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독서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도경 Apr 22. 2020

독서 일기: 시인 최승자의 번역서

2020-04-22 수요일 독서 일기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한계였던 3월을 지나,

학교에 복귀하고 도서관에서 일을 하게 되어 다시 책을 읽어나가고 있습니다.


점점 책을 읽으면 좋았던 감정만 남고 문장이 쉽게 휘발되어 기록해봅니다.

제목은 거창하지만 사적인 얘기가 많이 들어간 독서 일기예요.


마음에 드는 문장이 있으시다면 좋은 책이니 읽어보세요.





올해 4학년이 되었다. 또한 올해의 4월 16일은 세월호 사건 6주기였다. 이날, 우리 모두는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는 트윗을 보았는데, 나 역시 기억한다. 6년 전 일이지만 그 당시에도 나는 대학생이었다. 그때 나는 pc실에서 관련 뉴스를 처음 보았고, ‘전원 구출’이라는 오보에 마음을 놓았다가, 아마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함께 친구와 점심을 먹으러 가면서, 그때까지는 그래도 최소한의 정부의 양심과 도덕, 책임에 대해 기대를 하고 있었던 것 같다.


6년이 지난 지금도 대학생이라는 사실에 새삼 놀랐다. 자퇴, 재시험, 입학, 편입, 다시 입학 등 여러 과정을 거쳤고 그 사이에 첫 사회생활이라고 불릴만한 체험을 경험하기도 했다. 어쨌거나 4학년이 된 20대 후반의 나는 착잡한 마음으로 졸업 논문에 대해 생각하다가, 내가 국문학을 전공하게 된 큰 계기 중 하나였던 최승자 시인이 떠올랐다. 최승자 시인은 기념비적인 시집을 남겼을 뿐만 아니라 책을 번역하는 일도 했다. 학교 도서관에서 그 이름을 검색해보니 역자로 참여한 책들을 찾을 수 있었다. 사실 검색 정보라고는 시인의 이름뿐이어서, 동명이인은 아닌지 걱정이 되었으나 역자 후기를 읽어보니 시인이 맞는 것 같아 기록을 남긴다.


오늘은 메이 사튼의 《혼자 산다는 것》을 읽었다. 

그 사람에 대해 알고 싶으면 그의 서재를 보라는 유명한 말이 있듯이, 이 책에서는 최승자 시인의 냄새가 진하게 났다. 마찬가지로 시인이 번역한 《굶기의 예술》의 저자인 폴 오스터는 “문학이 가진 흥미로운 점 중 하나는 언제나 단 한 사람이 단 한 권의 책과 조우하는 것”과 같은 말을 했다고 한다. 이처럼 최승자 시인에게도 이 책들이 스쳐지나갔음을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혼자 산다는 것》에는 메이 사튼의 솔직하면서도 미학적인 문장들이 많았다. 메이 사튼은 고독했지만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묘하게 긍정적인 부분이 있었다. 내가 어떠한 말을 덧붙이는 것보다도 마음에 와닿았던 문장들을 발췌하고자 한다. (까치 출판사 책이다. 나는 2013년 2쇄본으로 읽었다.)





나는 이 기록을 그 일을 하는 한 가지 방법으로 생각한다. 다른 사람들과의 모든 만남들이 충돌로 변한 지도 이제는 오래되었다. 나는 너무 많이 느끼고, 너무 많이 낌새를 채고, 가장 간단한 대화 뒤에도 그것을 되새기느라 기진맥진해진다. 그러나 깊이 부딪치는 것은 제 버릇 못 고치는, 괴롭히고 괴롭힘을 당하는 나의 자이이고, 나의 자아였다. 나는 모든 시, 모든 소설을 똑같은 목적을 위해서 써왔다. 내가 무엇을 생각하는가를 찾아내고, 어디에 서 있는가를 알기 위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모자란 기계인 것 같은 기분이다. 결정적인 순간에 고장이 나서 삐걱거리다가 정지한 후, “작동하려고 하지 않는” 혹은 더 고약하게도 죄 없는 어떤 사람의 면전에서 폭발해버리는 기계. (p.9)




책에서 인용된 엘리엇의 시:

걱정하는 법과 걱정하지 않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달라.

가만히 앉아 있는 법을 우리에게 가르쳐달라. (p.39)




여기서의 내 삶은 너무도 많은 것이 위태롭다. 나는 언제나 심지어 내 작업조차 믿지 못한다. 하지만 지난 며칠 동안 나는 이곳에서의 내 투쟁의 타당성을 다시 느끼게 되었다. 내가 작가로서 행여 “성공하든” 하지 못하든 그것은 의미 있는 것이고 그리고 그 실패마저도, 즉 신경쇠약 같은 까다로운 기질로 인한 실패들까지도 의미 있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p.45)




“그는 보호되지 않아야만 끊임없이 변화할 수 있다”라는 제럴드 허드의 말은 내가 시인이 된다는 것과 삶의 전성기를 넘어서 계속 시를 쓴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서 이야기할 때면 언제나 떠오르는 말이다. (p.53)




아마도 여자가 “일점(一點)”이 된다는 것은 더 힘들고, 여자가 집안의 잡일과 가족생활을 넘어서 하고 싶은 것들이 무엇이든 간에 그것을 중심으로 공간을 비운다는 것은 훨씬 더 힘든 일이다. 여자의 삶은 조각나 있다. ……그것이 내가 그 많은 편지들에서 듣는 비명―“나만의 방”보다는, 나만의 시간을 원하는 비명―이다. (p.67)




(…) 세상의 절반은 여자인데, 어째서 여성지향적 예술에 대한 적의가 있단 말인가? 〈겐지 이야기〉가 남성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남성적 세계를 지향하는 책들로부터 여자들은 분명히 많은 것을 배운다. 그런데 어째서 그 반대는 사실이 아니란 말인가? (p.80)





시인이 번역한 《굶기의 예술》은 시간 관계상 읽지 못해 차후에 다시 읽어보려고 한다.


이 책의 역자의 말에 남긴 최승자 시인의 “결국은 의식이 자기 의식을 명확하게 가늠할 수가 없어서 다른 의식에 빗대어 자기 의식을 비춰보는 것”이라는 문장이 인상적이다.


시인은 “The perceiver and the perceived are one”이라는 말은 곰곰이 생각해보았다고 한다. 

“결국 한 인간은 자신을 타인이라는 거울에 비추어서 확인하게 되고, 자신의 의식을 타인의 의식이라는 거울에 비추어보는 것이다.” 멋진 문장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