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산사에 바람이
7. 그 산사에 바람이
나는 어머니의 부름을 받고 선암사로 향했다.
“에미한테는 아무 말 말고 니만 댕기 가거라. 소개할 사람이 있니라.”
겨울의 전주곡 같은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오전 시간에 사무실로 걸려온 어머니의 전화 목소리는 차악 가라앉아 있었다. 어디가 많이 편찮으시냐고 물었더니 괜찮다 시며 오후에 시간을 낼 수 있느냐고 물었다. 오늘 중으로 꼭 만나봐야 될 사람이라 했다. 그 말속에는 열 일 제치고 라도 왔다 가야 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나는 외출 계를 내놓고 나와 택시를 탔다.
무슨 일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영덕이 일은 아닌 것 같았다. 아내가 며칠 전에 다녀왔기 때문에 어머니도 아이도 아무 탈 없이 잘 계신다는 말을 들었다. 그럼 무슨 일일까.
택시의 뒷좌석에 앉아 비 오는 거리를 바라보면서도 내 머릿속은 의문으로 꽉 찼다. 사람들이 다들 움츠린 채 바쁘게 걷고 있었다. 오랜만에 보는 거리의 한산함이다.
“손님 무슨 고민 있습니꺼?”
내 나이 또래는 되어 보이는 운전수가 백미러를 통해 물었다.
“고민이 있어 보입니까?”
나의 반문에 싱긋이 웃으며
“이 시간에 직장에 계실 분 같은데 절에를 가자 캐서, 좀 초조해하시는 것 같기도 하고.”
“어머님이 그 절에 계시는데 급히 오라 하시니 무슨 일인지.”
“부럽습니더. 우리 어머이는 삼 년 전에 돌아가셨는데 불효만 한 것 같아서 어머이 생각만 하모 가심이 아푸지예. 위암이었는데 약도 제대로 몬 써 보았십니더. 먹고 사는 기 뭔지. 날이 갈수록 어머이 생각은 더 새록새록 나고 그 소원이시던 수술이라도 받아 보고 보냈시모 지 맘이 좀 덜 아풀랑가. 수술해도 소양 없다쿠는 의사 말만 믿고 그 원을 몬 풀어 주고 보냈습니더.”
“그러셨군요. 함께 사셨나 봅니다.”
“언지예. 촌에서 농새 짓고 혼자 사시다가 아풀임새 모시고 왔지예. 병원 댕김 시로 같이 살았는데 수술도 소양 없다 소리 듣고는 촌에 가시겠다디예. 손주들하고 한방 거처가 불편하기도 했을 끼고 몬 사는 자슥한테 짐 되는 기 싫었겠지예. 벌어 묵고 산다꼬 임종도 몬 지켰습니더. 거기 그리 한이 되네예. 살아생전 효도하이소. 도시는 노인들 살만한 곳이 못되지예. 우리 어머이도 갑갑해서 병이 더 도지겠담서 촌에 갈라 캤지예. 혼자 사시면서도 보지란 하셔서 철마다 우리 묵을 양식이랑 양념을 챙기 보내시는데. 집 사람은 힘든데 말라꼬 그라는지 모르겠다더니 어머이 돌아가시고 난깨 그리 아쉽다 하데예. 생활비가 배로 든담시로 인자사 어머이 소중한 줄을 알것다데예. 그라모 머합니꺼 배 떠나고 난 뒤 손 들기제.”
나는 운전기사의 이야기를 근성으로 들으며 철 바뀔 때마다 어머니가 하시던 푸념들을 떠올렸다.
“지금 쯤 산나물 뜯을 철인데. 삐삐 빼서 까 묵는 맛이 그립구먼.”
“누르스름하고로 익은 밀 베다가 쇠죽끼리고 난 부석 앞에 앉아 벌건 잉걸불에 꼬실러 묵으모 둘이 묵다 하나 죽어도 모를 맨치 꼬싰는데.”
“동네 아지매들이 모이 앉아 길쌈함서 밥 되리. 떡 되리 해 묵던 동짓달 기나긴 밤, 얼음이 서걱거리는 동치미 맛이 참말로 그립구먼.”
철이 바뀔 때마다 뜬금없이 한 마디씩 하는 어머니를 보다
“옴마 쬐깬할 때 오데서 살았는데?”
하고 물으면 깜짝 놀라기도 하고 무안하기도 한 듯이 내 등을 또닥거리며
“촌에 가서 그리 살모 좋것다는 말이제. 촌에서 살다가 온 사람들이 하는 이약을 들어서 아는 것이제. 내 안태봉이 오덴지도 모르는데. 내도 니도 부산 사람이제.”
어머니는 그렇게 얼버무리곤 하셨다. 어떤 때는 시골에 산 적이 있다 하셨다. 그곳이 어디냐고 물으면 부산 근교의 지독히 못 사는 동네였다고만 하시면서 생각하고 싶지 않다 하셨다. 어머니는 부산에 대한 향수는 없으신 것 같았다. 사람은 나이 들수록 자신이 자라온 곳에 대한 그리움이 짙어진다고 했다. 가보고 싶고, 어찌 변했는지 알고 싶은 것이 사람의 정리라고도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한 번도 그런 곳에 나를 데려 간 적이 없었다. 그래서일까, 내 기억에 남은 고향의 이미지가 있다면 자갈치 시장이다.
“손님은 고향이 오데십니꺼?”
“아, 예. 부산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그라모 촌에 대한 향수는 없것네예. 지는 진주 옆에 있는 사천 곤양이 고향입니더. 촌놈이라선지 나이를 묵을수록 촌으로 들어가고 싶어 환장하것십니더. 다 찌그러진 오두막일망정 집도 있고, 논은 진작 팔아묵어 삐고 없지만 밭떼기라도 있싱께 그런지 모르지만 자꾸 촌으로 들어가고 싶습니더. 에편네가 싫다쿠기도 하고 아 새끼들이 한창 공부할 나이라서 아직은 마음을 못 정하고 있지만 운전대 잡기도 인자 심이 듭니더. 새파란 젊은것들이 설치는 판에 우리 겉은 중늙은이야 맥도 못 추지 예. 배운 도둑질이라꼬 이 짓을 하지만 택시 운전하기도 갈수록 에롭습니더. 다 들 지 차 갖고 있는 판인데. 배는 곯아도 지 차는 몰아야 직성이 풀린다는 기 요새 사람들 사고방식이라 쿱디더.”
“농사는 지어 봤습니까?”
“하모예. 군대 가기 전까지 촌에서 농사 지었습니더. 군대 갔다 와서 장개를 가고 봉깨 마누라가 촌에 몬 살것다꼬 앙탈이니 우짜것십니꺼. 마산 자유수출 지역이 한창 커나갈 임새였지예. 이력서만 너모 취직이 됐지예. 안식구랑 공장 생활 한 3년 하고 난 깨 골병이 들데예. 배운 기 없싱깨 막노동판에서 일하는 것 밖에 되것디예. 생각다 못해 공장 생활함시로 운전을 배웠지예. 군에서 운전병 졸개 노릇하느라고 어깨너머로 본기 밑천이 돼서 이리 밥벌이하는 깁니더. 마산서 부산 온 지 몇 해 됩니더.”
“농사일 힘들다고 나와 사셨던 분이 다시 시골에 가서 살겠습니까?”
“거기 참 요상 하데예. 나가 들수록 농사 지면서 구슬땀 흘리던 일이 새록새록 생각히는 깁니더. 오뉴월 땡볕에 논밭에 거름을 내든가 논갈이를 해 놓고 나무 그늘을 찾아가 늘어지게 자던 낮 잠 한 숨이 우찌 그리 달콤하든지. 손님, 다 왔습니더.”
“이야기 듣다 보니 다 왔군요. 부디 소원 이루시길 바랍니다.”
나는 택시 기사 분이 부럽다고 느꼈다. 돌아갈 자리가 있는 사람은 도시에 살아도 언제나 마음이 풍요로울 것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묻어 있을 산과 들, 흙과 바람, 툭 터인 시야 속에서 자란 사람은 마음조차 넓다지 않는가.
비는 기분 좋게 오고 있었다. 안개비란 표현이 어울릴까, 가을 산자락에 안개가 자욱했다. 갈색 가랑잎이 비에 젖어 떨면서 절 앞을 지켰다. 아내의 표현대로 선암사 주위의 가을은 단풍이 아름다웠던 모양이다. 잡목이 많은 산일 수록 단풍 색깔도 가지가지다. 선암사 주위도 잡목이 많았다. 나뭇가지에서 다 떨어지기 아까워 움츠렸던 나뭇잎조차 가을바람 한 자락에 빗방울을 달고 후드득 떨어졌다.
나는 절 앞 주차장에서 돌아나가는 택시의 꽁무니를 한참 바라보다가 일주문을 들어섰다. 사천왕을 향해 합장을 하고 대웅전을 향해 또 합장을 했다. 돌계단을 걸어 오르며 그 고가의 돌도 이런 돌이었든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불쑥 찾아드는 그 고가의 풍경과 선암사 전경이 흡사하다고 순간 느꼈다.
절 마당에 섰다. 노승이 빗질을 하던 어린 날의 삽화가 비에 젖어 회색빛으로 반들거렸다. 절 안이 너무 조용했다. 숨소리 하나 들리지 않았다. 나는 대웅전 옆문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던 부처님 앞에는 두 사람이 먼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었다. 영덕이와 어떤 할아버지였다. 두 사람은 내 기척에도 꿈쩍도 않았다. 나는 가부좌를 틀고 앉은 아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지그시 감은 눈, 입가에 맴도는 미소. 어느 곳에도 모자라는 아이란 표가 나지 않았다. 어떻게 저 아이가 내 아이란 말인가.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이의 표정과 금빛 불상을 번갈아 바라보며 부처의 얼굴과 닮았다고 느낀 것은 내 착각일까. 세 분의 부처는 너무도 자비로운 모습으로 아이를 감싸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조용히 아이의 뒤에 가서 합장을 했다.
“아부이, 아부이.”
언제 나를 발견했는지 아이가 돌아다보며 반가워 어쩔 줄 몰라했다. 아이는 가부좌를 풀고 일어서더니 내게 안겼다. 아이의 머리에서 향내가 났다.
“영덕아!”
나는 아이를 꼭 껴안았다.
“영덕아 너거 아부지가?”
아이의 옆에 앉아 있던 노인이 나를 찬찬히 따져 살피며 아이에게 물었다.
“으응 우리 아부지다.”
나는 그분이 바로 어머니께서 내게 소개하려는 사람이란 것을 알았다. 그분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분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영덕아, 부처님 뵈었으면 할무이한테 가야제 기다리시는데.”
“응, 아부지 할무이한테 가.”
나는 서둘러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고 대웅전을 나섰다. 노인과 아이가 앞장서서 요사 채를 향해 갔다.
어머니의 방은 식당 뒤편에 딸린 아래채 방 한 칸이었다.
어머니는 벽을 향해 단정히 앉아 염주를 굴리고 계셨다.
“어머이.”
“그래 왔느냐? 바뿔 텐데 오라 가라 해서 미안시럽다. 들어와 앉거라. 동상도 이리 오소. 벌써 상견례는 한 모양이거마. 영덕이는 꽃보살한테 가서 놀거라. 보살님이 니 오모 준다꼬 과재 맹글더라.”
“이잉 싫어. 아부이하고 있는다. 영덕이는.”
“할매 말 들어야제 그래야 우리 영덕이 착하제.”
아이는 그래도 방을 나서기 싫은지 머뭇거리다가 마지못해 일어나 나갔다.
나는 아이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도 마음 안은 깊은 소용돌이에 휘말려 드는 것을 어쩌지 못했다. 어머니는 옆에 앉은 육십 대 노인 보고 동생이라 했다. 어머니 옆에 단정히 앉은 그분은 어딘가 어머니와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넓은 이마며, 쪽 곧은 하관이며, 눈꼬리 부분에 남아 있는 그늘까지도 어머니와 흡사했다. 어머니의 친동생이란 말인가. 아닐 것이다. 어머니에겐 아무도 없다지 않았든가. 여태껏 나는 어머니에게 형제자매가 있으리라는 상상을 하지 못했다. 나는 고아다. 태생도 모른다. 내가 아는 것은 고아원 원장이 지어준 성과 이름뿐이다. 어머니는 늘 그렇게만 말씀하셨던 것이다. 그러면 어머니는 여태껏 나 모르게 부모님 소재를 찾고 계셨단 말인가. 연세가 그만 하시니 부모님은 돌아가신 것이 당연할 것이고 동생을 찾았단 말인가. 그럼에도 의문은 남을 수밖에 없었다.
“니가 놀랬시끼다. 저 사람이 내 동생이라쿵께. 허나 사실이다. 인자 나도 갈 때가 다 돼 가니 마음이 여려지는 모양이다. 꼭꼭 싸매고 저승까지 갈라고 했더마. 안만 캐도 부처님께 죄짓는 거 같아서 훌훌 털어야 할 것 같다. 차마 내 입으로는 긴 말은 못 하겠고 차차로 알게 될낑께내 오늘은 니 외삼촌 캉 인사나 해라. 동상, 내가 말하던 그 아이네. 아한테 절이나 받게. 못난 누이 둔 덕에 맘고생이 많았실 건데.”
나는 그분에게 큰 절을 올렸다.
“누님, 참 장하십니더. 지난 일이야 우찌 됐든 간에 혼자 힘으로 이리 반듯한 조카를 뒀싱께 인자 누가 머라쿠것십니꺼. 진작 만내야 했는데....... 이리라도 만내 봉께 지도 마음이 홀가분해 집니더.”
“세월이 약인 게지. 벌써 수 십 년이 안 흘렀나. 사람 한평생이 참 허무한기라. 내가 죄인 이제. 어머이 아부지를 저승 가서 우찌 보꼬 싶어 요새는 더 잠이 안 오 거마. 야야, 편히 앉거라.”
노인 앞에 편히 앉자 노인은 눈물 글썽한 눈으로 나를 지긋이 바라봤다.
“피는 몬 속이는 갑다. 닮았습니더.”
“그렇제? 우리 손자 봤제. 거기 다 내 탓이라서. 애비야, 인자 니 외삼촌댁도 찾아보거라. 지금은 사천에서 한참 들어 간 촌에서 농장하고 산단다. 동상, 몇 남매 뒀다 했소?”
“삼 남맵니더. 아들 하나에 딸이 둘인데 딸은 서울서 살고 아들은 농사 짐서 부모 거천하고 살거마예. 고향 떠날 때는 참 막막했는데. 옴마, 아부지 돌아가시고 막내마저 그리 되고 난께 고향에 살고 싶은 맘이 싹 없더마는. 그래도 고향에서 그리 먼 곳으로는 갈 수가 없데요. 군대 친구가 사는 사천으로 이사를 했지요. 지금 생각 하모 참 잘한 겁니다.”
“욕봤네. 그때 나는 이 바닥에서 채소 장사함서 살 때제.”
“조카나 누님도 모르는 이약일 끼 거 마는 내 밑에 동상 민구 알지예?”
“하모, 내가 업어 키웠는데 모르겠나.”
“그 아를 아부지는 큰 집에 양자로 보냈지예. 원수지간이 따로 없었지만 핏줄이니 우짭니꺼. 그렇다고 사촌이 있는데 너므 자슥을 양자로 디리모 동네 사람들이 욕 할끼고 항께 큰 아부지가 '내 죽고 나모 우리 집에 들어 오니라'쿠는 약조를 했다 더마는. 아부지는 늘그막에 얻은 그 막둥이를 큰 집에 보내기가 싫었던 기라예. 누님은 그 심정 아시 겄지 예?”
어머니는 돌아앉아 눈물을 훔쳤다.
두 분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보니 막내 외삼촌이 있었던 모양이다. 막내 외삼촌 민구 씨는 육십 년대 월남 파병을 나갔다. 맹호부대 용사가 되어 월남전에 참전했던 것이다. 나는 그때 겨우 국민학생이었고 아무 뜻도 모르면서 월남을 도우려 간 군인 아저씨들에게 위문편지를 썼었다. 월남으로 떠나는 장병들을 전송하기 위해서 대통령이 환송식을 거창하게 떠벌리는 모습을 주인댁에 있는 흑백텔레비전으로 보고 환호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과 함께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단감동 셋집에 살 때일 것이다. 금이 이모는 어머니를 따라와서 우리 옆방에 살았었다. 어느 날 금이 이모는 휠체어를 탄 아저씨를 데려 왔다. 그 장애인 아저씨는 금이 이모의 애인이라 했다. 그 아저씨도 월남 파병을 나갔다가 하체에 총상을 입고 돌아와 의병제대를 했다고 한다. 그 아저씨는 한동안 술이 없으면 하루를 지탱하지 못할 정도였다. 통증이 심해서 그렇다고도 하고, 정글 속에서 베트콩과 싸우던 환영에 시달리는 것을 못 견뎌서 그렇다고도 했다. 조금 전까지 고국에 두고 온 애인 이야기를 하다가 자지러지는 총소리가 멎고 돌아보면 피를 철철 흘리며 죽어 있거나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가고, 머리가 달아난 시체가 되어 뒹군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를 싸잡고 비명을 지르거나 하는 아저씨를 위해 가게로 달려가곤 했다. 나는 아저씨의 술 심부름을 해 주고 용돈도 타 썼다. 아저씨는 호남에다 마음이 무척 좋은 분이셨다. 늘 맹호부대 마크가 달린 얼룩무늬 군복을 즐겨 입었다.
“아저씨 나도 후제 월남 갈랍니더.”
“하모, 섭이는 씩씩한 군인 아저씨 될 끼라.”
“돈도 많이 번다면서예?”
“그라모. 국위 선양하고 외화 획득하는 기라. 그래도 우리나라가 좋은 기라. 전쟁터는 안 가는 게 좋은 기라. 이 아저씨처럼 되모 우짜 끼고?”
“그래도 지는 가고 싶어예.”
그러나 나는 그렇게 원하던 군대에 못 갔다. 그때는 홀어머니에 외아들은 군 입대 면제였다.
어머니는 금이 이모가 어찌나 아저씨를 잘 섬기는지 모른다며 금이 이모 칭찬에 침이 말랐다. 보기 드문 처녀가 부모 잘 못 만나 나쁜 길로 빠지게 되었다고 마음 아파했다. 그 아저씨가 마음을 잡게 된 것도 어머니의 힘이 컸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금이 이모의 아버지가 술고래였는데 외상 술값 대신 금이 이모를 양녀로 달라는 술집 마담에게 그녀를 넘겼단다. 그녀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열세 살에 술집 아가씨가 되었다. 인물이 고왔던 것이 탈이었던 모양이다. 그 술집 마담을 따라 부산으로 온 뒤 부엌데기 노릇을 하다가 열다섯이 되자 양어머니는 손님방에 밀어 넣었고 그때부터 자갈치 시장에서 술 집 색시 노릇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금이 이모 애인이 된 휠체어 아저씨도 술집에서 알았단다.
아저씨가 처음 그 술집에 나타났을 때는 정말 잘생기고 멋진 총각이었단다. 아저씨도 촌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월남 파병 장병 지원 모집에 응하게 되었단다. 군에 가기 전에 색시 집에서 총각 딱지 떼고 가라는 친구들의 등살에 끌려 금이 이모가 있는 술집에 오게 되었고, 금이 이모랑 첫눈에 반해 하룻밤 만리장성을 쌓게 되었단다. 그 들은 이 년여 동안 국경을 넘나드는 편지 사연으로 사랑을 쌓아 갔는데 돌아온 것은 휠체어에 의지한 사람이었다.
“총각 집에서는 아는가?”
어느 날, 어머님이 금이 이모를 불러놓고 물었다.
“모릅니더. 그이가 휠체어 탄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싶더마예 죄받을 소리지만. 지 겉은 가시나 누가 좋아하겠습니꺼. 하릿밤 노리개로 끝내고 마는 기지예. 내 찾아 준 것만도 감지덕지 지예. 아무도 우리를 모릅니더. 저이가 제대하고 온 줄도 부모님은 모릅니더. 놀랠끼라꼬 아직 연락도 안 했다디예. 저 사람이 맘을 잡으모 같이 갈 생각입니더. 저 사람 고향은 산청이라는데 자기 고향으로는 안 갈라쿠고 지 고향으로 갈 생각입니더. 가서 미용실 하나 내놓고 할 생각입니더. 미용실 장만할 돈만 모이모예.”
어머니는 또 금이 이모 없는 틈을 타서 아저씨 마음을 다독거려 주셨다.
“총각이 남의 나라 구하로 갔다가 얻은 훈장인데 그리 허송세월만 하면 여태껏 자네만 기다림시로 그 추잡한 잡것들 시중을 들면서 산 금이가 불쌍 치도 않는가. 미용실 채릴 돈만 되모 고향에 가서 살것담서? 내가 심은 없지만 도와주려네. 마음 단단히 묵고 심지 게 살아야제. 목심이 한 개지 두 개가 아니라는 것을 명념하고 살아야제. 금이는 심지가 굳은 아이잉께 걱정 안 해도 되끼거마. 병신이모 우떻노? 정이 있으모 사는 기제. 둘이 맘 정해 지모 내게 먼저 통고 좀 해 주소. 작은 힘이나마 보태줌세.”
아저씨는 정기적으로 병원에 다니며 치료를 받았다. 정신과 상담도 한다고 했다. 아저씨가 조금씩 안정을 찾으면서 금이 이모도 슬슬 미용학원에 나가 미용 기술을 익혔다.
그 후 아저씨는 금이 이모가 밤일을 하려 홍콩 빠에 나가고 나면 술 대신 나를 불러 바둑을 두자 하거나 장기를 가르쳐 주었다. 내가 아저씨 마음에 들면 숨겨 놓았던 초콜릿이나 가루우유를 한 통씩 주었다. 아저씨의 휠체어를 밀어주곤 했는데 그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것은 옷이든 물건이든 짙은 쑥색이었던 기억이 난다. 러닝도, 바지도, 깡통도 쑥색이었고, 정글 속에서 찍은 흑백 사진에는 커다란 비단구렁이를 목에 감고 서서 웃고 있는 아저씨 모습은 진짜 멋있었다.
금이 이모는 그 아저씨에게 참으로 헌신적인 여자였다. 월남 가서 돈 벌어 오면 결혼할 것이라던 아저씨가 병신이 되어 돌아왔지만 금이 이모는 그 사람과 헤어질 수 없다고 했었다. 아저씨가 벌어 온 돈을 저축해 놓고 그 돈에 자신이 접대부 생활을 해서 번 돈까지 합쳐 고향으로 돌아갔다. 그녀의 고향이 사천이라 했던가.
외삼촌이라는 사람도 사천 근교에 산다고 했다. 나는 왠지 금이 이모가 보고 싶었다.
“어머이, 금이라는 이모가 사천이 고향이라 했지예? 그분 소식은 압니꺼?”
“하도 오래전이라 지금은 소식을 모린다.”
“누님 금이라는 분이 눕니꺼?”
“나를 친 엉가처럼 따르던 아이였다. 월남 상이군인 하고 혼인해서 제 고향인 사천으로 들어갔는데. 그 후 두어 번 댕기 가드 마 내가 집을 옮기는 바람에 소식이 끊어졌니라.”
“집에 가서 수소문을 해 보모 알랑가 모르것네예.”
막내 삼촌이라는 사람도 그 월남전에 참전했다가 가루가 되어 돌아왔단다.
“아버님이 그 가리를 그 산에다 갖다 뿌림시로 이리라도 고향에 돌아왔시니 고맙다 하시면서 우셨지예. 안만 캐도 큰 집 하고는 멀리 떨어져 사는 기 좋것담서 당신 죽고 나모 일가붙이라고는 없는 타관으로 소리 소문 없이 뜨라는 말씀도 했든 기라. 지도 맘을 정하고 있다가 이사를 했습니더. 그러고는 큰 집과는 인연을 끊었지예. 자슥이 자라니 선산을 찾고 웃대를 알라 캐서 몇 년 전에야 고향을 찾았었지예. 지난 한식날에 산소에 댕겨 오다 길에서 순심이 누야를 만내서야 누야 소식을 들었십니더. 진작 찾을라다가 순심이 누야 편으로 소식이나 전한 후에 올라꼬 기다린 깁니더.”
“나도 자네가 가끔 와서 조상님 묏등과 옴마, 아부지 묏등 돌본다는 소식은 듣고 있었제. 차마 연락하라는 소리를 못 하것더마.”
나는 두 분이 나누는 대화의 가장자리만 맴돌면서 핵심을 발견할 수가 없었다. 어머니는 어떤 죄를 지었고, 그 대가로 어린 나를 데리고 고아처럼 살아오셨다는 이야기인데 그럼 나의 족보는 어떻게 된단 말인가. 속이 탔다. 이야기가 자꾸만 겉도는 것 같아서 견디지 못하고 어머니께 대들 듯이 물었다.
“어머이, 저는 무슨 소린지 하나도 모르겠습니더. 제가 알아듣게끔 말씀 좀 해 주이소.”
“그래, 니는 아무것도 모르제. 인자사 에미 과거사 안다꼬 달라질 것도 없다만 너무 보채지 마라. 세상에는 비밀이란 기 없다는 말이 맞는 기니라. 인자 외삼촌 얼굴 봤싱게 고마 가거라. 내가 심히 몸이 불편하다.”
“어머이.”
“너거 옴마 말대로 가거라. 후제 니 외사촌들도 만내 볼 날이 있을 끼다.”
외삼촌이란 분이 말했다. 참 점잖은 분이셨다. 그분에게선 선비 기질이 남아 있었다. 어딘가 학식과 예절이 몸에 밴 모습이었다. 어머니에게도 그런 품위가 있었다. 함부로 범접할 수 없는, 그래서 고아로 자랐다는 것을 믿을 수 없을 때가 가끔 있었다. 그런 어머니의 영향이었을까, 나 역시 귀티가 난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고, 좋은 가문의 자식인 것 같다는 찬사도 들었다.
아내와 혼인하기 전, 어머님과 사돈지간이 될 아내의 친정 부모님을 뵈러 가게 되었을 때 어머니는 나를 불러 앉혀 놓고 이런 말을 했었다.
“처니 아부지 되는 사람이 선생 했던 사람이라면 틀림없이 집안을 물을 것이다. 어차피 너거들은 혼인을 해야 할 사이니 장인 장모 될 사람의 눈 밖에 나서야 되겠느냐. 너의 본은 밀양 박가고, 파는 밀성 공파다. 웃대에 큰 벼슬 한 사람은 없지만 대대로 천석을 하는 부자로 살았고 詩文에 능했다 하거라. 어쩌다 아부지가 병사하시고 어머니 손에 자랐다 하거라. 친인척이 있지만 거의 왕래가 없으니 단출한 두 식구라 해라. 과부 아들한테는 시집을 안 보내려는 것이 딸 가진 부모 마음이다. 니가 그분들 마음에 들도록 노력해라.”
장인은 첫마디에 어디 박가냐, 파가 무슨 파냐, 윗대에 무슨 벼슬을 했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머니가 일러 주신대로 대답을 했고 장인은 흡족해하셨다.
그런데 그것이 꾸며낸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중년이 되어서야 듣게 되다니. 내가 얼마나 어리석은 바 보였든가. 기가 꽉 찼다. 어머니에게 아들이 우롱당했다고 느낀다면 사람들이 뭐라고 할까, 아니다. 오히려 어머님이 현명하신 것인지 모른다. 한창 피가 단 이십 대였다면 나는 당장 그 외삼촌이란 사람을 다그치고 어머니를 못살게 굴어서라도 내 족보를 알아내고 싶어 했을 것이고, 왜 어머니만의 호적에 사생아로 등재되어 살아왔는가를 따지고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묻는다는 것이 부질없다는 것을 느꼈다. 어머니의 얼굴이 파리했기 때문에 덜컥 겁이 나기도 했다. 정말 어디가 몹시 불편하신 건 아닐까.
“어머이, 외삼촌이랑 집에 가입시더. 두 분이 수십 년 만에 만나셨는데.”
“안 된다. 나는 한 이레 더 있다가 초하리 예불 디리고 내리 갈 생각이고 너거 외삼촌은 내랑 있다가 자고 갈 끼다. 사십오 년 만에 만낸 오누인데 우찌 금세 보내것노. 아래채에 가모 꽃 보살이 영덕이랑 놀기다. 보고 가거라. 그 아가 꽃 보살을 엔간히도 좋아하니라.”
나는 어머니의 고집을 안다.
어머니가 일러준 아래채 승방 앞에 가니 좁다란 마루가 있었고 방 안에서 아이의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티 없는 웃음소리만 들으면 가슴이 찡했다. 내 천사가 거기 있었다. 아이를 부르니 승복을 입은 소녀가 아이의 손을 잡고 마루로 나왔다.
“영덕아, 아부지 간다. 할매하고 집에 오니라.”
나는 아이의 손을 꼭 잡았다. 아이는 본래의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다가 내가 아이의 손을 놓고 ‘바이 바이’ 하면서 손을 흔들자 빙긋이 웃으며 저도 손을 흔들었다.
꽃 보살이란 소녀가 합장을 했다. 회색 승복이 참 잘 어울리는 소녀였다. 긴 머리를 뒤로 질끈 묶은 모습을 보니 아직 사미계를 받은 것은 아닌 듯했다. 승복을 입은 소녀의 모습이 너무나 자애로워 보였다. 소녀의 목에 걸린 백팔 염주가 찰랑거렸다. 영덕이가 다시 그 소녀의 한 손을 잡고 한 손을 흔들며 나를 배웅했다.
비는 그쳤지만 회색 빛 하늘은 숲을 어둡게 감싸고 있었다.
나는 나무들의 그림자가 되어 천천히 산길을 내려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