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모토가 처음으로 통하지 않았던 이곳
친구가 무심코 던진
넌 뭐가 가장 힘드냐는 물음에,
공감이 어렵다 답한 나는,
MBTI로 사람을 마주하고 판단하는 요즘 세상 속
일명 완벽한 99% T형의 인간이다.
살면서 감동적인 드라마나 영화를 보고도 왜 우는지 이해가 안 되고, 스스로 해결해야 할 고민거리를 왜 주변 사람들에게 물어보는지 이해를 못 했던.
지금 생각하면 너무 미안하고, 민망한 이야기지만
일례로, 행정고시를 몇 번이나 낙방했던 친구가 울면서 밤에 전화한 적이 있었는데
뭐라 위로를 해야 할지 몰라서
“이 상황이 최악이 아닐 수 있으니까 그만 울어.”
라고 말을 했었다.
읽고 계신 여러분들의 표정은 한마디로 ‘경악’이겠지만..
원래 하고자 했던 말은
시험이 전부가 아니니 여기서 떨어진다고 너의 귀한 인생이 다 망한 것처럼 울지 마! 였는데
공감과 위로라는 행위와 담쌓고 지낸 세월만큼의
차가운 말들만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입 밖으로 나왔다.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진짜다.
실제로 코시국이 만든 취업 장벽 중 하나인 AI 인성검사.
솔직하게 하면 붙는다 해서 솔직하게 체크했다가 3개 모두 광탈한 적 있다.
이런 내가 기막힌 운명의 장난처럼
간호사라는 직업으로 사회에 데뷔했다.
치료하는 의사와 치유하는 간호사라는 말처럼
위로와 공감은 간호사의 양 날개와 같다.
난 날개 없는 간호사였지만
운 좋게 원하던 빅 5 병원 준 한 곳에 취업했고
운 나쁘게도 원하지 않았던 종양내과, 그것도 완화의료병동으로 입사했다.
흔히들 신규 간호사 태움으로 사직한다 하지만
T인간에게 가장 힘든 건
환자를 대한 것이었다.
[힘들어? 그래도 견뎌 참아야지 어쩌겠어. 시간은 흐르니까 이 또한 끝나겠지.]
28년 나의 인생 모토다.
짧지도 길지도 않게 살면서 만난 몇 번의 위기 속에서 스스로 항상 저렇게 되뇌곤 했다.
하지만 이곳에서 나의 인생 모토는 적용되지 않는다.
종양내과, 수많은 암 환자들이 오고 가는 곳이다.
0기부터 4기,
그리고 말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있다.
암의 진행 정도에 따라 암 병기 단계를 나누지만, 4기 암과 말기 암을 같다고 혼용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분명 다르다.
완치를 목적으로 하는 적극적인 치료에
더는 반응하지 않는,
점차 악화하는 시점부터 죽음 사이에 있는 기간을
‘말기’로 칭한다.
이 시기에 도달한 환자들은 연명의료를 받을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쉽게 말해 인공호흡기를 달고 중환자실에 갈지
혹은 연명치료를 포기하고 호스피스로 갈지 선택하는 것인데,
내가 있는 곳은 주로 호스피스로 가겠다 결정한 말기 암 환자들이 호스피스를 가기 전 급성기 치료를 받는
일명 ‘완화의료병동’이다.
나는 이곳에서 4기에서 말기로 넘어가는 환자분들을 많이 만났다.
보통 이 시기의 암 환자분들은 전문가다.
이미 수도 없이 많은 항암을 하고 수술을 받았기에.
그리고 경험을 이길 수 있는 이론은 그 어디에도 없다.
부끄럽지 않은 대학을 나왔지만, 그곳에서 고작 4년간 쌓은 이론적 지식은 환자의 깊은 경험보다 한없이 얕다.
솔직한 말로 신규 시절 모르는 게 있으면 가끔 환자분들께 되려 여쭙기도 했다.
“이거 이전에는 어떻게 하셨어요? “
환자분들께 신규인걸 들키고 싶지 않아서 최대한 나의 무지함을 감추려 애쓴 질문이지만
앳된 얼굴로 땀을 삐질삐질 흘리던 나는 앞 뒷구르기하면서 봐도 신규인 티가 났을 것이다.
이토록 전문가인 그들이지만,
갑자기 없던 증상이 생기고
늘 먹던 진통제로도 통증이 잡히지 않을 때,
물만 마셔도 쉽게 사례가 걸리고
조금만 움직여도 숨이 차기 시작할 때의 순간들은
그들을 매몰차게도 불안, 두려움, 공포 속으로 내친다.
P.S>
꼭 짚고 가고 싶은 게 있는데, 완화의료는 무조건 말기암 환자들이 받는 건 아니다.
완화의료는 질병 단계와 상관없이 제공된다.
병기 단계와 무관하게 암 환자의 가장 큰 고충인 통증을 비롯한 여러 신체적 증상들의 완화와 심리사회적, 영적 영역에 대한 종합적인 치료를 행한다.
그리고 환자뿐 아니라 그의 가족들의 삶의 질 향상이 총체적 목표이다.
실제로 그래서 우리 병동에는 완화 센터가 함께 있었는데, 그곳에는 간호사와 의사뿐 아니라 심리상담가, 미술치료사, 음악치료사, 사회복지사 등 다학제적 팀이 함께 환자의 치료 방향을 결정했다. 다만 내가 있는 병동은 완화의료 특화병동이었기에 말기 암 환자 우선으로 입원을 받다 보니, 주로 말기 암 환자분들을 만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