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현실에 타협점이란 존재하는가』

by 이찬우

사춘기보다 한참 일찍이 내 안에서 혈투를 벌인 것은 종교적 가치관과 현실의 충돌임이 틀림없다. 태어나 교회에 발을 딛고 지금까지. 두 가지가 충돌할 때면 아주 혼란스럽다. 달콤한 것이 몸에 좋지 않다는 말을 빌리자면 기독교 신자인 내게 세상은 달달한 사탕이었고, 주일마다 펼치는 성경은 마지못해 먹는 쓴 약에 가까웠다. 예배가 끝날 즈음 목사님께서 항상 하시는 기도가 있다. “한 주간 우리가 던져질 세상에서도 주님 바라보며 살게 하옵소서.” 이 기도를 듣고 대략 20시간쯤 지나면, 무지의 베일이라도 뒤집어쓴 양 어제의 설교는 뒷전이 된다. 양립 불가능한 것이 내 속에서 양립하려 애를 쓸 때면 죄책감은 한도를 초과하고, 어느 하나 확실히 택하지 못하는 나는 이 싸움 앞에 매번 우유부단한 사람으로 남았다.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위선적 면모를 방패로 세우고 기회주의적 신앙을 일삼는 스스로가 원망스러웠고, 대안책으로 세상과 성경의 타협점을 찾으려 드는 순간이면 그 자체로 대안책이 아닌 성경으로부터의 회피책을 찾는 꼴이 되었다. 일반적인 생각으로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교의 모순적인 면모가 눈에 띄면 줄곧 어딘가로 숨고 싶었다. “절대적 존재가 있다면 세상에 악은 무엇 때문에 존재해야 하며, 살인, 범죄, 시기와 질투는 왜 있어야 하는가.”부터 시작해 성경에 의심을 던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도대체 신앙이 무엇인지 자꾸 고민이 들었다. 교회에 있으면 신앙의 완성이 마치 ‘세상의 유혹에서 벗어나는 혹독한 수련 과정‘으로 부터 파생된다고 느껴지지만, 내가 느끼는 신앙은 최종적으로 나로부터의 탈피이다. ‘죄’라고 표현되는 겹겹의 껍질에 잡아먹히지 않을 숨구멍을 찾고 혈투를 벌이다 끝내 탈피하는 과정인 것이다. 그런데 이 껍질은 아주 정교해서, 숨구멍을 단 하나라도 찾기가 힘들다. 매번 의무감으로 가는 교회에서 숨통을 틔우며 연명했다. 그렇게 나는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적어도 주에 한 번씩은 느끼며 자랐다. 그래서인지 더욱이 눈에 보이는 것에 집착했다. 교회에서 기도할 때의 내 모습과, 그밖에 성경의 허점을 찾으려는 내 모습을 보면, 지킬 앤 하이드, 그리고 무엇이든 배는 칼과 뚫리지 않는 방패의 싸움을 보는 것 같았다. 혈투는 해를 거듭해 내 나이가 스무 살을 넘어갔고, 나에겐 더 이상 엄마따라 가는 교회가 아닌 새로운 명분이 필요했다. 네 가족 모여서 일요일 아침에 식사하듯 가는 교회가 아닌 나 혼자만의 무엇이 꼭 있어야만 했다. 그래서 이걸 찾으려고 대학 다니면서 교회도 꾸준히 나가봤다. 군대에 와서도 마찬가지이고…

그런데 아직도 명쾌한 해답을 내리기 힘들다. 더 나아가 답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모순’이란 두 글자로, 아니, ‘죄’라는 더 적은 한 글자로 대변 가능한 내 모습엔 여전히 숨이 턱 막히고, 그 껍질 속에서 숨구멍 하나 찾기 위해 고뇌와 탄식이 담긴 글을 써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