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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민주 May 01. 2024

지하철 역의 더덕 냄새

 내가 사는 동네의 지하철역 계단을 오르면 낮은 플라스틱 의자와 빨간 바가지, 뭉툭해 보이는 과도를 들고 더덕을 깎는 할머니가 있다. 더덕을 깎는 일은 깎아본 이는 알겠지만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다. 더덕은 신선할수록 끈적이는 하얀 진액이 가득 나오기 때문에 더덕을 손질하고 나면 씻기지 않는 진액이 온군데 달라붙는다. 때문에 언제나 내가 깎은 더덕은 갈변되기 일쑤였다. 바구니 속 그녀의 더덕은 굵직하고 얼룩하나 없이 뽀얗다. 언제나 바삐 그곳을 지나기 때문에 그 엄청난 기술을 찬찬히 훔쳐볼 겨를이 없었으나 내가 기억하는 역전의 풍경에는 자주 그녀가 있었다. 성인의 하체보다 낮게 앉아 이른 아침부터 해가 드는 창 아래 더덕을 깎는 채로.


 그녀를 되비추어 본 것은 며칠 전이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열차를 놓치지 않기 위해 달리던 어느 날. 비염으로 훌쩍대는 코를 뚫고 시원한 바람과 함께 콧속으로 더덕 냄새가 넘어왔다. 역전 어딘가에 더덕이 있음을 알리는 그런 향, 두드릴 때마다 향이 강해지며 결결이 찢어지고, 아작하고 질깃한 맛이 상상 가는 쌉싸름한 그런 향. 나는 처음으로 다리의 속도를 줄여 좁은 보폭으로 걸으며 그녀와 그녀의 더덕을 찬찬히 마주했다.


 그녀는 너무 춥거나, 너무 덥지 않은 봄과 가을의 시작을 알린다. 언제나 스치듯 지나칠 뿐이었지만 나는 그녀의 물건에 대해 꽤나 알고 있다. 가을이 오면 붉은 바구니 속에는 씨알 굵은 생율이 가득 쌓여있다. 그녀는 단단한 생밤의 껍질을 능숙하게 깎는다. 생채기 하나 없이 동글고 노란 생율을 보면 익히지 않은 밤을 썩 좋아하지 않는 나 역시 입에 넣고 싶은 모양을 하고 있다. 으드득으드득 소리를 내며 어금니 사이로 퍼지는 은은한 단맛이 떠오르는 그런 모양.


 오늘은 배경이 되어 지나쳤던 것들을 따라가 본다. 상자에 채워진 순간이 아닌 상자의 벽면과 바닥을 훑어 정신을 차리지 않으면 쉬이 사라질 것들에 대해 열거한다.

 

수고로움을 모르는 채 능숙해 보이는 어른들, 학교에서 번져 나오는 초등학생들의 함성소리,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엄마의 팔, 청소를 마친 집안의 공기와 건조기에서 갓 나온 이부자리, 기름 짜는 방앗간과 이른 아침 빵집의 냄새, 비가 그친 뒤 바닥 얼룩과 젖은 아스팔트 냄새, 해가 잘 들지 않는 나무 그늘의 온도, 옷장 깊숙이 잊고 있던 외투를 발견한 기분, 흙과 잡초 냄새, 찰박찰박 물결치는 투명한 하늘색 욕조의 물, 빛에 파랗게 빛나는 까치의 깃털... 거스르고 거슬러 서성이던 것들을 새겨 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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