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산문1.디지털카메라』

by 이찬우

설이 지나고 첫 보름달이 뜨는 날, 손녀딸이 집에 찾아왔다. 어려서 좋아하던 쥐불놀이가 그립다며 매년 정월 대보름만 되면 약밥을 사서 우리 집을 찾는 녀석이다. 원래대로라면 연가를 내어 하루 남짓 우리 집에 머물러야 하지만 올해는 운 좋게도 금요일이 날인 덕에 주말까지 여기서 보낸다고 한다. 태양이 저물고 달이 마당 감나무에 대롱대롱 달릴 즈음, 그 아이가 도착했다. 처음 보는 정장 차림이 제 아버지의 옷을 뺏어 입은 것 같아 우스꽝스럽기도 했지만 이제 제법 어른 티가 나는 것도 같다. 해가 지날 때마다 바뀌는 그 아이의 분위기가 걱정스럽게 느껴지다가도, 쫑알쫑알 참새처럼 떠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돌돌 뭉친 약밥을 손에 쥐여줄 수밖에 없다. 잡지사에서 일하는 손녀는 유행에 민감하여 우리 집만 왔다 하면 매해 바뀌는 유행을 늘어놓는데, 올해는 ‘레트로’가 유행이란다. 레트로라면 복고를 뜻하는데 말 그대로 과거가 현재의 유행이라는 것이다. 과거가 현재를 대변하는 실정이 아이러니하면서도 나 스무 살 적의 것들이 다시금 세상에 고개를 내민다니 어딘가 신기하기도 하다. 이러다가 유행이 없는 것이 유행이라는 허무적인 해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유행은 돌고 돈다는 말의 정수가 올해에 등장했다며 신나 하는 소녀는 내 옷장에 있는 체크무늬 폴로 셔츠를 꺼내 입고, 어디 두었는지도 까먹은 디지털카메라를 찾아와선 내 앞에 앉았다. 충전선을 연결하고 전원을 켜자 흐릿한 화면이 나오더니 버튼을 누르니 색바랜 사진들이 등장했다. 아이의 첫돌에 찍은 사진, 지금은 떠난 아내와 갔던 호수공원, 딸의 결혼식, 추도예배 사진까지. 카메라 사진첩은 온전히 내 삶의 복고였다. 이날의 눈물이 손녀 앞에서 보인 두 번째 눈물이었다. 추억이 유행된다는 것엔 어쩌면 돌아가고 싶은 이들의 염원이 담겨있을지도 모르겠다. 사진의 질감은 그 시절처럼 거칠었지만, 사진 속 내겐 왠지 모를 미소가 입에 걸려있었다. 행복했던 것이다. 카메라는 그때의 행복을 고스란히 저장하고 있었다. 나와 아내, 딸, 그리고 이 아이까지. 우리의 추억이 오늘 달 아래 다시금 유행이 됐다. 아이의 눈물을 닦아주니 연한 화장이 지워졌고 수수한 눈망울이 사진 속 아기의 모습과 쏙 빼닮았다. 그렇게 우린 약밥에 알밤 하나를 까먹으며 눈물을 말리고, 밭으로 나가 손녀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아주었다. 뻑뻑한 셔터에 조심스레 손을 올렸고, 큰 달이 꼭 함께 나와야 한다는 그 아이 투정에 못 이겨 한장 한장 신중을 기했다. 장차 추억이 될 지금을 이 아이가 또 언제 꺼내볼지 모르니 가장 예쁜 모습을 담아주고 싶었다.

‘찰칵’

추억이 유행이 될 날을 기다렸다는 듯 셔터 빛은 더 밝았고, 색바랜 기억도 꽃을 틔우더니 이내 오늘 밤 별은 달보다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