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랭 바디우(Alain Badiou)의 검은색(Le Noir)을 읽고
이 책은 철학자의 에세이보다 검정을 주제로 한 백과사전에 가깝다. 한가지의 RGB 값만을 가진 검정에 종류라는 것이 있을 수는 없지만, 검정을 바라보는 관점들은 수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는 자신의 관점과 경험으로 검정의 다양한 의미를 설명한다.
그가 유년 시절에 경험한 ‘검은색’은 해방이자 새로운 세계였다. 그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줄곧 특정한 놀이를 하며 보냈는데, 그 놀이의 규칙은 다음과 같다. 어른들이 없는 집에 6명의 인원이 참여한다. 자물쇠의 작은 구멍마저 가리고 희미한 반사광도 허락하지 않는 완전한 어둠을 만든다. (그는 이 유발된 어둠을 부수적인 어둠이라고 불렀다.) 어둠 속에서 아이들은 술래잡기를 한다. 술래잡기에서 진 아이는 이긴 아이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하며, 아무 것도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는 다른 아이들은 숨은 아이와 찾은 아이 간의 명령과 대응을 인지할 수 없다. 아이들은 이 완전한 어둠 속에서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다. 제한적인 크기의 방은 어둠 속에서 끊임없이 팽창되고 게임의 종료와 함께 아이들의 모든 비밀은 어둠속으로 사라진다.
반대로, 통제할 수 없는 어둠은 그에게 공포와 불안을 안겨주었다. 그가 열 살이 되었을 무렵, 그의 부모는 그를 이탈리아 피레네 산맥의 조그맣고 외딴 마을로 홈 스테이를 보냈다. 선량한 집 주인은 그를 잘 돌봐주면서도 해질 무렵이 되면 그에게 심부름을 시켰는데, 큰 양철통을 들고 고지대에 위치한 농장에서 우유를 받아오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의 그에게 어두운 숲과 산맥은 거대한 벽처럼 느껴졌고 돌아오는 길 위에는 공포와 외로움이 만연했다. 더 큰 두려움은 이따금 어둠 속에서 그의 종아리를 노리는 큰 개를 마주하는 일이었다. 그는 개가 풀 숲 어디서 튀어나올지 예상하고, 공포에 질려 달려 도망치거나, 라이터를 켜 위협하기도 했으며, 때로는 물리기도 했다. 그는 심부름이 두려웠지만, 부인에게 놀림받을까 두려워 끝까지 비밀로 남겨두었다.
삼차원의 공간에서, 통제된 완전한 어둠과 통제할 수 없는 공식적인 어둠은 서로 상반되어 어둠의 정의를 달리한다. 그렇다면 이차원의 하얀 종이 위에서 우리는 어떤 검은색을 마주할까?
누구든 잉크펜을 써본 사람이라면, 검은색 찌꺼기가 불시에 나온다는 걸 알 것이다. 알랭은 학창 시절에 하얀 종이 위에 검은색 덩어리들이 과하게 남는 것을 경계하라고 배웠다. 이 교육은 그에게 삶의 심오한 교양을 알려주었는데, 글을 쓴다는 것은 사유를 형상으로 옮기는 일이라는 것이다. 펜, 종이, 불완전한 잉크, 어쩔 수 없는 검은색 덩어리와 강렬한 생각 사이에서 세심한 문자의 배열과 순서만이 자신의 생각에 형상을 부여할 수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오는 검은 덩어리를 피하기 위해 그의 문체는 더욱 명확하고 간결하게 변했을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하얀색 종이를 검은 잉크로 가득 채운다고 해서 좋은 글이라고 할 수 없다. 충분한 고민 없이 적는 글들은 또 다른 형태의 형상 없음에 그칠 뿐이다.
또 다른 사유의 형상화로 그림(Drawings)이 존재한다. 글쓰기에는 제법 재주가 있던 알랭은 그의 데생 수업을 회고하며 자신의 재능 없음을 한탄한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미술 선생은 '검은 연필'로 물이 담긴 그릇을 그리는 숙제를 내주었는데, 연필은 엄연히 말해 회색이고 새까만 검은색만 써서는 사물의 부피를 나타낼 수 없었다. 알랭의 그림은 추상화의 그 것처럼 2차원의 면에서 그칠 뿐이었다. 우리가 인지하는 언어와 사용하는 언어 사이의 괴리는 어린 철학자 알랭에게 미술 수업 낙제를 주었다.
성(Sex)에 있어서 검은색은 '체모'일 것이다. 어린 알랭은 여느 사춘기 남자아이와 마찬가지로 야한 잡지를 몰래 보곤 했는데, 컴퓨터가 없던 당시에는 잡지를 구하기 위해 상당한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알랭이 보던 잡지는 여성의 검은 체모를 하얀색 구름으로 덮어두었는데, 그는 이 수수께끼같은 구름에 분노하여 우리가 검은색의 진실을 바랄 때는 검은색이 하얀색으로 덮일 때라고 말한다. 때로 우리는 진실한 검은색을 마주하려 애쓰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