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민주 Jun 12. 2024

시대의 고민

몇 주 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근황을 나눴다. 그녀는 사람을 만나는 것은 에너지가 쓰이는 일이나 여럿이 모이는 자리에 보다 자주 나가야겠다는 결심 했다고 한다. 자신만의 고민이라 여겼던 문제들이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사람들에게서 역시 공통적으로 나타난다는 이유였다. 수많은 잡념과 고통이 오롯이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한결 편안해진다 덧붙였다.


사소한 것들은 이치를 닮았다. 물에 뜨려면 몸에 힘을 풀어야 하며 가라앉는다는 두려움을 잠시 망각해야 한다. 더 넓어지고 커지려는 욕심에 집요하게 파고들수록 버둥버둥 가라앉을 뿐이다. 길을 찾는 일에 힘을 들이다 보면 이내 길을 잃었다.


올해라 싸잡아 말하기는 웃기니 근 몇 달은 유독 내 의지로 별 수 없는 일들이 많았다. 하고 싶으면 할 수 없었고, 포기하려니 손아귀에 떡하니 앉아있었다. 그래 이렇게 된 이상 어느 선택도 책임지고 싶지 않아 용한 점괘에 인생을 맡기고 싶다는 욕심에 신점이라도 보고 싶었지만 웃프게도 신에게 나의 앞날을 물어볼 여윳돈 같은 것은 없었다.


악몽이 잦고 불확실한 것들이 야속하기만 했다. 사실 가장 불확실한 것은 나였기에 결국 야속한 것도 탓할 것도 나였다. 혼자서 무엇이든 못할 게 없다 당당했던 유럽에서의 자긍심은 이미 ‘그렇게 큰돈을 다 써버리다니 겁 없이 통 큰 무대뽀 가시내!’ 하는 질책으로 변한 지 오래기도 했다. 그럼에도 당차고 대담했던 나를 생각하면 미어지게 애틋하니 그런 애틋함을 남기려고 쎄빠지게 구르는 것이라고 서둘러 마침표를 찍는다.


최근에는 식탐이 눈에 띄게 늘었고 먹는 음식마다 베트남 고추를 갈아 만든 소스를 온갖 음식에 듬뿍 뿌려 해치웠다. 먹는 족족 소화하지 못했고 매일같이 배앓이를 했다. 이걸 쓰는 지금도 점심에 먹은 밥이 소화되지 않은 채 남아있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니 어쩌면 개인이 먹을 수 있는 적정량 역시 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것 아닌가 싶었다. 정신은 혀끝의 자극을 좇으며 허기를 채우려 들었지만 내 위와 신진대사 능력은 툭하면 고장 나 나라는 사람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았다.


파악의 부재인 건지 지나친 과신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렴풋 체할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허기를 채우려 여러 가지를 욱여넣었다. 중에는 분명 먹어서는 안 될 것들도 섞여있었을 것이다. 목구멍을 넘어간 이상 하나의 덩어리일 뿐이기에 위액에 범벅된 커다란 마음을 소화하려 애쓸 뿐이었다. N 년 전이라면 게워내는 방법을 택해 원인을 찾았겠지만 나는 감정의 민낯 앞에서 해줄 수 있는 것이 썩 없었다. 욕구는 그에 맞춰 달리면 되니 어렵지 않다. 그러나 어느 하나 바라는 것이 없는 마음을 마주할 때면 나는 언제나 맥을 잃고 말았다.


무엇도 되고 싶지 않지만 마땅한 존재가 되고 싶다는 한심한 욕망과 발표할 것이 있다며 손을 삐죽 들고는 자신에게 악랄한 말을 쏟아붓는 밑바닥. 정보의 홍수 속에서 동정을 한답시고 유약도 해졌다가, 뒤틀린 사회에 분개도 했다가, 결국에는 뒤틀린 것도 동정받아야 할 것도 자신 같지만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족쇄도 시대의 고민이 될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지하철 역의 더덕 냄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