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한 변론》(2018 , 사계절출판사)을 읽고
저번 포스트에서 도서관에서 일하게 되었다고 쓴 적이 있는데, 이 책은 도서관 추천도서이기에 읽게 된 책이다. 김민정의 《사람, 장소, 환대》와 같이 읽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 책에서는 ‘믿다(believe)’와 ‘수용(accept)’, 그리고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인상적이었기에 해당하는 일부분을 발췌하고자 한다. 지난달(4월) 장애인의 날이 있었기에 해당 달에 이 책을 다뤄보고 싶었으나 바뀐 환경에 적응하느라 정신이 없었어서 이제야 독서일기를 쓰게 되었다.
나는 항상, 예를 들어 콜센터 직원이나 장애인 등을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이라고 일컫는 것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누군가의 소중한 가족”은 얼핏 수용의 자세를 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 밑바탕에는 나와 다르다는 차별성이 내제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결코 나는 ‘그 위치’가 되지 않으리라는 이상한 기저의식이 느껴지는 것 같다고 하면 너무 예민한 걸까.
일단 책의 내용을 함께 살펴보면 좋겠다.
아래 발췌된 내용은 5장 기꺼운 책임(133p~155p)에 수록되어 있는 내용이다.
볼드 처리되어 있는 큰 글씨는 내가 작성한 것임을 밝힌다.
장애를 수용한다는 말은 장애를 문화적 다양성이자 개인의 고유한 정체성이라고 ‘믿는’ 것과는 구별된다. 이를 이해하기 위해 우선 ‘믿는다believe’에서 출발해보자. 우리는 어떤 경우에 ‘믿는다’고 말할까? 가장 쉬운 답은 믿을 만한 ‘객관적 근거object-given reason’가 있을 때이다. (...) 그 밖에 우리는 각자 처한 상황에서 유리하거나 필요한 이유state-given reason가 있을 때 믿는다. (...)
객관적인 근거에 기초한 믿음이든 처한 상황에 따른 믿음이든, ‘믿음’의 특징은 내 마음대로 믿거나 믿지 않기가 어렵다는 것이다. (...)
반면 우리가 무엇인가를 ‘수용한다accept’고 말할 때, 그것은 철저히 자발적인 선택을 의미한다. 믿음은 나의 의지에 따라 믿거나 믿지 않기가 대단히 어렵지만, 수용은 오로지 나의 의지에 달려 있다. (...)
마지막으로, 수용은 나의 자발적인 선택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내가 원하는 삶의 전체적인 기획 및 그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와 밀접하게 연관된다는 점에서도 믿음과 큰 차이가 있다. 무엇인가를 수용한다는 행위는 그 개별적인 행위 하나에 대한 태도에 그치지 않는다. 수용은 우리 삶의 전반적인 방향과 연결된 윤리적인 결단이므로,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유리한 이유state-given reason가 있어서 믿는 일종의 ‘전략적(정신승리적) 믿음’과 구별된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 자신의 장애가 있는 몸, 미적 기준에서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신체를 수용했다고 말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혐오나 피해의식에 기초하여 받아들이지 않고, 이 세상이 구축해놓은 외모의 위계질서에 종속되지 않으며, 앞으로의 삶을 외모에 대한 사회적 차별이나 억압, 혹은 피억압자로서의 이식과 트라우마에 짓눌리지 않은 채 살아가겠다는, 삶에 대한 ‘근본적인 태도(입장)’를 수용한 것이다.
우리는 우리 몸의 볼품없는 어떤 특성, 나이 들고 병들고 장애를 가진 내 자녀의, 친구의, 연인의, 그리고 나의 몸을 하나의 정체성이라고 (믿는 것이 아니라) ‘수용’해야 한다. 다시 말해 정체성이라고 간주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장애를 정체성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그것이 내 삶에 위안이 되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해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다. 또한 장애나 질병이 그 자체로 가치 있는 대상이라는 객관적 근거가 넘쳐서도 아니다.
장애를 받아들이는 일은 장애를 어떤 가치 있는 산물이라고 믿는 일과는 다르다. 그러한 믿음은 우리가 장애아의 출산을 손해라고 생각하는 순간 지속되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 가치 있는 산물이 손해라는 말인가. 그러나 장애라는 정체성이 어떤 산물이라기보다는 장애라는 경험에 맞서 한 개인이 작성해나가는 ‘이야기’ 그 자체라면, 우리가 정체성을 받아들이는 일은 하나의 국면이 아니라 긴 삶의 시간 동안 그것을 ‘써나가는’ 일이 될 것이다. (...)
우리는 ‘잘못된 삶’이라고 규정된 사람들이 스스로를 수용하는 것을 넘어서, 법과 제도의 수준에서 자신이 수용될 수 있도록 해온 노력을 살펴볼 때가 되었다. 이 세상에 잘못된 삶이란 없다는 우리의 변론이 성공하려면, 정치 공동체 일반이 그것을 수용할 수 있음을 보일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음 장에서 ‘잘못된 삶’이 법 앞에서 어떻게 다루어졌고, 다루어져야 하는지를 확인할 것이다.
초등학생 때 한 학급당 1~2명의 장애인 학우가 있었다. 당시 우리 반은 짝꿍을 제비뽑기로 뽑았고, 암묵적으로 아이들 사이에서 장애인 학우의 짝꿍이 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그리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나는 장애인 학우와 짝꿍이 되고, 그 친구와 거의 붙어있는 책상을 함께 쓰면서 그 아이와 몸이 닿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노력’이라니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지.)
그리고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건, 그 아이가 의자에 걸어둔 내 외투를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친 적이 있었는데, 나는 그때 울어버렸다. 그 친구는 내게 “미안해.”라고 말했다. 나는 비장애인이고, 장애인이 무엇인지 제대로 된 개념조차 무지했고, 그 낯섦이 나를 무섭게 했다. 그리고 이미 시간이 훌쩍 지난 지금에서도 그 일을 생각하며 나의 무지함이 표출한 혐오가 그 친구에게 상처가 되진 않았을까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내가 장애라는 것이 극복해야 하는 무엇인가가 아니고, 무언가 결핍된 상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 그의 모습이었다는 걸 알았더라면 뭔가 다른 행동을 할 수 있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우리도 이제는 장애 극복 신화나 장애는 결핍이나 불운이라는 생각을 뛰어넘어야만 하고, 그러한 교육을 더 어린 나이부터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작가가 말했듯이 그러한 수용의 자세가 법에도 적용되어야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