가 '악의 평범성'을 대입해볼 수는 없을까? 그리고 더 나아가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보지 않을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또 아쉬운 것은 '악의 평범섬' 이외의 개념들이 다뤄지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한나 아렌트가 "답을 찾는 것을 전제로 하는 사유가 아닌 더 많은 질문을 불러일으키는 사유"(같은 책, 224p)인 '철저한 사유'를 통해서 어떻게 전체주의나 악을 피하고자 했는지, 왜 그녀의 눈에는 600만 유대인을 죽인 아이히만이 "괴물로 보이지 않았"(같은 책, 228p)는지, "그런 열정(사랑)을 공적 영역으로 가지고 나가면 오히려 더 많은 아이히만이 탄생하게" 된다고 했고 그러므로 사적인 감정을 공적인 공간에 가져가선 안 된다고 했는지 말이다. '탄생성'과 '복수성' 또한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대단히 중요한 개념 같은데 한국에서 '한나 아렌트'는 '악의 평범성'으로만 다뤄져왔다.


이 책에서는 그 개념들을 조금씩 다루었고, 좀 더 알아볼 필요가 있다. '철저한 사유'란 무엇일까? 여전히 흉악한 범죄자가 나오면 '괴물'처럼 보도하는 대다수 언론과 한나 아렌트의 차이는 무엇일까? 사적 감정을 공적인 공간에 가져가면 더 많은 아이히만이 나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애국심은? 최근 우리 사회를 지배하는 키워드인 '혐오'는? 그리고 SNS와 같이 사적인 것들이 공적으로 공표되고 있는 우리 시대에는 어떻게 적용해야 할까? 한나 아렌트는  "선과 악 사이에서 마음을 정하지 않은 사람들이 제일 사악한 일을 저지른다"(같은 책, 228p)는 말을 우리는 얼마나 절절하게 느끼는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 사이에 견고한 벽을 세"(같은 책, 220p)운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ㄷ. 슬픈 것


한나 아렌트의 이론이 피상적으로 소비되는 것.

A가 A에 대해서 생각하지 않는 것.

사회가 한 가지 굳센 진리에만 목을 매는 것.

그러기엔 바쁘다는 말을 듣는 것.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

바쁘다고 말하는 것.

이런 글을 다 쓰고도 한 시간 동안이나 이 행위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느라 멍했던 것.

언론의 뉴스와 나 사이의 화해할 수 없는 간극을 또 만나는 것.

혼자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서로가 서로를 두려워하는 것.

개념으로 존재를 가둬버린 언어들이 세상의 공기를 점령하는 것.

그 공기로 숨쉬는 것.




https://brunch.co.kr/@4eeeac81451f407/33 (이 책의 구절들 중 필사한 것을 모아놓은 브런치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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