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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운대 줌마 Sep 02. 2024

<처음 사는 인생 누구나 서툴지>

아무튼 독서(모리와 함께한 화요일을 읽고 2)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2'


책을 읽는 내내 한 죽음의 기억이 생생히 내게로 왔다. 

삼십 년 전, 

지금의 내 나이보다 훨씬 젊은 쉰넷 돌아가신 친정아버지의 죽음이다.

당시 의술로 암은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마른 하늘에 날벼락이다는 말을 그때 나는 실감했다. 

우리 가족은 웅덩이보다 깊은 절망에 빠졌다. 

우박 덩어리 같은 슬픔을 안은 채 멍하니 하루하루를 보냈다.

 ‘살 수도 있다.’는 의사의 말을 반신반의 했지만, 

실오라기 같은 희망의 끈을 차마 놓을 수가 없었다. 

암수술과 방사선 치료 그리고 암 재발과 재입원. 



특별히 믿는 종교는 없었지만

그때 나는 하느님, 부처님... 

온갖 신들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아버지 살게 해 달라고...' 

기도 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는 암수술 후 말문을 꽉 닫으셨다. 

흔히들 말하는 암환자의 심리변화 단계라는

억울해하고 분노하는 기색도 전혀 보이지 않으셨다. 

방사선 치료가 주는 구역질과 어지럼증을 무척 고통스러워하셨다. 


재입원했을 때는 삶의 끈을 진작에 놓고 고통 없이 죽기만을 바라시는 눈치셨다.

햇살이 희미하게 드는 병실 침대에 누워 

하염없는 얼굴로 허공을 응시하던

아버지의 움묵패인 커다란 눈

그때보다 더 슬프고 절망에 찬 얼굴을 본 적이 없다. 




 ”너거 아부지, 애들하고 어떻게 살아라는 말 한마디 없이 가셨다. 

야속한 양반 ! 불쌍한 양반! "

엄마는 아버지를 떠나보낸 날 

원망과 슬픔이 뒤범벅된 말을 토하듯 뱉어내셨다. 


아버지도 남겨진 우리 가족도 죽음에 서툰 건 마찬가지였다. 

삶 건너편에 죽음이 있는 게 아니었다. 

살 만큼 다 산 다음에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었다. 

갑작스러운 사고나 예고 없이 닥치는 불치병처럼. 

삶 뒤에서 도사리고 있다가 언제 뛰쳐나올지 모르는 일이라 두렵기만 하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아버지의 남은 시간을 너무 허망하게 보내버렸다는 후회가 밀물처럼 밀려들었다.  

발병서부터 일 년 반이라는 시간을 병마에 질질 끌려 다니며 허비했다. 

병원에서 시키는 대로만 했다. 

암환자에게 더 이상 치료가 불가하고 몇 개월 살지 못한다는 말을 쉬쉬한채.

그땐 그게 최선인 줄 알았다. 


모리교수의 가르침처럼

아버지와 가족들이 용기 있게 죽음을 받아들였더라면,

치료상황을 정확하게 말씀드리고,

남은 시간만이라도 가족의 온기를 느끼며 

당신의 생을 정리하도록 도왔어야 했는데....


어떻게 해야 좋을지 그땐 몰랐다. 

그 후회스러움은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들수록 더 짙어진다.

한 집안의 맏이로서 그때의 우둔함이 부끄럽다.




먼 훗날 아버지를 하늘나라에서 다시 뵐 수 있다면

늦어도 너무 늦었지만

이 말만은 꼭 해드리고 싶다.


' 아버지, 아버지는 누구보다 우리 가족을 위해 열심히 사셨어요.

그런 정직한 아버지가 늘 자랑스럽고 고마웠습니다.

우리 사남매 낳아 기르느라 수고 참 많으셨습니다. 

아버지, 사랑합니다.'

그때 미처 하지 못했던 말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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