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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촌부 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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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래여 Apr 18. 2023

 하룻밤 새 깊어진 봄

하룻밤 새 깊어진 봄 

 

  딸집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딸이 차려주는 아침밥을 먹고 그 집을 나섰다. 딸은 아쉽고 애잔한 눈빛이다. ‘하루 더 자고 가면 안 돼? 절에 갔다 갈래?’ 아쉬워하는 눈에 피곤이 조랑조랑 달렸다. 딸도 밤잠을 설쳤나보다. 외풍 없는 너른 집에서 편하게 자던 우리도 외풍 센 좁은 방에서 밤잠을 설쳤다. 우리 부부도 예민하고 딸도 예민하다. ‘딸네 집에서 잘 쉬었네. 예쁘게 꾸미고 사니 좋다. 다음에 또 올게. 그땐 같이 여행하자.’며 아쉬운 작별을 했다. 

 

 가지산 깊은 골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국도를 이용하기로 했다. 이제 농부나 나는 고속도로 운전은 무리라는 생각이 지배적이다. ‘이제 우리도 장거리 여행은 못하겠다.’ 솔직한 심정이다. 산길을 천천히 달리다보니 가지산 온천도 보이고 석남사도 있고 운문사도 있다. 피곤했지만 가는 길에 가까운 석남사를 들렸다. 내 부실한 다리로 일주문에서 경내까지 걸어야 한다면 포기하고 돌아 나올 생각이었다. 다행히 ‘다리가 불편해 먼 길을 걷기 어렵다고 하자’ 매표소 스님이 편리를 봐주신다. 덕분에 석남사 부처님을 뵈었다.

 

 석남사, 골짝은 변함없었다. 너른 반석에 맑게 흐르는 옥수, 참 오래 전에 다녀갔었다. 석남사를 재건한 인홍 스님을 생각한다. 절을 중창할 때 스님이 직접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을 놓았다고 했다. ‘누워서 편안할 때 지옥 고를 겪는 중생을 생각하라’고 하셨던 스님, 지인이 석남사에 메주를 쑤어 간장을 담가 드리러 올 때 몇 번 따라왔던 기억도 있다. 윤하 큰스님도 뵈었던 자리, 그 땐 성철 스님의 따님으로 알려진 불필 스님도 계셨다. 지금은 해인사에 들어가 계신단다.  

 

 고즈넉한 절, 부처님 앞에 앉아 눈을 감았다. 언제나 내 마음 한 자락 잡고 있던 절에 왔다는 것이 너무 좋았다. 비구니로서 성철 스님께 인정받았다던 인홍 스님을 모신 사당에 들렸다. 온화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신다. 만난 적도 없지만 스님의 일대기를 읽고 마음에 모셨던 어른이라 그럴까. 낯설지 않다. 깊은 산속 절에 가면 꼭 내 집에 온 것처럼 편안해지는 이유를 생각한다. 전생에 불가와 인연이 깊었고 현세에서도 여전히 불교와 인연이 깊다고 느낀다. 가족이 모두 마음공부를 하는 것도 부처님의 가피요 인연 덕이 아닐까. 

 

 석남사를 나와 언양을 지나고 밀양 얼음골을 지났다. 진달래가 피고 개나리가 핀 산길을 에돌아오며 곳곳마다 추억 한 줄 떠올랐다. 얼음골에 계신 소설가 선생님을 생각하며 얼음골 사과도 샀다. 밀양 산골에 계시다 돌아가신 시인 선생님도 추억한다. 중년 시절 참 부지런히 오갔던 길이기도 하다. 전국 농어촌 문우들과 만나기도 했고, 밀양 문학회, 경남, 부산 작가회 회원들과 만나기도 했었다. 전국에서 이름난 원로 시인, 소설가, 수필가도 밀양 얼음골에서 뵙기도 했었다. 당당하게 내가 누구라고 자기홍보를 하는 작가들 속에 나는 부끄럼 많은 촌부였다. 

 

 밀양을 빠져나왔다. 한 때 밀양은 내 손바닥 안처럼 훤했었다. 밀양 친구도 생각했다. 할머니가 된 우리, 가까운 경남 일대에 살아도 모이기 힘들어진 문우들, 운전대 잡기도 겁나는 나잇살, 남은 나날은 앉아서 장 천리 보고 서서 구만리 보는 법을 배워야 하겠지. 서글퍼지는 마음을 풀고자 ‘목욕하고 점심 먹고 갑시다.’ 부곡 온천탕을 찾았다. 냉 온욕으로 피로를 풀고 나와 맛 집을 찾았다. 

 

 맛 집 마당에서 땅콩을 파는 할머니를 만났다. 한 봉지에 만 원, 주인이 국산 땅콩 맞는단다. 할머니의 처량한 눈빛을 떨칠 수가 없어 한 봉지 샀다. 점심은 내가 좋아하는 갈치조림을 시켰다. 1인분에 2만 원, 관광지라 그럴까. 갈치는 통통하게 살쪘다. 돈은 쓰라고 있는 법이라며 맛있게 먹었다. 넉넉하게 나온 갈치조림, 다 못 먹으면 싸가지 했지만 싹싹 긁어 먹었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이 소나기가 쏟아졌다. 오랜 가뭄이었다. 물난리가 난 고장도 있다고 들었다. 농번기가 시작됐는데 가뭄이 계속되어 모두들 걱정했다. 단비, 시작한 김에 흠뻑 내려주길 바랐다. 집에 도착하자 촉촉하게 젖은 마당과 잎눈이 파릇한 나무들, 어제 아침 떠날 때는 입을 꼭 다물고 보일 듯 말 듯 하던 삽짝의 개나리가 활짝 벌어졌다. 산비탈에는 진달래가 발그레 하다. 


 하룻밤 새 깊어진 봄이 주인을 맞이하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잘 도착했다. 네가 해 준 밥, 참 맛나게 먹고 잘 쉬었다. 세상의 중심은 너 자신이다. 이타행이든 자비심이든 네가 중심일 때 이룰 수 있는 거다. 항상 우리는 네 곁에 있다. 고맙다.” 

  딸에게 문자를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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