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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앙 Jun 02. 2021

20대가 착해질 때

20대의 생각

오랫동안 일하던 작은 도서관에서 이제는 구닥다리가 되어 폐기처분도 안 되는 고물 컴퓨터를 가져왔다.

그 컴퓨터 안에 든 옛 자료들을 약간의 수고비를 주고 지워서 버리려고 했는데 그마저도 여의치 않아 직접 집에서 하려고 가져온 것이다.

이리저리 맞추고 보니 컴퓨터는 소리가 나고 속도도 엄청 느렸지만 오랫동안 쌓인 자료들의 맨 얼굴을 충실하게 드러내준다.  몇 개의 자료를 열어보니 갑자기 타임머신이라도 탄 듯 10여 년의 시간을 쏜살같이 거슬러 올라간다. 하나하나의 자료를 만들 때의 세세한 일들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놀랍기도 하지, 그때의 분위기, 기분들이 떠오른다.

안 되겠다. 얼른 자료나 옮기자라고 생각했는데 인터넷이 열리지 않는다. USB에 담으면 되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다. 하나씩 차근차근 옮기고 싶은 마음인 것이다. 답답해하다가 어쩔 수 없이 아들을 부른다. 한참을 기다려 자기 용건을 끝낸 (그래 봐야 하던 게임 끝내고 온 거지만) 아들은 힐끗 쳐다보더니 랜카드가 없다고 한다. 노트북은 그런 거 없이도 잘 열린다고 하니 그건 안에 있는 거고라고 단문을 날리면서 랜카드를 사란다. 뭘 사야 할지 모른다고 이야기하면서 미묘한 기분이 된다. 이럴 때 아들은 생각보다 귀찮아하지 않는다. 다만 목소리에 귀찮음이 담겼을 뿐이다. 속도가 느리다며 다시 깔라고 해서 자료들을 그냥 없애면 안된다는 말에 알았다며 바람처럼 휙하니 사라진다.

이제 궁금한 일은 한참을 기다려야 답을 주는 카톡으로 주고받아야 한다. 아들이 랜카드를 주문했다고 하고 얼마냐고 하니 됐다고 한다.

주문했던 랜카드가 오고 사진을 찍어서 카톡으로 보냈으나 1은 금방 사라지지 않는다. 저녁때가 다 되어 '얼마냐'고 보내니 '안줘도댐'이라고 톡이 온다. '안 줘도 됨'이라고 아들의 오타를 고쳐주려다 참고 저녁 먹으러 얼른 오라고 하니 '먹고감'이라고 한다. 이틀을 집에서 먹더니 오늘은 밖에서 저녁을 먹을 모양이다.

퇴근하면 화장실 쓰고 부엌에 물 가지러 오는 거 외엔 절대로 방 밖을 나오지 않는 아들이 왠일로 랜카드가 잘 되냐고 방에 들어와서 물어본다. 이역시 잘하지 않는 일이다. '20대와 같이 살기' 글을 쓰면서 아들에게 잔소리하지 않으려 무진장 노력하다 보니 하지 못한 잔소리가 산처럼 쌓여있다.

잔소리를 하지 않는다고 현실이 당장 바뀔리가 만무하고 아들이 자신의 문제를 알아서 고칠리가 만무하다.  특히 아들의 방은 정말 눈뜨고 봐줄수가 없다. 일주일을 제대로 치우지 않자 도저히 견딜 수 없어 쓰레기를 버리고 쓸고 걸레질을 했다. 걸레로 닦으니 바닥이 얼마나 더러운지 곰팡이가 묻어 나오는 거 같다. 게임을 하면서 먹는 음식물 부스러기, 음료수 얼룩이 바닥을 그지경으로 만드는 것이다. 특히 주말이 지난 월요일은 그 정도가 더 심하다. 한 시간을 치워도 별반 깨끗하지 않은 아들의 방을 보며 한숨이 나왔지만 방으로 들어온 아들에게 그런 말은 하지 않는다. 참는다. 그래서 아들과 나의 오늘은 잠시지만 평화롭다.

슈마허의 굿워크를 읽었다. 첫 장을 열면 카뮈의 말이 나온다.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삶은 부패한다.
그러나 영혼 없는 노동을 하면 삶은 질식되어 죽어간다.


어릴 때는 카뮈의 이방인을 읽으며 카뮈가 돈을 버느라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못했다. 그저 부모가 주는 질식감이 컸나 보다고 생각했다. 이방인의 첫 구절, '오늘 엄마가 죽었다'도 크게 그 의미를 알지 못했다. 카뮈의 행동이 엄마의 죽음보다 자기 실존의 고민이 더 큰 것으로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카뮈는 엄마라는 존재가 갖는 의미와 노동의 의미를 어릴 때부터 알고 있던 거다.


아들과 싸울 때면 아들도 카뮈만큼이나 고민과 생각이 많은 것처럼 보인다.  아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일하고 와서 쉬는 자기를 좀 놔두란다.  자신은 이렇게 사는 삶을 선택했다고. 가끔 아들에게 화를 내는 것은 나의 존재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아들이 모른다고 생각해서일 거다. 시간이 흐르고 있고 언제까지나 너를 챙겨주며 너역시 파릇한 20대일 수 없으니 미래를 준비하고 든든한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고 이야기하면서 사실은  엄마를 잊지 않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아들의 추억 갈피에서 엄마의 낡은 컴퓨터의 문제를 해결하던 자신의 모습을 떠올리는 날이 있을까. 엄마는 소심하게 혹은 든든하게 자신의 해결책을 듣고 믿고 의지했다고 그렇게 생각할까. 사실은 해결 방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저 의지하고 싶은 엄마의 마음이었다고 느낄 수도 있을까.

모든 아들과 딸이 언제가 이방인이 될것을 생각하며 조금은 너그러워지는 월요일 밤이다. 오늘 아들은 카뮈처럼 착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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