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 속에 나를 만나다

잊고 있던 마음의 고향으로의 작은 여행

by 이 유림




살아오면서 누구에게나 애틋하고 그리운 곳이 하나쯤은 있으리라 생각한다.

나에게 그러한 곳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을 보낸 그 아파트다.


중학교 때 전학으로 멀리 떠난 후,

수십 년 동안 가보지 못해서 ‘아, 정말 한 번 가보고 싶다.’라고 마음속으로 가끔씩 생각하곤 했다.


며칠 전, 우연히 그 근처를 여행하면서 내비게이션에 주소를 입력하고 무작정 차를 몰았다.


희끄무레한 돌담 모퉁이를 돌아,

낮은 담장들 사이로 삐죽 솟아 눈에 쉽게 띄던 우리 집은 산복도로 꼭대기에 자리한 5층짜리 아파트였다.


복도식 구조의 원룸형 아파트였는데, 화장실은 집 밖에 따로 있어서 어두워진 밤이면 꼭 언니나 동생을 데리고 가 망을 보게 했던 기억도 났다.


볼일 보는 동안 밖에서는 학교에서 들은 무서운 이야기를 꺼내며 괜히 겁을 주고, 안에서는 ‘하지 마!’라고 소리치던 웃지 못할 일들도 있었다.


겨울 초입이면 4층 우리 집까지 계단으로 연탄을 한 장씩 나르며 월동 준비를 힘들게 했던 기억도 새록새록 난다.


아파트에는 또래들이 많아서 낮부터 숙제하며 같이 놀고, 저녁 먹고는 다시 모여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늦게까지 놀기도 했다.

그러다 친구 부모님이 찾으러 와서 종종 혼나기도 했었다.


어느새 도착한 근처 공영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아파트를 향해 걸어갈 때, 입구에 위치한 유일한 슈퍼의 간판이 그대로 있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 나도 모르게 출입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내 오래된 기억 속 그 슈퍼는 입구에서 안쪽까지 물건이 빼곡했고, 외상도 가능했던 맘씨 좋은 젊은 부부의

슈퍼였다.


하지만 지금은 시골에나 어울릴 낡은 간판에, 몇 병만 겨우 든 음료수 냉장고와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할아버지 한 분이 전부였다.


그래도 반가운 마음이 더 컸던 나는 냉장고에서 음료수 한 병을 꺼내곤 값을 치르며 말했다.


“저 어릴 때 여기 이 아파트에 살았어요.”

“정말? 몇 호였는데?”


“406호요”

내가 느끼기에도 제법 흥분된 목소리가 나온 것 같았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는 잠시 나를 바라보다, 기억을 더듬는 눈빛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순간, 예전 엄마 심부름으로 라면과 과자를 사고 ‘몇 호’라고 외상장부에 적던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시간이 흘러 사는 동네가 여러 번 바뀌었어도 이렇게 기억들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곳은 이곳뿐이다.

또래 친구들이 많았고, 처음 학교를 다닌 곳이었기에 유난히 추억이 더 쌓였는지도 모르겠다.


꼭 한 번 다시 와보고 싶었던,

내 마음의 고향.


빛바래고 낮아져 이제는 누구의 눈길도 더 이상 머물지 않는 곳이 되었지만,

그래도 내 안에는 그날의 햇살이

여전히 마음 한켠을 묵직하게 차지하고 있음을 느낀다.




#추억 #에세이 #어린시절 #기억 #고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