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끝>
우선 자영이 남자에게 길들어 살게 된 것부터다. 자영은 스님이었다. 지리산 깊은 골의 작은 암자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자신을 고아원에서 데려다 키워준 은사 스님을 따라 자연스럽게 머리를 깎고 회색 승복을 입었다. 오랜 세월 세속의 나이는 잊어버리고 선방에 칩거해 살았다. 그런데 나이 사십 줄에 들어서면서 딱히 탈 난 곳도 없이 시름시름 아팠다.
“해월아, 사람 사는 곳으로 가 보아라. 참선만 한다고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니라. 사람에게는 다 저만한 그릇이 있는 것이고, 그 그릇만큼 살아야 하는 거다. 속세에 나가 살아보면 깨달아지는 것이 있을 것이니 너무 섭섭해하지 말고 나가거라.”
은사 스님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얼마나 있다 오면 될까요?”
“인연은 인연이 다하면 그만인 것, 부처님이 이끌어주실 것이니 모든 걸 부처님께 맡기고 떠나거라.”
자영의 법명이 해월이다. 해와 달처럼 살아가라는 뜻으로 스승이 지어준 이름이다.
자영은 바랑 하나 메고 산을 떠났다. 운수행각을 하며 여기저기 떠돌았다. 자영은 지리산 깊은 골을 떠날 때 ‘어디든 인연 닿는 곳이 있을 게다. 그곳에 머물러라.’ 스승님의 말씀 한 마디 가슴에 새기고 정처 없이 길을 떠났던 것이다. 우연찮게 안담이라는 동네로 찾아들게 되었고, 새의 둥지 같이 아늑한 그 동네가 맘에 들어 빈집을 얻었다.
방안에 부처를 모시고 참선에 들어 사는 자영에게 어느 날 머리가 하얗게 세고, 허리가 꼬부랑한 일흔 대 여섯은 되어 보이는 노 보살이 찾아왔다. 지척에 산다고 했다. 이웃사촌인데 얼굴이나 익히고 살자고 했다. 더불어 사는 게 인생이다. 아무리 승복을 입었지만 촌 동네 들어와 살게 되면 동네 사람들에게 신고식을 해야 하는 게 도리다. 신고식도 하지 않고 조용히 숨어든 여승을 동네 사람들은 별로 달가워하지 않았다. 자영도 자연스레 그 느낌을 받았다. 그러던 차에 노 보살이 물꼬를 틔워 준 것이다.
“시님, 부처님께 좀 빌어 주이소. 우리 아들 장개 좀 가도록 기도 좀 해 주이소.”
하면서 쌈지를 풀어 만 원짜리 지폐 한 장을 꺼내 부처님 앞에 놓았다.
그렇게 노 보살과 친하게 되자 자연스럽게 한 동네 사람으로 인정도 받게 되었다. 여승이라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던 사람들도 스님, 스님 하면서 찾아들었고, 그녀에게 집안의 사연을 풀고, 집안의 대소사에 대한 상담을 하게 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를수록 노 보살과 자영은 모녀처럼 끈끈해졌고, 노 보살의 아들은 자연스럽게 그녀를 누님이라고 불렀다. 세속의 나이로 따지면 자영이 남자보다 대여섯 살은 많았다. 더구나 남자는 이미 결혼을 한 경험이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첫사랑과 팔 년 연애 끝에 결혼하여 일 년 만에 파경을 당한 불운한 사나이였다. 시집살이도, 농촌생활도 도저히 참아낼 수 없다고 아내가 보따리를 쌌던 것이다.
자영은 이유 없이 앓아눕던 몸이 자신도 모르게 좋아졌다는 것을 느꼈다. 어지럽지도 않았고, 소화도 잘 되었고, 심하던 변비도 없어졌다. 시들어 가는 꽃 같다던 얼굴이 ‘시님 얼굴이 박꽃처럼 피네. 시집갈 때가 된 기라.’ 노 보살의 놀림에 발갛게 얼굴 붉히곤 했다.
자영은 노 보살에게 의지했고, 노 보살은 자영에게 의지했다. 어머니와 딸처럼 의좋게 지낸 지 3년째 되는 날이었다. 노 보살이 자영을 집으로 청했다. 자영이랑 남자를 나란히 불러 앉히더니 먼저 자영의 손을 꼭 잡았다.
“해월 시님, 인자부터 내가 하는 말 새겨듣고 좋으모 좋다고 고개만 까닥해 주이소. 노망 난 할멈이라 캐도 할 수 없고. 고마 시님, 내 딱 까놓고 말하리다. 인자 고마 그 죄수복 좀 벗어 뿔고 내 며누리가 되어 주소. 전생에 시님과 나는 모녀간이었고, 이승에서는 고부간으로 맺어져야 할 사이라. 새복 꿈에 부처님이 현몽을 하시는 기라. 그래서 내가 시님을 불렀소. 그러니 둘이 물 한 그릇 떠 놓고 부처님 앞에서 예 올리고 짝으로 살모 좋겠는데. 타고 난 사주팔자는 고칠 수도 없다 했으니. 꼭 그래 주모 좋것는데. 만약 둘이 살모 저 우 구시골에 있는 천수답 밀어 삐고 양옥 한 채 지어 둘이 나가 살아도 좋고, 부처님을 모시는 집으로 해도 좋고. 그래 주모 딱 좋겠는데. 둘이 생각은 우떨꼬.”
자영은 얼굴을 붉혔다. 노 보살은 이미 그녀의 마음을 알고 있었던 듯했다. 해월은 첫눈에 그 남자를 동생으로 본 것이 아니라 한 남자로 봤다는 것을. 남자 역시 누나스님이라고 놀리면서 치근덕거렸지만 정작 그녀를 스님으로 본 것이 아니라 여자로 봤다는 것을. 서로 말은 안 했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마음이 통한다는 사실을 알았었다.
그렇게 자영은 승복을 벗었다. ‘참선만 한다고 부처가 되는 것은 아니니라.’ 비로소 자신을 세상 속으로 떠민 스승님의 뜻을 알게 되었던 것이다. 자영은 비로소 여자가 되었다. 사랑을 아는 여자, 남자를 사랑할 줄 아는 여자, 음양의 조화로움이야말로 인생의 최대 행복이자 기쁨이란 것도 깨닫게 된 여자.
그러나 신은 여전히 모든 걸 다 주지 않는다. 달이 차면 기울 듯이 하나를 주면 하나를 앗아가게 되어 있는 것이 인생살이인지. 그렇다. 행이 있으면 불행이 있고, 앞면이 있으면 뒷면이 있는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하나가 차면 하나가 기우는 법이다.
노 보살은 며느리를 얻자 손자를 원했다. 둘 다 나이가 꽉 찼으니 아들이든 딸이든 늦둥이 한 명만 낳으라고 채근했다. 염소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 그 뱃속에 익모초와 밤, 대추를 넣어 가마솥에 푹 고아 짜서 그것을 끼니때마다 한 그릇씩 안기는데 환장할 지경이었다. 삼십여 년을 생선비린내도 안 맡고 살아온 여자에게 가혹한 형벌이었다. 그래도 참았다. 그것이 노 보살의 애정이란 것을 아니까.
“너거는 밥 묵고 퍼떡 자거라. 나는 회관에 나가서 놀다가 느지막이 들어 올깅게. 전기세 많이 나온다. 경 읽는다고 앉았지 말고 퍼떡 자거라.”
은근히 아들을 채근하며 둘만의 잠자리를 편하게 갖도록 자리를 비워주었다. 손자를 원하는 시어머니의 배려였다. 그럴수록 자영의 마음은 쪼그라들고 타 들어갔다. 파계를 하고 남자를 택한 것이 부처님께 큰 죄를 지은 것처럼 견디기 힘든 고통이었다. 보다 못한 남자가 결단을 내렸다. 분가하자.
남자는 구시골에 있는 천수답을 밀어 아담한 양옥 한 채를 지었다. 순전히 아내를 위한 배려였다. 시어머니의 노골적인 손자 타령으로 숨이 턱턱 막히는 아내를 도피시키는 방법은 오직 하나 분가였다. 처음부터 구시골에 집 한 채 장만해 주겠다던 노 보살은 막상 아들이 집을 지어 두 사람만 분가를 한다니까 노발대발했다. 자연히 그 화살이 자영에게 쏟아질 수밖에 없었다. 자영은 졸지에 눈치꾸러기로 전략해 버렸다. 하지만 남자는 어머니의 반대를 뿌리치고 분가를 결행했다. 그때는 머지않아 그 자리에 들어앉을 임자가 나타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자영의 빈자리를 메워 줄 사람은 뜻밖에도 금세 나타났다.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다가 쥐를 덮치는 고양이처럼 ‘저 아를 내 며느리로 다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느 날 갑자기 시어머니의 최후통첩이 날아들었던 것이다.
자영은 그니의 집 삽짝을 들어섰다. 푸른 담쟁이 잎이 너풀너풀한 돌담이 앙증맞게 쌓여 있는 집, 다른 집들이 다들 돌담을 헐어버리고 시멘트 블록 담을 쌓을 때 절대로 허물 수 없다고 버틴 집, 사철 담쟁이넝쿨이 예쁘게 감싸고 있는 돌담, 돌담 양쪽에 둥근 나무기둥만 세워진 삽짝은 십 년 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담장 안이 온통 우거진 숲으로 변해 있는 것이 다를까. 자잘하던 나무가 십 년 새 많이도 컸다. 자영은 길재 선생의 시조 한 수 읊조렸다. ‘인걸은 간 데 없고, 잡초만 무성하니,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자영은 그 시조를 살짝 바꾸어 이렇게 읊조렸다. ‘안 주인 바뀌어도 나무는 푸르게 자라 세월은 꿈과 같이 흐르기만 하는구나.’
자영은 삽짝을 깊숙이 들어가 마당 가운데 섰다. 집은 마당을 동그랗게 가운데 두고 기역자 식으로 안채와 아래채, 헛간으로 나누어져 있었다.
집안은 괴괴했다.
“형우 엄마 있어?”
자영은 큰 소리로 그니를 불렀다.
꽉 닫힌 안채의 현관문을 열었지만 안은 조용했다. 자영은 현관문을 닫아놓고 다시 아래채 방문을 열어봤다. 가슴이 싸하니 아팠다. 남자와 여자가 처음으로 한 이불을 덮고 누웠던 방, 처음으로 한 남자의 손길로 열렸던 육체의 문은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이상한 희열로 뜨겁게 달아올랐던 기억의 편린이 그 방에서 날아 나왔다. 아, 그래, 이 방은 나보다 먼저 그니와 남자의 방이었지. 새삼스럽게 질투 비슷한 감정이 치솟았다.
지금은 아들 형우의 방이었다. 아래채는 아들의 공부방으로 예쁘게 꾸며져 있었다. 솜씨를 보니 남자의 것이었다. 틈나는 대로 오르락내리락하더니 그 사이 아들의 공부방을 꾸며 준 모양이었다. 책상도, 옷장도, 침대도 남자의 손길이 묻어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자영은 문턱에 걸터앉아 십 년 전 그날을 떠올렸다.
“해월아, 너거 둘이 저녁 묵고 집으로 좀 온나. 할 이약이 있다.”
시어머니의 호출을 받았다. 시어머니의 음성은 동짓달 들녘의 서릿발처럼 매서웠다. 허리만 구부러졌다 뿐이지 어머니는 짱짱했다. 새로 들인 며느리에게서 손자를 얻을 수 없는 데다 아들이 며느리를 데리고 새 집을 지어 분가를 해 버리자 노기가 하늘을 사무쳤다. 거의 일 년 동안은 자영의 얼굴도 보기 싫다 했다. 자영이 울며불며 빌었다. 용서해 주지 않으면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겠다고 하자 ‘그래, 자식복은 사람 힘으로 안 되느니라. 부처님과 삼신 할매가 점지해 조야제. 너거 둘이 합궁은 들었다는데. 자식 운이 없긴 하다더라.’며 결을 삭이긴 했지만 예전처럼 살가운 고부간이 될 수 없었다. 뭔가 모를 껄끄러움이 두 사람 사이를 긴장시키곤 하던 차였다.
시댁으로 내려가니 낯선 방문객이 있었다. 예닐곱 살쯤 되는 남자아이가 시어머니의 치마폭에 안겨 있었고, 그 옆에는 예쁘장하게 생긴 삼십 중반의 여자가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남자는 그니를 보자마자 얼이 빠진 얼굴이었고, 아이는 남자와 여자를 번갈아 가며 멀뚱멀뚱 쳐다보는데 남자와 판박이였다.
“그래, 내가 말 안 해도 다 알것제? 이 아가 형우다. 너거 아들이다. 그리고 야는 바로 내 며느리다. 잠시 한 눈 팔다 인자 제정신이 돌아와 찾아 온기라. 애가 내년에 핵교 들어가는데 지 애비 호적이 있어야 안 되것나. 남의 자식으로 올릴 수가 없제. 에미가 생각하고 생각해도 이 방법 밖에 없더란다. 인자 여서 내랑 살기로 했다. 너거도 이해하기 바란다. 특히 해월아, 니가 도와조야 한다. 니는 참선 공부를 한 사람잉께 내가 말 안 해도 잘 할기라 믿는다.”
그렇게 그니는 되돌아왔다. 법적으로 남자의 아내는 자영이었고, 형우는 그녀의 아들이 되었다. 그니는 동거인으로 올랐지만 따지고 보면 그니는 조강지처 자리로 당당하게 귀환한 것이다.
이태 전, 시어머니 돌아가셨을 때도 그니는 큰며느리 구실을 톡톡히 했다. 집안에서도 재혼한 자영은 열외였고, 그니가 큰며느리였다. 더구나 아들까지 혼자 손으로 일곱 해나 키워 데리고 온 고마운 사람 아닌가.
“어머, 형님 언제 오셨어요?”
자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녀 앞에 또 한 사람의 여자가 반갑게 웃었다.
“응, 형우 아비가 토마토 모종 갖다 주고 오라고 하네. 시들기 전에 텃밭에 심지 그래.”
“알았어요. 그렇잖아도 그이가 전화하데요.”
“그랬어? 혹 저녁 먹으러 여기 온다고 안 했나?”
“아니요. 주말에만 가끔 들려서 형우만 보고 가는걸요. 그이는 형님만 여자로 보이는 것 같아요. 나는 통 여자로 봐주질 않으니. 어떤 때는 내가 왜 이렇게 사나 화가 나기도 해요. 형님보다 내가 더 젊은데 영 곁을 안 주네요. 어머니 계실 때는 어머니의 불호령으로 자고 가기도 하더니. 혹 형님이 강짜 놓는 것은 아닌지 몰라.”
“별소리 다 한다.”
“농담이에요. 그이한테 섭섭해서요.”
“우리 사이 참 이상하고 야릇하다. 그치. 이제 이런 이야기도 아무렇지도 않게 하고 말이야. 저녁에 내려가라고 등 떠밀어 볼게.”
자영은 그니와 마주 보며 활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앙금을 삭이는 약이 들어있는 것이 아닐까. 자영은 웃고 있는 그니를 보며 자네도 딱하고, 나도 딱하지만 어쩌면 우린 전생에 아주 친한 자매였는지 몰라. 한 남자를 가운데 놓고 사랑하다 죽은. 그래서 다시 이승에서 만났는지 몰라. 이제 그니도 젊지 않았다.
자영은 그니와 노닥거리다 집에 왔다. 남자는 아직 밭에서 돌아오지 않은 것 같았다. 부리나케 저녁 준비를 했다. 뜨물을 톡톡하게 받아 매운 고추를 썰어 넣어 맵싸하게 시래기 된장국을 끓이고, 마늘종 조림, 달래 무침, 얼갈이배추 겉절이, 오이 무침 등. 푸성귀만 가득 차려냈다.
해거름에 밭에서 돌아온 남자는 시원하게 몸을 씻고 식탁 앞에 앉았다. 온통 채식뿐인 식탁 위를 쭉 훑어본다. 자영은 또 시작이야. 속으로 궁싯거리며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푸른 초원이구마. 내가 노룬가 맨날 풀만 묵고로. 이래 풀만 묵어대니 기운이 나야지. 냉동실에 괴기 없소?”
돈 주고도 사 먹을 수 없는 싱싱한 무공해 표 자연산 밥상인데도 남자는 또 볼멘소리다. 고기 좀 먹잔다. 남정네가 풀만 먹고 무슨 기운을 쓰겠느냐고. 식탁 위에 염소랑, 닭이랑, 소가 뛰어다니면 딱 알맞겠다고. 비육하기 가장 나쁜 인자를 가진 남자는 날마다 육 고기를 먹어도 살이 안 찐다.
“미안해라. 없는데요. 광우병이나 조류독감 걸릴까 봐서. 그딴 거 안 먹는 게 좋은데.”
“말 되는 소리를 하소. 풀만 먹고 이러다 영양실조 걸려서 내 먼저 죽으모 좋겠소?”
자영은 고개를 밥그릇에 박고 입술만 달싹대며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밤만 되면 차고 넘치는 게 기운이면서. 두 여자 거느리는 것도 모자라 한 명 더 거느리려고. 그래, 고기 많이 먹고 한 명 더 거느려도 너끈할 것 같긴 하네. 채식하면 좀 좋아. 몸도 가볍고, 머리도 맑아지고, 육 고기라면 근처에도 가기 싫어하는 내 생각 좀 해 주면 어디 덧날까.”
“머라삿소? 할 말 있으모 툭 까놓고 해 보소. 내가 괴기 묵자는 기 그리 기분 나뿌요?”
남자의 눈이 야릇하게 빛난다. 자영은 젓가락으로 입술을 꾹 누르며 한 마디 했다.
“참, 형우 엄마가 당신 기다린다고 했는데. 저녁에 삼겹살 푸짐하게 준비해 놓고 원앙금침도 깔아놓겠다고. 나보고 당신 좀 보내라고 했어. 지금 내려갈래요? 형우 엄마는 고기 좋아하잖아. 나보다 젊고 육덕도 푸짐하고, 당신 말이라면 끔뻑 죽잖아. 얼렁 가세요.”
꼿꼿하게 갈기를 세운 남자가 자영을 째려본다. 자영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주눅이 든 척 눈을 내리 깔았다. 푸른 추원 위를 노룬지 꽃사슴인지 순록인지 떼를 지어 신나게 달리기 시작했다. 그 뒤를 눈에 불을 켠 사자 가족이 내달리고 있다. 갑자기 뒷덜미가 뜨끈해졌다. 남자가 자영의 목덜미를 잡은 것이다.
“그래, 이렇게 해 달라는 말이지? 좋아, 이 밥 먼저 묵자. 나도 심하게 바라던 참이니까.”
자영의 고개를 뒤로 젖히더니 자영의 입술에 남자는 입술을 댔다. 한 팔은 등 뒤에서 가슴을, 한 팔은 의자 밑에 넣고 두 다리를 휘딱 들었다. 자영을 안은 남자는 방문을 열었다. 남자는 뿔난 멧돼지처럼 씩씩거렸고, 자영은 멧돼지에게 눌리어 끙끙 앓았다.
두 사람이 다시 식탁에 앉았을 때는 된장국도 식어빠지고, 반찬도 빛이 바랬지만 남자는 기분 좋게 숟가락을 들어 국을 푹 퍼 마시며 말했다.
“아따, 참 맛있다. 당신도 질투할 줄 아니 여자 같아 보이네.”
아내가 예뻐 죽겠다는 표정이다. 자영은 살짝 눈을 흘기며
“고기 안 먹어도 힘이 장산데 맨날 고기 타령이야. 미워 죽겠어.”
그러면서 서둘러 냉동실에 든 삼겹살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넣고 해동을 눌렀다.
‘누가 그랬던가.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저이 염장을 질러 불꽃을 피우다니 나도 이제 여우 띠 해도 될 것 같네. 형우 엄마, 미안해. 나 아직 질투하는 걸 보니 여자가 맞긴 맞나 봐. 어쩌지. 약속 못 지켜서.’ <끝>