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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경 Jul 01. 2020

그냥 일기: 속초 2

1박 2일 무작정 속초 가기 完


* 1편에서 이어집니다.



숙소는 특이할 것 없이 무난했다. 다만 환기가 안 되는 구조라 취식을 금해달라고 하셨는데 정말 상상 그 이상으로 환기가 안 되는 구조(고시텔 같은)였다. 밑에 카페처럼 꾸며진 라운지에서 음식을 포장해와 먹어도 됐지만, 시험의 노고와 장시간의 버스 이동으로 너무 지쳐 있는 상태였다. 하필 전날 4시간 정도 걸었어서 발도 이미 엉망이었고 더 걷고 싶지 않았다. 


샤워를 하고 침대에 누워 멍하니 있다가 늦은 저녁 나서서 숙소 밑에서 그냥 밥을 먹었다. 주변에 공사하시는 분들이나 현지분들이 주로 식사하는 기사식당 같은 곳이었는데, 택시를 타고 이동할 때 기사님이 오징어 물회를 먹으라고 하셨던 게 기억이 나서 물회는 아니지만 오징어덮밥을 먹었다. 원래 오징어도 별로 안 좋아하고 오징어덮밥은 너무 맵고 짜서 싫어하는데 정말 맛있었다. 


뒤늦게 알았는데 속초는 오징어순대와 아바이순대가 유명하다. 이는 피난민들이 속초에 자리를 잡고 산 것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아바이순대의 뜻은 '아바이' 는 함경도 말로 '아버지'란 으로 워낙 돼지 대창이 귀해서 예로부터 아버지한테만 대접했다고 하여 붙인 이름이라 한다. 슬픈 역사다.


어쨌거나 속초를 가면 오징어를 드세요. 닭강정은 안 먹어봐서 모르겠습니다.



저녁에는 멀리 나가기가 힘들어서(자꾸 힘들다는 얘기만 하는 것 같지만) 숙소에서 15분 정도 거리에 있는 등대해수욕장에 걸어갔다. 등대해수욕장은 그 이름 그대로 높은 지대에 등대가 있고 이러한 등대에서 나오는 빛이 하늘을 물들이는 게 특징이다. 사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바로 앞 편의점에서 폭죽을 파는데 정작 이 해변에서는 폭죽 사용이 금지되었다는 점이다. 주변에 주민들이 많이 살아서 그렇다고 한다. 실제로 바닷가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여행객들로 추정되는 이들이었고 주민들은 바다 앞에 설치된 벤치 같은 곳에서 앉아서 바닷바람만 쐬고 있었다. 뭐랄까 그때 현지인의 바이브(?)랄지 여유 같은 걸 느꼈다. 여행객들에게는 잠깐 주어진 바다이기에, 나는 기를 쓰고 맨발로 바다를 거닐었는데 여기 사는 분들에게는 그냥 일상의 한 장면이라는 게.



이때 너무 외로워서 내가 편히 전화할 수 있는 세 사람에게 전화했는데, 그 중 한 친구와는 이 바다에서 한 시간, 숙소 가서 한 시간 반 정도를 더 수다 떨었다. 이럴 거면 왜 혼자 속초를 온 걸까? 


그런데 여행의 역설이랄지 묘미라는 게, 멀리 떠나보니 정작 그곳에 두고 온 소중한 이들이 생각난다는 점 같다. 멀리 떨어져서 봐야 아름답듯이. 그러니까 이곳의 주민분들도 바다 근처에 가지 않고 멀리서 바라보는 건 그 아름다움을 알고 계셔서가 아닐까. 적당한 거리. 그게 사람에게도 사물에게도 빛남을 깨닫게 해준다.



엉뚱한 짓을 하다가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 비몽사몽해서 조식을 겨우 먹었다. 조식 마감 7분 전.


사실 오징어순대를 먹으러 갈 생각이었는데 이날 비가 너무 많이 왔다. 전날 전화로 친구에게서 (우리 동네에서) 비가 많이 온다며, 내일 속초도 비가 많이 올 거라고 했는데 정말 가늘게 쏟아져내렸다. 아까 말했던 어두운 해변을 맨발로 걷다가 유리 파편 같은 게 박혔는지 발이 꽤 다쳐서 그냥 조식을 먹고 체크아웃 시간까지 영화를 좀 봤다. TV에서 비긴어게인을 해줘서 오랜만에 애덤 리바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No one else like you. 네가 아니면 아무도 그립지 않다는 노래. 이걸 들으면 아델의 someone like you가 생각난다. 그런데 곱씹어보면 두 곡의 가사는 굉장히 다른 방향성인 것 같다. 애덤 리바인의 곡을 들으면 둘이 결국 로맨틱하게 잘살 것 같은데 아델의 노래는 완전한 이별이니까. 이별 후의 이별. 그래서 아델의 노래를 좋아했다. 사실 나는 when we were young을 더 좋아한다. 시기적으로 보면 전자의 곡이 21의 앨범에 있고, 후자는 25에 있는 듯한데 someone like you가 절절한, 상대방이 있는 슬픔이라면 when we were young은 정말 홀로서기의 느낌이 든다. 슬픔보다도 한때의 찬란함을 말하는 것 같은 느낌.


사랑하기에 아름다운 것들은 생각보다 흔하지 않은 것 같다.



조식을 먹고는 시외버스 표를 끊고 멀리 가기 싫어서 소호거리라고 불리는 곳을 가보았다. 가보았다는 표현이 무색할 정도로 그냥 시외버스터미널 바로 뒤에 있다. 정말 숙소로부터 거의 5분도 걸리지 않은 거리에 있는 가게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속초에 오기 전까지는, 내가 바다를 보고 좋아할 것이라고, 그리고 무엇이든 버려버리고 용서하기 위해 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냥 바다를 보니 기분만 좋았고 바다보다도 잘 차려져 있는 가게가 더 좋았다. 넓은 대자연 속을 거니는 것보다도 적당한 온도가 조성되어 있는 곳에서 깔끔한 공간을 누릴 수 있다는 게, 엄선해서 고른 음악을 들으며 책을 보고 글을 쓸 수 있는 게 더 좋았다. 


막상 떠날 때는 강원도에 눌러앉아 살고 싶다는 꿈이 있었는데 이곳에 오니 두고온 것들이 너무 그리웠다. 두고온 사람들, 시간들, 집. 그래서 정말 뒤도 안 돌아보고 버스를 타고 떠났다. 올 때도 도망치듯이 왔으면서 떠날 때는 더욱 쫓기는 사람처럼. 마지막 날에는 바다도 한 번 보지 않았다.



소호거리에 있는 '완벽한 날들'이라는 서점. 이 서점에 있는 책 중에 속초 가이드북(?) 같은 책이 있는데, 거기에 따르면 닭강정도 물회도 없는 속초 여행을 하고 싶으면 오기 좋은 곳이라고 한다. 근데 정말 가게 좋다. 윗층인지 근처인지는 숙소로도 운영되어 북스테이를 하고 갈 수 있는 듯하다. 진작 알았으면 숙소 여기로 해도 좋았을 텐데... 일단 음악 선정이 너무 좋았고(내가 좋아하는 가사 잘 들리고 아름다운 한국 인디밴드들...) 굿즈들도 예뻤고 무엇보다도 책 선정이 정말 잘되어 있다. 이때는 페미니즘 기획 코너가 따로 되어 있었던 것 같고, 작가 친필본 책들은 무료로 볼 수 있었는데 속초에 대한 책과 내가 좋아하는 작가들(은유 작가나) 책이 많았다. 지역적인 색깔도 살리면서 책의 현대적인 흐름도 잘 읽어낸 서점이었다. 


나는 여기 앉아 버스가 도착하는 시간까지 엽서를 썼다. 두 통을 썼는데 한 통은 이미 전달했고 다른 한 통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다. 내가 전해줄 용기가 있다면. 나의 것만큼 당신의 진심이 무겁지 않음을 깨닫고도 상처 받지 않을 수 있다면 전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제 그런 일은 조금 지겹기도 하다.




그렇다. 속초에 오는 일은. 여행에 오는 일은, 결국 돌아갈 수 있는 곳이 있음을 축복하게 되는 지리멸렬한 반복인 것 같다. 그리고 그러한 반복을 통해서 이 지루하고도 긴 삶을 이어나갈 수 있는 다짐을 하게 된다.


오기 전까지는 그렇게 오고 싶었던 속초가, 보고 싶었던 바다가 떠날 때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를 탔다. 


그리고 생각했다. 숙소에서 나는 인위적인 탈취제 향에 대하여. 어느 숙소나 비슷비슷한 냄새에 대해. 일회용 치약, 일회용 바디스폰지, 일회용 비누... 모든 것이 버리고 갈 수 있게 만들어진 것. 누가 이곳에 머물렀던 흔적을 박박 닦아 없애고 그 위로 독한 향을 뿌려버리는 일. 없었던 것으로 만들기. 있는 것은 아무것도 가져가지 않기. 나는 저녁의 해변에서 조개를 주웠다. 그러나 모든 것이 지겨워지고 말아 욕실 쓰레기통에 조개를 버리고 떠났다. 기사식당은 청국장 냄새가 심했고 잠시 앉아서 식사를 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그 냄새가 스며들었다. 그리고 속초를 떠나 집으로 돌아왔을 때, 집에는 어머니가 해놓은 김치찜 냄새가 나고 있었고 그건 속초 식당의 그것과 아주 비슷했다. 여행객과 다르게 지치고 피곤한 얼굴을 한 사람들. 살아가야만 하는 사람들. 버티는 사람들. 친절하진 않지만 자신의 역할은 충실히 하는 사람들. 그리고 의외로 맛있는 밥. 


사람 산다는 건 결국 냄새를 묻히고 사는 일 같다. 없어지지 않는 것. 없앨 수 없는 것. 가지고 돌아와야만 하는 것. 누군가 눈치를 챌 수밖에 없는 것. 그런 것들로 나를 만들고 살아가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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