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강이 목전인 문과대생의 핑계
꿈꾸는 것마저 두려워지는 밤이 있다. 예측 불가능한 영역인 악몽의 공포가 뇌의 각성을 일으킨다. 동틀 무렵까지, 나는 이불속에서 시곗바늘만 힐끔거린다. 습관화가 습관인 두뇌 덕분에, 12시 언저리만 되면 매일같이 엄습해 오는 두려움에 몇 날 며칠을 지새우게 된다. 뇌내 비디오 방에서는 그 많은 기억 중에 하필이면, "The Top 10 Horror Dreams of the Last Few Decades" 따위를 골라 재생한다. 눈가는 거무튀튀 해지고, 대낮에 하품을 달고 살아도 악몽이 두려워 잠 못 드는 밤이 멈출 기약 없이 이어진다. 이대로는 버틸 수 없다. 오늘 밤에는 어떻게든 극복하리라.
"니가 인마, 인제 시작해도 어이? 앞으로 한 3년만 죽었다 카고, 해봐라. 일만 시간의 법칙이라 안 카나?"
그러다 문득, 아버지께서 꽤 자주 언급하신 말을 떠올렸다. 무엇이든 충분한 시간을 들이면 익숙해지고, 결국 그 분야에선 전문가가 될 수 있다는 법칙이었나. 말은 쉽지 싶다가도 짐짓 생각해 보니, 내가 잠을 1년에 365번 자는데, 그걸 10년이면 3650번, 그럼 족히 1만 번은 잤다. 시간으로 따지면 대략 10만 시간. 그렇다면 자고 일어나는 데는 최고의 전문가가 아닌가. 악몽이 나에게 직접적인 영향이 없다는 것은 1만 회 가까운 실험 끝에 이미 증명된 것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늘 밤도 다를 게 없다. 나는 결국 아무 일 없이 아침을 맞을 것이다. 이성이 공포를 다시 한번 밀어낸 기쁜 날. 오늘뿐 아니라, 또 한동안은 그렇게 마음먹고 잠들 수 있겠지. 다시 공포가 엄습할 때까지는.
책도 무섭다.
지난해에 학교 도서관에서 김영하 작가를 강연자로 모신 적이 있다. '왜 책을 읽는가?'라는 주제의 강연에서 그는, 독서하는 사람은 책 읽는 속도보다 구입하는 속도가 빨라야 하고, 그렇게 쌓인 서가의 책으로부터 “이제 슬슬 읽어봐야 하지 않니?” 하는 환청이 들려오는 상태가 책 읽기에 가장 이상적인 상태라고 말했다. 방청 중인 학생들은 대부분 피식하곤 미소를 지었지만, 웃고 난 직후의 표정은 사뭇 달랐다. 아무래도 각자의 오래된 서가가 떠오른 모양이었다. 순간, 서로의 표정을 살피며 묘한 공감을 주고받는 분위기가 되었다.
이 글을 남기는 지금 타자를 치면서 노트북 스크린 위를 흘깃 보니, 푸른 표지의 'No Fear Shakespeare 시리즈'가 바로 눈에 들어온다. 문득 CG처럼 검은 연기가 퍼지는 듯하더니, 개중에 칼을 든 햄릿 삽화가 흡사 속삭이는 듯하다.
"별로 안 어려워. 읽기 좋게 현대 영어로 써놨잖아? 이제 좀 펴보지 그래......"
저 시리즈를 펼치는 것은 공포다. 나름대로 경험하며 힘들게 쌓아왔던 관념, 관습을 융단 폭격한다. '나 자신'을 정의함에 있어 꽤 큰 부분을 차지했던 통념의 요새도 예외는 아니다. 모조리 허물어지니 억지로라도 새롭게 받아들여야 한다. 문체의 유려함은 또 어떤지, 표현 하나하나가 날카롭게 파고든다. 잊어버리지 않으려 노트하지 않을 수가 없다. 괴롭고 고독하지만 버텨야 한다. 개벽의 시간이 지나면 그 자리는 새롭게 떠오르는 관념들이 춘추와 전국을 연다. 무주공산이 된 생각의 대지는 먼지로 뒤덮인다.
결국은 겸손해진다. 현대의 철왕좌, 다모클레스의 검이 따로 없다. 갈고닦은 가치관 같은 것들이 언제든 흔들릴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좋게 말하면 변화에 유연한 상태가 된다. 읽기 전의 나와 읽은 후의 나는 마치 다른 개체가 된 것처럼 느껴진다.
역시, 서가에서 가장 눈에 띄는 자리는 고전 문학에 내어준다. 잊을만하면 '다시, 고전'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오는 지속력, 주인공의 고뇌를 체화하며 따라가다 보면 기존의 통념이 와르르 무너지는 파괴력을 가장 명징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꿈이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순간은 그릇된 밤의 지속을 되돌려 놓고자 악몽에 직면하는 순간이다. 먼지 쌓인 책을 집어드는 순간도 마찬가지이다. 변화의 순간임을 자각하고 새로운 관념과 마주할 준비가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