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촌부 일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박래여 Apr 15. 2023

내 영혼의 기억은

 내 영혼의 기억은  

   

  장자크 로니에의 <영혼의 기억> 마지막 장을 덮고 창밖을 바라본다. 환한 마당, 움 터기 시작한 모과나무, 활짝 피어 꽃잎을 떨어뜨릴 준비를 한 매화, 푸른 오죽, 푸른 소나무, 아직 잎눈조차 솟지 않은 겨울나무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자나 깨나 불조심을 해야 할 정도로 마른 잔디밭에 앉은 햇살, 평온한 내 삶의 자리에서 영혼의 기억을 생각한다.    


  내 영혼의 기억은 어떤 것일까. 인간은 윤회의 사슬에 묶여 돌고 돈다고 한다. 내가 살고 사랑하고 죽었던 삶의 여정은 어떤 경로를 통해 나에게 전달될까. 마법을 잃어버린 현대 사회를 살면서 그 마법 속에 저장된 내 영혼의 기억을 한 번쯤은 떠올려 봤던 시절도 있지 않을까.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시대 다른 모습일 때의 나를 기억할 수 없지만 분명 내 영혼이 머물던 자리는 있지 않을까. 

 

 예전에 중국을 여행할 때였다. 뽕나무 밭이 무성한 마을을 지나치면서 그 마을이 낯설지 않다고 느꼈었다. 평화롭고 고즈넉하던 풍경을 바라보며 ‘왜 이렇게 익숙한 길 같고 익숙한 풍경일까.’ 의아해했었다. 일행들과 그 지역을 돌며 내가 전생에 여기 살았던 모양이라고 우스개를 했었다. 내가 워낙 전생과 전설, 신화, 마법 같은 정신세계에 대한 책들을 좋아해서 나도 물이 들었나 보다고 웃어넘기지만 그런 익숙한 그림들이 있다. 

 

 나는 여행을 즐긴다. 집에 가만히 있다가도 어디든 나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면 ‘바람 쐬고 싶다.’ 한 마디면 만사형통이다. 농부는 하던 일을 접고 길을 나섰다. 목적지를 미리 살피지도 않는다. 발길 닿는 대로 가자. 희한하게 한 번도 간 적 없는 곳을 지나면서 ‘여긴 참 익숙해. 예전에 왔던 곳 같아. 내가 살았던 곳 같아.’ 생각할 때가 많다. ‘저쪽으로 가자.’ 그 길로 가면 내가 보고 싶은 것, 호기심을 느낄만한 것이 분명 있었다. 스치는 사람들 표정까지 늘 알던 사람들처럼 낯설지 않음을 느낄 때가 많다. 전생에 나와 어떤 각도로 맺었던지 스친 인연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삶에 부딪혀 살 때는 정신세계를 노닐 여유가 덜했지만 지금 나는 한가하다. 하루가 참 느슨하다. 책 읽고, 글 쓰고, 수영하러 다니고 살림 사는 것이 일과다. 사람들과 부딪힐 일도 없고, 수다를 떨거나 성가실 일도 없다. 농부와 둘만의 일상에 익숙하다. 조용히 관조하는 삶이다. 아침은 농부가 샌드위치를 만들었다. 텃밭에 갓 올라온 상추 잎 몇 개 뜯어 삶은 달걀을 으깨고 마요네즈에 섞어 빵 속에 넣었다. 빵과 커피 한 잔, 농부가 차린 밥상은 간소하지만 정성이 들었다. 

 

 나는 소설 <영혼의 기억> 속 한 장면을 열었다. 

 ‘아프리카 초원지대에 불이 났어. 살려면 너른 강을 건너 반대편 강기슭으로 도망가야 해. 사자나 코끼리 같은 큰 짐승은 쉽게 강을 건넜어. 개구리 한 마리가 강가에 닿았어. 막 강을 건너려는데 전갈이 애원했어. 나를 네 등에 업고 저 강을 건너 주면 평생 너를 안전하게 지켜주겠어. 개구리는 생각했지. 평생 나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전갈이 옆에 있다면 두려움도 없이 살 수 있잖아. 좋아. 내 등에 업혀. 그렇게 강을 건너는 중인데 강의 중간쯤에 이르러 개구리의 등이 따끔한 거야. 몸이 마비되어 가면서 개구리가 물었지. 왜 내게 독침을 쏜 거야? 너랑 나랑 같이 죽게 됐잖아. 전갈이 뭐라고 했게?’

 

 전갈은 찌르는 것이 본능이라고 대답했지만 우리는 영혼의 탐험을 계속하게 된다. 개구리 같은 인간, 전갈 같은 인간이 공존하는 세상이다. 위험한 곤충인 전갈을 등에 태운 개구리는 탐욕에 눈이 먼 것이고, 본능에 충실한 전갈 역시 제 죽을 짓인 줄 모르는 어리석은 존재다. 설마가 사람 잡는다. 는 속담이 있다.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했는데도 아니겠지. 그 사람이 내게 그럴 수 없어. 착각이겠지. 설마가 사람 잡는 거다. <영혼의 기억>에서 심령술사인 볼강이 영혼의 짝 로르를 만나는 것도 로르를 잡고 있는 어둠의 영혼 이프도 이승을 순례하는 영혼의 동반자들이다. 


 지금 내 반쪽인 농부와 나는 전생에 어떤 길을 돌고 돌다 만났을까. 우리 영혼은 다음 생에서는 어떤 길을 걷게 될까. ‘전생에 우리는 비구와 비구니였던 것은 아닐까?’ 우스개를 던질 때가 있다. ‘다음 생에 윤회하지 않으려면 남은 생 열심히 마음 닦는 수밖에 없어.’ 그런 농담도 주고받지만 여전히 나는 내 이익 먼저 챙기는 개구리 인간에 머무는 것 같다. 위험을 등에 업으면서도 위험을 감지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인간으로 살아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흐린 하늘이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